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3) 관성·부성·전주 등에서의 농민봉기

(3) 관성·부성·전주 등에서의 농민봉기

 서북민의 봉기를 제외하고 남쪽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던 반란은 石令史의 난이었다. 석령사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활동이 나타나지 않으나≪高麗史節要≫명종 5년(1175) 8월에 算業及第 彭之緖가 승선 宋智仁과 진사 秦公緖를 南賊 석령사와 더불어 난을 모의한다고 참소하여 大府少卿 李商老 등 많은 관리들이 이에 연루되어 해도로 귀양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그 해 11월에는 都校丞 金允升 등 7명의 문신이 유배되었다.144)≪高麗史節要≫권 12, 명종 5년 8월·11월. 석령사가 어디에서 왜 난을 일으켰으며, 항쟁의 성격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3개월 이상 지속되었으며 난의 성격이 중앙관리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145) 金塘澤은 石令史의 令史는 이름이 아니라, 지방관청에 소속된 品官 이하의 관직으로 보았다(<高麗 武人政權初期 民亂의 性格>,≪國史館論叢≫20, 1990).

 명학소민의 2차 봉기가 일어날 무렵인 명종 7년 2월에는 全羅州道 按察使가 彌勒山賊이 항복했다고 중앙에 알려왔다.146)≪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7년 2월 정축. 미륵산은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산으로서 이들이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봉기했던 원인에 대해 시사를 주는 내용은 없지만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집단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좌도병마사가 賊의 우두머리 李光 등 1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147)≪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7년 3월 무오. 지리적 위치와 시기로 볼 때 이들이 망이 등 명학소민과 일정한 연결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그 구체적인 실상은 알 수가 없다.

 이후 서북민의 항쟁이 끝난 지 3년 후인 명종 12년 2월에 富城(충북 옥 천)·管城(충남 서산)에서 다시 농민들이 일어났다.

① 관성현령 洪彦이 백성을 괴롭히고 음탕하고 거칠기가 한이 없었으므로 향리와 백성들이 彦이 사랑하는 기생 및 기생의 어미와 형제를 죽이고 드디어 언을 잡아 가두었다. 有司가 接問하여 주모자 5∼6명을 귀양보내고 언도 또한 종신 禁錮에 처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2년 2월)

② 또 부성현령은 縣尉와 사이가 나빠서 해가 죄없는 백성에까지 미치니, 전체 현민들이 그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드디어 현위의 관리와 노비까지 죽이고 현령과 현위의 아문을 폐쇄하여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위와 같음).

 사료 ①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관성민이 일어났던 원인은 현령의 탐학과 기생과의 향락만을 일삼는 파렴치한 작태에 대한 분노였으며, 부성은 현령과 현위의 주도권 쟁탈전이 경쟁적으로 수탈을 야기시켜 농민을 이중으로 괴롭혔으므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주민에 의한 탐오한 관리의 구금은 가장 온건한 형태의 저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悖逆」이라는 죄목으로 이들을 단죄하여 이후부터는 두 현 모두 지방관을 설치하지 않고 현을 폐쇄시키는 강력한 징계를 가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전주에서 旗頭인 竹同이 농민·군인·관노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봉기를 일으킨 원인을 살펴보자.

① 애초에 全州司錄 陳大有가 자못 청렴 고결함을 자부하고 형벌을 극히 가혹하게 쓰니 백성 중에 괴롭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국가에서 精勇·保勝軍을 보내어 관선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대유가 上戶長 李澤民 등과 더불어 역사를 감독하면서 몹시 까다롭게 굴었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2년 3월 경인).

② 旗頭인 竹同 등 6명이 난을 일으켜 관노와 불평을 품은 무리들을 불러 모아 드디어 大有를 山寺로 쫓아버리고 澤民의 집 등 10여 채를 불태우니 아전들이 모두 달아나 숨었다. 이에 판관 高孝升을 협박하여 고을의 아전을 바꾸어 임명하도록 하니, 효승은 다만 직첩만 수여할 따름이었다(위와 같음).

