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1) 농민·천민봉기의 배경
  • (1) 중앙 통치체제의 문란

(1) 중앙 통치체제의 문란

 무신정권기에 발생했던 농민·천민의 봉기는 고려사회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순이 폭발되어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무신정권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무신집권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우선 무신정권이 성립하기 이전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인종대에 李資謙과 妙淸의 난이 발생하여 집권층 내부의 권력 다툼이 표면화됨으로써 중앙집권체제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은 인 종대 이래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시키기 위 해 이에 위배되는 여러 귀족들을 숙청하였으나, 문신 지배층의 압력과 그 자 신의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도리어 의종은 사치와 향락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수탈을 강화하였으므로 농민들의 유망이 더욱 늘어갔다.082) 의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설도 있으나(河炫綱,<高麗 毅宗代의 性格>,≪東方學志≫26, 1981) 그것은 지배층 내부에서 귀족과의 대립관계를 유리하게 이끌려고 했을 뿐 농민의 입장에서는 의종의 방탕과 이로 인한 수탈이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고 생각된다.
E. J. Schultz,<韓安仁의 立場과 그 役割>(≪歷史學報≫99·100, 1983), 174∼180쪽.
그리하여 의종 6년에 洪川,083)<李文著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402쪽. 9년에 全州,084)<林景軾墓誌>, 위의 책, 383쪽. 16년에는 伊川·安峽·東州·平康·永豊(平山)·宜州(德原)·谷州 등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났으며085)≪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6년 5월. 그 이후에도 남쪽에서 계속적으로 소요가 일어났다.086)<醴泉龍門寺重修碑>(≪朝鮮金石總覽≫上), 410쪽. 따라서 의종 24년(1170)에 일어난 무신란이 성공하게 된 원인은 무반 지위의 상승과 더불어 귀족사회의 수탈체제에 신음하던 피지배층의 광범위한 지지와 성원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일반 군인층, 농민들의 호응으로 성립하였음에도 피지배층을 위한 수취체제의 개편이나 지방관 수탈을 근절하기 위한 적절한 시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무신들의 목적은 문신을 대신해서 정권을 장악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李高·李義方·鄭仲夫 등 무신집정자들은 무신들의 회의기관인 重房을 중심으로 서로 권력 다툼을 벌여 높은 관직을 경쟁적으로 차지하고 토지겸병에 열중하였다.

① 처음에 의종이 私第 셋을 지어 館北宅·泉洞宅·藿井洞宅이라 이름짓고 재화를 거두어 모아 巨萬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仲夫·義方·高가 다 이를 나누어 가졌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鄭仲夫).

② 仲夫는 성질이 본래 貪鄙하여 재물 늘리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侍中이 되어서는 널리 田園을 확장하였으며, 家僮과 門客이 권세에 의탁하여 멋대로 방자하니 中外가 이를 괴롭게 여겼다(위와 같음).

 ③ 義方이 딸을 東宮에 바친 이래 더욱 威福을 제멋대로 하여 조정의 정치를 濁亂하게 하니 사람들이 분노하고 원망하였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李義方).

 사료 ①의 내용에서처럼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의종의 집과 재화를 빼앗아 나누어 가진 일이었다. 이후 정권은 이의방에서 정중부·慶大升·李義旼을 거쳐 崔忠獻에게로 옮겨졌는데 그 과정에서 무신들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죽이는 등 치열한 권력투쟁을 계속하였다. 즉 초기의 정치권력은 이고·이의방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우선 이의방은 명종 원년에 정권을 독점할 뜻을 품고 승려 및 惡小의 무리와 결합하여 난을 일으키려던 이고를 주살하고, 이어 함께 이고를 죽여 방자하여진 內侍 將軍 蔡元을 살해하였다.087)≪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李義方. 이고와 채원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이의방은 사료 ③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 국정을 함부로 하였다.이 때 정중부의 아들 鄭筠은 서북민의 항쟁으로 조정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이의방과 그의 측근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정중부 또한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자신의 일파를 재추의 요직에 앉히고 아들 균, 사위 宋有仁과 더불어 백성을 수탈하고 토지를 겸병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균은 무리하게 공주와 결혼하려 하였고, 송유인은 권신 文克謙과 韓文俊을 貶斥하는 등 물의를 일으켜 장군 경대승에 의해 모두 처형되었다.088)≪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鄭仲夫. 그러나 무신란과 관련없는 인물인 경대승의 대두는 무신란에 가담하여 출세한 무신들을 그의 적대세력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경대승은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都房을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는데, 정권을 장악한 지 4년 만에 병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 정권을 잡은 이의민 또한 동중서문하평장사·판병부사가 되고 공신 호를 받아 권세가 커지니 銓注를 함부로 하고 토지를 탈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다가 모두 최충헌 형 제에게 주륙되었다.

 이상과 같이 무신들의 정권 장악을 위한 내부 투쟁은 국가의 기강을 더욱 문란하게 하여 중앙의 통치체제는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신정권 초기에 상장군·대장군이 모여 국정의 전반을 논의하던 重房政治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중방에서 어떤 일을 명령하면 그 아래 將軍房에서 반대하고 장군방에서 명령하면 그 아래 郞將房에서 반대하여 서로 대립하는 형세에 이르렀다.089)≪高麗史≫권 101, 列傳 14, 宋詝. 지배층 내부 갈등의 표출과 무신권력자들의 부패 타락은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켜 지방관의 가렴주구를 감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했을 뿐 아니라 농민 봉기가 일어났을 때 정부가 효과 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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