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1) 농민·천민봉기의 배경
  • (2) 지방관의 탐학

(2) 지방관의 탐학

 전근대사회에서 지방관의 탐학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파탄이 농민봉기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를 틈타 지방관은 농민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시켰다. 지방관의 탐학은 이미 무신정권 이전부터 성행하여 백성들이 유망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니 다음의 예종과 인종대의 기록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① 지금 諸道州郡의 수령 가운데서 청렴하여 백성을 돌보아주는 자는 열에 한 둘도 없고 거의가 이익을 탐내고 공명에 팔려서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킨다. 뇌물을 좋아하고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침해하니, 유망이 연이어져서 열 집 가운데서 아홉 집이 비게 되어 짐은 매우 가슴 아프다(≪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즉위년 12월).

② 지금의 수령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利로 삼는 자가 많고 근면과 검소함으로 撫民하는 자가 적어 창고가 비고 백성들이 궁핍하다. 여기에 力役이 더해지니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어 일어나 함께 모여 도적이 되었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인종 6년 3월).

 예종대에 유민이 성행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인종대에는 유망민이 모여 도적이 되었는데, 그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수령의 탐학임을 위의 기사 는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무신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명종 2년(l172) 6월에 정부는 전국 53개의 속현에 監務를 파견하였다. 사실 감무의 파견은 주·군·현에 예속된 속군·속현민의 오랜 열망이었다. 고려시대의 지방 통치조직은 군현제도로서 주군·주현이 있고, 주군·주현에 예속된 속군·속현, 그 리고 그 아래에는 향·소·부곡이 있었다. 따라서 東京·尙州·晋州 등 대 읍은 조세부과 및 역역동원에 있어서 주읍의 吏들이 중앙에서 그들 군현에 부과시킨 부담 중에서 많은 부분을 속읍에 지웠다.090) 金潤坤,<羅·麗郡縣民 收取體制와 結負制度>(≪民族文化論叢≫9, 嶺南大, 1988). 이에 속읍민들은 주·군·현의 과다한 부담을 이기지 못하여 연이어 유망을 하게 되었으며 국가 는 이 사태를 수습하는 방편으로 감무제를 실시하였다. 즉 속읍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주읍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다음 예종의 조서는 감무를 파견하게 되었던 당시의 실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난번 西海道의 儒州(黃海道 信川)·安岳·長淵 등의 현에서 사람들이 유망한다는 해당기관의 보고를 받고 처음으로 監務官을 파견하여 안무시키기 시작했더니, 드디어 유민이 점차 돌아와서 산업이 날로 성하게 되었다. 지금 牛峰·兎山·積城·坡平·沙川·朔寧·安峽·僧嶺·洞陰·安州·永康·嘉禾·靑松·仁義·金城·堤州·保寧·餘尾·唐津·定安·萬頃·富閏·楊口·狼川 등 군현 사람들이 또한 점차 유망하고 있으니 마땅히 유주의 예에 의거하여 감무를 설치하여 招撫토록 하라(≪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원년 4월).

 위의 기록에 의거해 볼 때 명종대에 파견했던 감무도 主郡縣의 속군현민에 대한 침탈을 근절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신들의 지방관 파견은 백성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쿠데타에 참여했던 하급 무인들에 대한 논공행상과 무신정권을 확립하기 위한 지방통치권의 확보에 근본이 있었다. 그리하여 牧民官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무인들이 많이 임명됨으로써, 감무가 파견된 지역의 주민들은 주군현의 억압보다 감무의 수탈을 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신집정자들은 명종 3년 10월에는 3京·4都護·8牧으로부터 郡·縣·館·驛의 직임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인을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었다.091)≪高麗史節要≫권 12, 명종 3년 10월.

 요컨대 지방관의 탐학은 무신정권 이전에도 빈번하게 백성들의 원성의 대 상이 되었으나, 무신정권 이후에는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역량이 없으면서 재물에만 눈이 어두운 자들이 더욱 많아져서 농촌사회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무인 집권자 중에는 재물을 탐하여 벼슬을 파는 자까지 있어서, 이제 지방관의 탐학은 중앙의 권세가와 연결되어 자행되고 있었다. 이들의 농민수탈은 남도뿐 아니라 양계지방까지 확산되고 있었으니, 예컨대 鄭世猷는 아들의 관직 제수를 위하여 병마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재화를 거두어 중앙에 바쳤으며, 동북면병마사 曺元正은 재화뿐 아니라 머리카락까지 잘라 땋은 머리로 만들어 자기집으로 가져갔다. 이같은 불법적인 농민수탈 외에도 백성들은 가중되는 조세와 공역으로 고통은 날로 심해갔다.

① 문종 7년 6월에 三司가 아뢰기를,‘옛 제도에 稅米 1碩(섬)에 耗米(축난쌀)는 一升(되)을 거두게 하였습니다. 이제 12倉의 곡식을 京倉으로 輸納하는데 여러 차례 水陸을 지나쳐 오기 때문에 손실이 많아 수송자가 이를 변상하느라 고통이 심합니다. 청컨대 세미 一斛(10말)에 모미 7되로 增收케 하소서’하니 制하여 좋다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② 처음에 左右倉에서 쓰는 말(斗)을 재는 저울이 정확하지 않아 쌀 1섬을 바칠 때에 정액 이상으로 받는 것이 2말이나 되므로 지방 아전들이 이를 빙자하여 과중하게 거두어 오랫동안 민폐가 되어 왔었다. 이제 이를 바로잡고자 왕명으로 租 1섬에 耗米를 합하여 17말을 넘지 못하게 하였더니 민심이 흉흉하므로 이 때 이르러 制하여 본래대로 거두게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명종 6년 7월).

③ 명종 18년 3월에 制를 내리기를,‘여러 州府郡縣의 백성은 각각 貢役이 있는데, 요사이 지방관리들이 使令에게 시켜 공역의 값을 거두고 그 貢賦는 해당년도가 지나면 면제시켰다. 이에 따라 아전들도 모두 이 방법을 따르게 되어 역이 고르지 못하므로 貢役을 맡은 백성들이 정처없이 떠나가고 있다’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고려 초에는 농민들이 국가에 쌀 1섬의 조세를 바칠 때 耗米가 1되였는데 문종대에는 7되로, 그리고 무신정권 이후인 명종 6년에는 2말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가 1섬의 조세에 축난 쌀까지 합하여 17말 이상은 받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지방관과 아전이 극구 반대하여 다시 예전대로 모미를 2말 이상 받도록 허용하였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모미가 1되에서 2 말 이상으로 늘어난 것만으로도 부담이 되는데, 국가가 이조차도 제어하지 못하고 민심을 빙자하여 지방관 임의대로 모미를 거두어 들이기로 했으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정부가 백성들의 편의보다는 지방관·향리 등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서, 무신정권이 사소한 개혁조차도 시행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전보다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貢賦는, 이것을 수취하는 왕실·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수공업품·자연산물 등 현물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지만 이를 헌납하는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대개 貢役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위 사료 ③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교적 부강한 자는 지방의 관원이속과 결탁하여 미리 役價를 바치고 공역에서 면제되도록 하였으니, 이로 인해 貢戶의 부담이 고르지 않아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된 농민들이 견디지 못하고 유리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사료에 나타나지 않으나 요역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보여진다. 본래 공역 그 자체도 무거운 것이었지만 공부의 수취과정에서 불공평하게 자행된 관리의 폐단은 토지겸병 및 조세의 과중과 더불어 농민의 생산기반을 파괴하여 유랑민이나 도적이 되게 하였으며, 급기야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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