 사료 ①에서 전주민이 봉기한 원인을 살펴보면, 사록 진대유가 형벌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하여 주민들의 원성이 높았는데, 관선을 제작할 때 혹독한 사역으로 이들의 불만을 더욱 자극시키게 되니 기두인 죽동을 중심으로 피지배층이 합세하여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하였다. 진대유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 위의 사료 외에는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다. 아마 그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독려하더라도 국가에서 요구한 조선사업을 기일 내에 완수함으로써 이것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원래 사록은 과거 급제자가 최초로 임명되는 지방관이므로 진대유로서는 전주사록으로서의 능력인정 여부가 승진의 디딤돌이었다. 따라서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중앙에서 지시한 사항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록의 직책은 전주와 같은 큰 고을에서는 목사·판관의 아래에서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서기의 업무를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관 중 그 지역의 향리나 백성들과 직접적인 접촉이 가장 빈번한 자리였다.148) 金晧東,<高麗武臣政權時代 地方統治의 一斷面>(≪嶠南史學≫3, 1987). 사록 위에 판관이나 목사가 있음에도 반민들이 일제히 진대유를 겨냥한 것은 그가 일반 주민과 가장 빈번하게 접촉을 하면서 혹독하게 굴었던 까닭이었다.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 전라도는 농토가 풍부하고 기름진 천혜의 곡창지대였다. 그러므로 이곳은 권세가들에 의한 토지겸병이 강화되었으리라 생각되는데, 토지 소유관계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대토지소유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후대의 사료이나≪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墾田結數가 비슷한 경상도에 비해 인구가 적어 1인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는 상당히 넓었다.149) 李鎬澈,<토지파악방식과 田結>(≪朝鮮前期 農業經濟史≫, 한길사, 1986), 278쪽. 어떻든 정부나 지방관의 입장에서는 경작되는 토지가 많은 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탈할 여지가 많은 곳으로 여겨졌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전주는 전국에서 토지의 비옥도가 높아 논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150)≪世宗實錄地理志≫권 151, 全羅道 全州府 참조. 이에 따라 생산량이 풍부한 이곳은 지방관이나 토지겸병에 주력하는 권세가들의 치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전주민의 또 하나의 고통은 역역이었다. 일찍이 全州牧 古阜郡의 속현인 扶寧縣의 邊山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또한 그 질이 우수하여 궁궐 혹은 사원의 건축과 관선 제작에 이용되었다. 이들 나무를 베어 개경으로 보내거나 배를 만드는 일은 주로 농한기를 틈탄 농민들의 노동력을 징발할 수밖에 없었는데, 추운 겨울에 산속에서 지내야 하는 주민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하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에서는 농사철인 3월이 되면 농민의 생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기 위하여 부역을 중단하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종 3년(1200) 3월에 李奎報가 保安縣에서 벌목을 독려하던 글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151) 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0, 古律詩 三月又到保安縣江上課木. 농사철에 농민들에게 부역을 강행한 사례도 없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농사철의 부역 강행은 농민들로 볼 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규보가 혹독한 관리로 평판이 좋지 못해 파직을 당했던 것은 농삿일에 지장을 초래하면서까지 중앙정부에서 시킨 일을 무리하게 추진했던 데에서 생겨난 파문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152) 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7, 與某書記書. 竹同 등 전주민의 봉기도 3월이 되어서까지 관선 건조를 강행시켜 농삿일에 지장을 초래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판단된다. 농민들은 가혹한 지방관과 州吏의 사역을 견디지 못하여 천민·관노들과 함께 봉기하게 된 것이었다.

 앞서 내용에서 旗頭인 죽동 등 6명은 관노·불평을 품은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반란의 주모자인 죽동에 관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은 그가 기두라는 것과, 전주에서 난을 일으켰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이로써 그가 국가에 의해 요역에 징발당한 주현군이었으며, 농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관노는 이같은 요역이 없을 때에도 인신적 수탈을 가장 많이 당하는 존재임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불평을 품은 무리는 保勝·精勇軍이 아닌 一品軍이나 농민·천민 그리고 승도 등이었으리라 보여진다.

