•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1. 신분제의 동요
  • 3) 향리 및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 (2)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가. 문·무반의 신분적 융합

 고려 후기 양반 귀족의 신분동요는 양반귀족의 신분상의 몰락이나 상승을 의미하기보다는 지배계층 내부의 상호간 위상변화 즉, 권력의 우위권이나 신분 특권상의 변화 등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곧 무신란 이후 정치권력 담당자의 성격 전환과 그들의 지배적 특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새로운 사회질서의 개편이 이루어졌던 것이고 이는 곧 고려 후기 신분제 변화의 계기 가 되었다.

 고려 전기에 있어서는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귀족을 중심으로 엄격한 신분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이 귀족계급은 오로지 문반에 의해서만이 형성되었고 같은 관료층인 무반은 한 단계 낮은 신분으로 상대적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따라서 국가 통치체제 운영의 근간이 되었던 문무양반체제 내에서 신분적으로 구별되는 계층이 존재하는 것이 되어 상호집단간에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내적 모순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문신 중심에서 무신 중심으로 정권이 교체된 무신란을 계기로 문신 중심의 귀족사회는 변질되고 새로운 형태의 양반제와 신분제가 운영되었다. 무신의 정권 장악에 따라 무신의 지위는 상승되었고 아울러 문반과의 신분상의 차별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문반귀족이 몰락하고 무반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도 양반제는 유지되었다. 이 변질된 양반제도는 형식적인 외형은 무신란 이전과 다름 없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문무간의 상호교통이 일반화되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즉 무반의 문반직 겸직과 무신정권의 비호를 받는 문신들의 무반직 겸직이 일반화되었다.066) 邊太燮,≪高麗政治制度史硏究≫(一潮閣, 1971), 322∼327쪽.

 먼저 무신란 이후 무반에 의한 문반직 겸직을 살펴보자. 원래 무신란 전에는 무반의 문직 겸유는 그 관직 수여의 경우나 또는 수여되는 문관직 자체에 제한이 있었지만, 무신란 후에는 아무런 제한없이 무반의 문반직 겸유가 일반화되었다. 이는 정권을 장악한 집단이 그들의 통치기구인 문반직을 자의로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무신들의 문반직 겸유의 실태를 살펴보면, 우선 무신란 직후 무신 에 대한 회유책으로 전원을 일급 특진시키고 있다. 이 때 상장군은 守司空 僕射에 가하였는데 이는 무신란 전의 무신의 문직 겸유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 보이며 명종 즉위 후 본격적인 문직 겸유가 시작되었다. 무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명종은 일대 인사개편을 발표하였는데 이 때 무신들이 많은 문무관직을 차지하여 鄭仲夫와 梁淑은 참지정사, 李紹膺은 좌산기상시가 되는 등 무신의 문반직 겸유가 실제화되었다. 이후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모든 문무관직의 전주권을 오로지함으로써 그들이 정부의 주요직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명종 즉위 직후 참지정사가 되었던 정중부는 결국 문하시중에 오르고 李義旼도 수사공좌복야·판병부사가 되며, 杜景升은 문하시중에 오르는 등 재상들이 무신들 가운데 많이 배출되었다.

 다음으로 명종 16년(1186)에 장군 車若松 등 43인을 內侍院과 茶房에 겸 속시키고 있다.067)≪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6년 10월. 이러한 사실은 이제는 무신들이 중앙의 문반직 뿐만 아니 라 내시·다방의 近侍職까지도 겸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문반직인 지방관직에도 무인이 진출하였다. 명종 3년에는 3경·4도호부·8목의 관인 은 물론 군현 및 심지어 館驛之任까지도 무관이 병용되었다.068)≪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3년 10월. 이렇게 하여 무신란 이후에는 文武交差制가 시행되어 무신이 지방관에 파견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한때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충렬왕 원년 다시 복구되는 등 무신의 외직 임명이 일반화되었다.069)≪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選用守令. 따라서 대장군 洪仲方과 같은 무신은 무신들에 의한 문관직 독점을 중지하고 양반제의 정착을 주장하기도 하였다.070)≪高麗史≫권 100, 列傳 13, 洪仲方.

 이처럼 무신란 후에는 무신에 의한 문반직 겸유가 보편화되어 양반제도 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는데 심지어 文翰職까지도 무인이 겸하게 되었다. 원래 문한직은 문관 중에도 유학과 문장에 능통한 유신과 문사만이 등용되었다. 따라서 무신란 전에는 무반이 문직을 겸유하는 경우에도 절대로 문한직을 수여하지 않았는데 무신란 이후에는 무인으로서 儒官職을 겸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상장군 崔世輔는 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무인이었으나 명종 16년 史館의 同修國史가 되고 있다. 또 장군 崔連과 金富가 모두 예부시랑이 되어 이 때부터 무관으로 유관직을 겸하게 되었으며,071)≪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6년 12월. 그 후 무인 두경승은 判吏部事로 修國史를 겸하였다. 국사를 편찬하는 사관직이 문한직임은 말할 것도 없고 예부의 관직도 전형적인 유관직인데도 이제는 이들 유 관 문한직도 무인이 겸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과 서장관 등은 문관에 한하였는데 무 신란 이후 무인들이 보내지는 것이 일반화되고, 또한 수행하는 경우도 많아 졌다. 이는 유교적 지식이 뛰어난 자만이 임명되었던 자리에까지 무인들의 세력이 침투하였음을 알려준다.

