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3) 무신정권 확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1) 만적의 난

(1) 만적의 난

 이의민 세력을 제거하고 새롭게 등장한 인물은 崔忠獻·崔忠粹 형제였다. 최충헌은 쿠데타에 성공한 후 그의 정치세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동생 최충수마저 제거하였으며, 명종을 폐위시키고 신종을 옹립하였다. 그는 국왕에게 封事 10條를 올려 고려사회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지적함으로써 앞서의 집정자와의 차별성을 나타내었으니,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83)≪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제1조 국왕은 화재로 인하여 다시 지은 옛 궁궐로 옮길 것. 제2조 우리 나라 관제는 祿의 수량으로 계산된 것이다. 정원 이상의 관리를 줄일 것. 제3조 관직에 있는 자가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公田·私田을 모두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한 집의 비옥한 토지가 州·郡에 차고 넘치게 되어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고 軍費는 부족해졌다. 해당 기관을 단속하여 공문서를 검토하고 무릇 빼앗은 것들은 모두 본주인에게 돌릴 것. 제4조 아전들이 불량하여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걸핏하면 백성들을 침해하며, 또 권세있는 집안의 하인들은 田租를 다투어 징수한다. 능력있는 사람을 지방관으로 보충하여 백성들의 산업이 파괴되지 않도록 할 것. 제5조 여러 도에 나가 있는 사신들의 供進을 금할 것. 제6조 승려들의 궁궐 출입과 사원의 利息을 금지할 것. 제7조 군현 아전들의 탐욕을 按察使가 막지 못하고 있다. 안찰사로 하여금 아전의 잘잘못을 가리도록 할 것. 제8조 사치를 금지할 것. 제9조 비보사찰 이외의 사원은 모두 없애버릴 것. 제10조 臺省 책임자를 가려서 임명할 것.

 최충헌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직후에, 국왕에게 올린 건의서는 앞으로 그가 통치하고자 하는 방향을 제시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조는 그가 건의서를 올린 지 불과 석 달 이내에 국왕이 궁궐을 延慶宮으로 옮김으로써 그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2조와 10조는 관리의 수를 줄이며 적임자를 가려서 임용하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중앙의 관리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최충헌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도록 만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적임자란 어차피 주관적인 성격이 가미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관직을 그대로 지닐 수 없었음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최충헌의 봉사10조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이 지방관의 탐학과 대토지소유의 금지이다. 3·4·5·7조는 아전이나 권세가의 백성 침탈을 안찰사로 하여금 방지하도록 하라는 내용인데, 이미 그가 정권을 장악할 무렵에는 권세가는 州·郡을 경계로 삼을 정도로 대토지겸병이 유행하여 빈부의 차이가 심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위의 내용만으로는 그가 대토지소유를 반대한 인물로 이해하기 쉬우나, 그 자신이 후일 대토지겸병을 강행하여 진주와 전라도의 일부를 농장화한 것으로 보아 그가 농민편에 서서 개혁을 요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의 봉사 10조보다 10년 전인 명종 18년(1188) 3월에 내린 국왕의 조서 또한 최충헌의 봉사와 마찬가지로 수령의 탐학을 금지하거나 대토지겸병을 방지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최충헌은 그 이전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어온 대토지겸병을 방지하기 위한 시책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농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해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알고 이같은 건의를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국 고려왕조는 대토지소유자인 권세가의 기반 위에 서 있는 나라임에도 이것을 방지해야 하는 모순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의 최충헌 정권기에 최초로 항쟁을 일으킨 사람은 私奴 萬積이었다.184) 만적의 난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조된다.
邊太燮,<萬積亂 發生의 社會的 素地>(≪史學硏究≫4, 1959;≪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洪承基,<武人執權時代의 奴婢叛亂>(≪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그 과정을 살펴보자.

사동 萬積·味助伊·延福·小三·孝三 등 6명이 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예를 불러모아 모의하기를, ‘나라에서는 庚寅·癸巳年 이후로 높은 벼슬이 천한 노예에게서 많이 나왔다. 公卿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으랴. 시기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만 어찌 육체를 괴롭히면서 채찍 밑에서 곤욕을 당할 수 있겠는가’하니, 여러 노예들이 그렇게 여기었다. 이에 누른 빛깔의 종이 수천장을 오려서 丁字를 만들어 표식으로 삼고 약속하기를, ‘갑인일에 興國寺에 모여 일제히 북을 치고 소리지르며 毬庭으로 몰려가 난을 일으켜, 안과 밖에서 서로 호응하여 최충헌 등을 먼저 죽이고, 나아가 각기 그 주인을 쳐서 죽여 賤人의 文籍을 불살라 삼한에 천인을 없애 버리면, 공경 장상을 모두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高麗史節要≫권 14, 신종 원년 5월).

 천민 중에서도 제일 미천한 신분인 노예만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우리 나라 역사에서 처음 발생했던 사건으로서, 그들은 중세사회의 가장 큰 존립 기반인 신분제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그들이 궐기한 목적은 최충헌 등 노비의 소유주를 죽이고 노비문서를 소각하여 삼한에 천인을 없앰으로써 노예해방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각기 주인을 죽여서 예속적인 신분관계를 벗어난 이후에는 자신들이 공경 장상을 독점하겠다는 정권 장악의 의도까지 드러내고 있다. 만적의 연설 내용으로 보건대, 이 난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 모의하여 계획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에 호응하여 모인 노예 수가 황지 수천 장을 발행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대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한 노복의 배반으로 미수에 그치고 주모자 100여 명이 강물에 수장당하는 것으로 난은 종결되었지만, 전형적인 노예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정권 장악의 목표로까지 연결된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적의 난은 실패했으나, 노비들의 신분해방운동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져 다시 개경에서 家僮들의 習戰事件이 일어났다. 즉 신종 6년(1203) 4월에 여러 가동들이 나무와 풀을 베다가 개경 동쪽 교외에서 隊를 나누어 전투연습 하는 것을 최충헌이 사람을 시켜 체포하게 하였는데, 모두 도망가고 다만 50여 명만을 잡아 강에 던졌다고 한다. 이는 만적의 난 이후에 불문에 붙여졌던 남은 무리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신분해방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만적의 난이 실패한 이후에도 천민들의 반란은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지방에서 노예와 부곡민이 같이 수탈을 당하는 계층으로서 처지가 비슷한 농민과 연합하여 봉기하는 경우도 생겨났으니, 그 대표적인 사건이 晋州民의 항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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