 그리하여 그들은 힘을 합하여 난을 일으켜 사록을 산사로 내쫓고 향리들의 집을 불태웠다. 그들의 행위는 중앙정부에 대항해서 일어선 반란이라기보다는 오직 지방관과 향리의 가혹한 사역에 분노한 전주민의 시위에 불과하였으므로, 그들은 전주사록을 내쫓고 주리를 교체하면 부당한 사역과 억압이 중단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주민들은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를 방문한 안찰사에게 그들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여 부당한 폐해를 제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안찰사 朴惟甫는 전주지역의 소요를 무마시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전주사록 진대유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리고는 난민들에게 그들을 가혹하게 침탈했던 진대유가 문책을 받은 만큼 난을 포기해야 한다고 종용하였다.153)≪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2년 3월 경인. 이것은 전주민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안찰사가 대유의 失政을 깊이 인식하고 그가 시행했던 가혹한 부역이나 그 밖의 농민들을 수탈하는 제반 억압 요소들을 제거해 줄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안찰사는 아무런 개혁을 시행하지도, 시행할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조건 해산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위협만을 가하였다. 전주민이 이를 따르지 않자 안찰사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도내의 군대를 징발하여 이들을 강제로 진압하려 하였다. 이에 놀란 전주민은 성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닫고 끝까지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제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전주민과 안찰사가 직접 대립하게 되었고, 중앙정부의 개입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죽동 등 전주민의 봉기는 반란을 일으킨 주도층이 전라도 전체의 농민·천민들의 호응을 얻을 만한 적합한 명분을 내걸지 못하여 이 봉기를 전주목에 한정시킴으로써 전라도 전체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전주 지방관과 향리의 탐학과 수탈을 거부했을 뿐, 지방관과 토호의 비리가 고려사회 전체의 모순의 결과임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세는 강경하여 끝까지 전주성을 사수함에 따라 시일이 지체되어 이 사실이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은 중앙정부가 전주민의 봉기에 대해 대처한 내용이다.

① 합문지후 裵公淑, 낭장 劉永 등을 보내어서 죽동 등이 반역한 이유를 물어보게 하였다. 공숙 등이 성에 들어가서 1품군 隊正을 회유하여 역적의 괴수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계획이 성사되려 할 때에 참소를 입어 파면되고, 낭장 任龍臂와 金臣穎이 대신 임명되었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2년 4월 무신).

② 안찰사가 보낸 병사가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한 지 40여 일이 지났다. 1품군 隊正이 승도와 더불어 죽동 등 10여 명을 죽이니 적이 평정되었다(위와 같음).

③ 龍臂, 臣穎 등이 도착해서 남은 무리 30여 명을 찾아내어 죽인 후, 城塹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2년 4월 기사).

 개경정부는 합문지후 배공숙 등을 보내어 전주민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물어보게 하였는데, 여기에 전주민이 크게 기대를 건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국왕의 사자로서 주민들의 불만을 해소시켜 주려고 왔다고 하니 아무런 의심없이 성안으로 맞아들여 내부분쟁이 일어날 여지를 제공하였다. 즉 정부측에서 보낸 장수 배공숙이 마음대로 성을 드나들었고, 전주성을 지키던 1품군을 회유하여 정부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반민들은 국왕을 믿고 고려 정부와는 끝까지 대항할 의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료 ②에서 배공숙이 1품군 대정을 설유했다는 기사는 전주민의 봉기에 보승·정용군 등 피지배층뿐만 아니라 향리층도 상당수가 합세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대정은 副戶正이나 副兵正·副倉正級의 지방향리로서 이들은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있는 지방토호층이었다. 따라서 대정은 1품군을 통솔하는 계층으로서, 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중앙으로의 진출도 가능한, 농민들과 반대 입장을 지닐 가능성이 많은 계층이기도 하였다. 지방관에 의해 배를 만드는 요역에 동원되거나 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을 때는 주민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그들도 똑같이 고통을 받아 죽동 등 전주민의 봉기에 함께 가담하였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끝까지 싸우려는 의사가 없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반민들도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만큼 농사철에 성 안에서 농성하는 사실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내부적으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배공숙은 이를 파악하고 내부 교란을 선동하여 반민 주동자를 처단하면 쉽게 무너질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배공숙 등이 참소에 의해 파면됨으로써 이 계획은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참소를 당한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중앙에서는 난을 진압하는 데는 문신보다 무신이 나을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즉 정부는 이들을 달래어 일시적이나마 그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난을 포기하게 하려는 계획을 그만두고 강경책으로 선회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문신 대신 무신을 보내어 반민들을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주에 왔을 때 이미 대정·승도들에 의해 지도층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봉기는 끝난 상태였다. 대정 등은 비록 배공숙이 없다고 하더라도 죽동 등 반민 지도부를 암살하면 정부의 포상을 받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전주민의 봉기는 약 두 달간 계속되었지만 그 지도부가 암살당함으로써 쉽게 와해되고 말았다. 배공숙·유영에 대신해서 새로 임명된 임용비, 김신영은 뒤늦게 전주에 도착하여 전주민 중 반란에 가담했던 사람들 30여 명을 색출하여 죽이고 城塹을 파괴하여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조처를 강구하였다. 이제 전주민은 정부에 대하여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고 국가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들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난세를 맞이하여 그들의 소망을 풀어줄 구원자의 출현에 매달리게 되었다. 원래 전라도 지역은 금산사를 중심으로 彌勒信仰이 유행하던 곳이었는데, 정토신앙을 내세워 민심을 끌어들이려고 한 경우도 보이고 있다. 무신집권기에 전주지방에서 혹세무민하는 인물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이곳 주민들의 현실적인 불만이 종교에 더욱 매달리게 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기록을 보자.