 마지막 형태를 살펴보면, 당연한 경우 같지만 무관이 군직을 갖게 되었다. 무신란 전에는 姜邯贊이나 尹瓘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관이 양계병마사나 출정군의 군직을 겸하여 병마를 지휘하고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에는 무관이 이를 담당하였다. 이를테면 정중부는 명종 2년에 재상직과 더불어 북면병마판사와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의 군직을 가졌다. 그 후 고종 3년 및 4년의 거란 침공 때 고려 방어군의 편성을 보면, 병마사가 모두 무관으로 편성되어 있어 출정군 지휘부의 군직과 양계 병마사직이 무반에 의해 장악되었음을 알 수 있다.072)≪高麗史≫권 103, 列傳 16, 金就礪. 이는 원래 무반이 가져야 할 군사권이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무신란 이후에는 무반이 문관직을 겸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문반이 무반직을 겸하는 사례가 널리 나타났다.073) 邊太燮, 앞의 책, 327∼332쪽. 정권을 장악한 무반에 비해 열세한 지위가 되어버린 문반이지만 하나의 정권이 문·무 양반체제로 운영됨으로써 이들의 존재는 계속 유지되었다. 또 문반의 입장에서 볼 때 자체 세력유지를 위해서는 생존이 우선이었다. 도피와 은둔으로 화를 면한 문신들은 무신세력과 타협하여 벼슬을 하기도 하고 끝내 초야에 묻히기도 하여 새로운 질서체제에 적응하였다. 실제 무신정권은 자기 정권 강화를 위하여 문직을 담당할 문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으며, 따라서 舊文臣을 포섭 등용하고 신진문인을 활발히 등용하였다.

 이로써 문신세력은 무신정권에 부용된 위치에서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기 에 이르렀다. 무신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난 문신의 경우로, 예로부터 사람됨이 덕성이 있어 평소에 존경을 받아오던 자, 성격이 청렴하고 곧기 때문 에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오던 자, 언관으로서 그 직분을 다하여 直臣으로 알려진 자 등은 그 인간성이 훌륭하여 그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밖에 무신 또는 무신에 포섭된 문신과 사제관계 등 친분 또는 친인척관계에 있는 자, 관용 또는 의협심이 있는 무신에게 의탁한 자 등도 화를 면하였다.074) 閔丙河,≪高麗武臣政權硏究≫(成均館大出版部, 1990), 57∼62쪽.

 한편 무신정권은 살아남은 문반들을 문인으로서 필요한 전문직에 임용하였고 이들 문신들은 자기 보신책으로 무신정권에 결탁하기에 이르러 재상에 나아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무신정권하의 문신 가운데는 무직을 겸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무신란 전에는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문신이 극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반직을 가질 리 없었지만 이제 무신정권하에서는 무반의 지위가 우세하여졌으므로 문관 중에 무반직을 점유하는 예가 많아졌다.