全羅州道 안찰사 吳敦信이 아뢰기를,‘승려 日嚴이란 자가 전주에 있으면서, 눈 먼 사람을 다시 눈뜨게 하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하므로 왕이 內侍 琴克儀를 보내어 이를 맞아오게 하였다. …또 弘法寺로 옮겨 거처하니 남녀가 다투어 머리를 풀어 펼쳐서 日嚴이 밟고 지나가게 하였으며, 일엄이 그들에게 아미타불을 부르게 하니 그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다. 그가 손씻고 입씻고 목욕한 물까지도 이 물을 얻는다면 비록 한 방울일지라도 千金과 같이 귀하게 여겨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法水」라고 일컬어 온갖 병을 능히 치료한다고 하였다. 남녀가 밤낮으로 함께 거처하여 추한 소문이 널리 퍼졌으며, 혹은 머리를 깎고 그 무리가 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7년 9월).

 전주의 승려 日嚴은 농민들의 여망에 편성하여 만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사칭한 것으로 보인다.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하여 죽은 후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으로, 현실사회의 괴로운 상황에 처하여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는 나약하고 죄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종교였다. 이 정토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와 고려에까지 전승되어 왔는데 미륵신앙과 더불어 서민대중의 불안을 달래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일엄은 자신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자처하고 믿음을 가지고 아미타불을 부르면 죽은 후 극락에 왕생할 뿐 아니라 만병이 다 낫게 된다고 하여 주민들을 현혹하여, 어사대부 임민비나 평장사 문극겸 같은 정부 관리들과 국왕까지 혹하였다고 한다. 이는 후삼국시대의 궁예나 우왕대의 이금이 미륵불로 사칭하여 민심을 끌어들인 것과 비교된다.154)≪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
≪高麗史節要≫권 31, 신우 8년 5월.
즉 현실에 불만은 많으나 힘이 없는 농민들은 절대자에 무조건 의지하거나 아니면 빨리 죽어 극락왕생을 기원한 데서 이같은 신앙이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전주민의 봉기는 난을 일으킨 지 불과 두 달만에 내부의 배반자에 의해 봉기의 주도세력이 암살당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정부는 전주민이 다시는 난을 일으키지 못하도륵 가혹하게 처단하였을 뿐, 이들을 위한 위무책은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현실에 절망감을 느낀 농민들은 정신적으로 그들을 구원해 줄 신앙에 매달리게 되었으니, 이에 따라 고려 후기 전라도 지역에는 다양한 종교가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전라도에서는 고종 초에 거란족이 침입하여 중앙집권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서 전주 군인들이 다시 난을 일으켰으며, 이어 고종 7년(1220)에는 南原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그리고 몽고가 고려의 전 국토를 유린했던 고종 24년(1237)에는 李延年 등이 原栗·潭陽郡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키는 등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한 농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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