 예를 들면 화를 면한 文克謙은 무신정권에 협력하여 명종 즉위후 右承宣·御史中丞을 거쳐 龍虎軍上將軍이 되고 다시 재상에 이르러 상장군을 겸하여 문관으로 무반직을 겸하는 시초가 되었다. 그 후 尹鱗瞻도 문신으로서 무직을 겸하게 되었다. 윤인첨은 등제한 문신으로 무신란 후 명종조에는 국자감 대사성의 儒官職을 가지고 재상에까지 올랐는데, 마침내 무직인 상장군을 겸하는 중방에 나아가 議事까지 하였다.075)≪高麗史≫권 96, 列傳 9, 尹鱗膽. 이와 같이 문극겸은 문재가 뛰어난 문관이었고, 윤인첨은 대사성을 역임한 유관이었는데, 상장군의 무직을 가지고 중방에서 參署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무신란 이전의 낡은 구조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문·무양반의 신분적 변화의 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신의 무반직 겸유는 그 후 고종 때 趙冲이 한림학사·승지로서 상장군이 되었고, 柳璥이 국자대사성을 역임하고 지주사가 되어 좌우위 상장군을 제수 받은 경우에서도 살필 수 있다. 이처럼 문신이 무반직을 겸하게 되는 현상은 무신정권이라는 전제조건 아래 문신들이 무반직을 선망하였고 아울러 무직의 겸유는 일신의 권세를 상징하는 직책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심있는 문신들은 무직을 겸함으로써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문반 중심의 새로운 질서체제를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무반직이 문반직보다 천대되었던 고려 전기에 비하여 무신정권 성립 후에는 무반관직은 그 지위가 상승하여 사회일반에서 우대되었다. 이러한 점은 충렬왕 때 제정된 納粟補官制에 있어서도 증명되고 있다.076)≪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納粟補官制. 이러한 무반직의 지위 상승은 문무반 사이의 차이를 없애고 양자의 상호교통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점은 문무반 관직의 겸유로 상호교통이 있게 되었지만 출신으로서의 문반·무반의 관계는 명확히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정치 상황에 따라 엄격한 문무반의 불변성은 이들간의 상호대립과 경쟁이 계속되는 요인이었다. 또한 양자간의 신분동요 및 사회변동의 내재적인 추진력이 되었다. 실제에 있어서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이라 하지만 문신세력을 억압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는 고려 전기 이래에 계승된 출신신분에 대한 문신 우위의 인식이 잔존하였음을 알려준다. 곧 그들은 무신 자신의 사회적 지위 상승의 실제를 문반직을 겸유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했고, 상대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문신의 세력확대를 억제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내재적인 대립관계는 무신정권하에서도 무신관료들이 갖는 신분적 한계를 나타낸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무신란 후에는 문무관직의 상호교통을 통하여 문 무반의 신분·문벌상의 차이가 없어졌다. 이는 무신란에 의해 신분이 낮은 무신들이 문반귀족에 대응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므로 양반간 신분질 서의 필연적인 변화 현상이었다. 신분과 문벌이 모든 사람의 정치적 권력과 경제력, 사회적 특권을 결정하는 주요조건이 되었던 것이 이제는 실력과 능력이 특권을 누리는 중요한 요건으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무신란 이후의 귀족세력은 그 이전의 귀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띠었다. 요컨대 무신란 이 전의 귀족은 오로지 문반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하여 무신란 이후에는 무반도 宰相之宗이 되기도 하였다.

 충선왕 하교에 있는 15개 재상지종 가운데 원종의 비 順敬太后의 가문은 金慶孫·金琿으로 이어지는 慶州 金氏로 무반가문이었으며, 金方慶·金忻 부 자 역시 무신이었다. 또 金就礪로 대표되는 彦陽 金氏는 무반가문으로 신진 재상지종이 되고 왕실의 외척까지 되고 있으며, 蔡松年의 平康 蔡氏와 趙仁規의 平壤 趙氏 또한 무반가문의 신진 재상지종이 되었다.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재상지종에 무반가문이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신란 이후의 양반 귀족사회의 변질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전히 문반계통의 재상지종이 강력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반의 지위 상승을 말해준다. 더욱이 이들 문반귀족 가문에서 무직을 겸하거나 무반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일반적으로 나타남을 통하여 문무반의 신분상 융합을 볼 수 있다.

 또 무신란 후에는 무반으로 공신호를 받은 자가 절대적으로 많아졌다. 崔竩를 주살한 공으로 衛社功臣이 된 사람 가운데 13명의 壁上功臣 중 12명이 무인이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인 문신 柳璥도 뒤에 상장군을 경유하였다.077)≪高麗史≫권 25, 世家 25, 원종 3년 10월. 이렇듯 무신란 후에는 공신호도 거의 무반이 독점하게 되어 그들 가문의 신분상승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따라서 무신란 후에는 무직이 비하되지 않고 무반으로서 귀족이 될 수 있었으므로 이제는 귀족가문의 자제도 음직으로 무반직을 받는 경우가 많이 나타났다.

 이에 문무반의 신분상의 차이가 없어지자 문반귀족 내의 폐쇄적인 연혼관계를 탈피하여 문무 양반간의 통혼이 행해지게 되었다. 먼저 무신란을 계기로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그들의 미천한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문신귀족 과 통혼하고자 하였다. 문무반 사이의 통혼은 이미 명종 3년에 문신들의 반기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신들에 의해 정책적으로 실시되었으며,078)≪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鄭仲夫. 이 에 의해 양반간의 신분상 융합이 더욱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출신이 미천한 무신들이 무신귀족으로 상승하여 무인정권 이후는 문무양반층이 상대적인 귀족층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신분 전통에 대한 관념은 극히 보수적이어서 비록 무신란을 계기로 새로운 신분질서체제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기존의 문벌가문의 권위는 끊임없이 잠재해 있어 신분의 우월성이 그대로 존속되었다. 따라서 무신란 후 정권을 장악한 무반의 지위가 실제적으로 상승된 점과 더불어 무인신분 에 대한 전통적인 멸시감이 병존하는 신분의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무신 란 이후 고려사회는 실질적으로 문무관 관직의 상호교통과 통혼, 그리고 무반귀족을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신분질서를 창출하는 변화를 보였다.079) 邊太燮, 앞의 책,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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