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3) 무신정권 확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2) 진주민의 항쟁

(2) 진주민의 항쟁

 만적의 난 이후에 경주와 진주에서 대규모의 봉기가 발생하였다. 우선 진주에서의 소요를 살펴보자. 진주지역에서의 항쟁은 만적의 난에 이어 공사 노예들이 주축이 되어 州吏들의 강압적인 수탈에 저항하여 봉기한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진주는 농업생산량이 풍부한 지역으로서 재지토호의 세력이 강하였다. 최충헌은 정권을 장악한 후 그의 外鄕인 柳氏가 살고 있던 이곳을185)<崔忠獻墓誌>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晋康國大夫人 柳氏로서 金紫光祿大夫·中書令上將軍인 柳挻先의 딸이다(≪朝鮮金石總覽≫上, 亞細亞文化社, 1976, 441쪽). 자신의 직속령으로 만들어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다.

 최충헌이 진주 지역의 토지를 장악하여 이를 국왕에 의해 합법적인 식읍으로 인정받아 자손대대로 세습했음은≪고려사≫최충헌전의 내용에서 잘 알 수 있다. 최충헌은 집권 후 晋州 柳氏 즉 그의 외가와 지방관을 통해 토지겸병을 강행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가 어떤 형태로 토지를 넓혀 갔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중앙권력층과 연계가 없는 진주토호와 일반 농민들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토지 소유관계를 둘러싸고 진주가 내분에 휩싸이고 있을 때 먼저 반기를 든 계층이 공사노예였다. 진주 내부의 갈등은 농민에게는 이중의 수탈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그 중에서 가장 핍박받는 계층인 노예들은 신분해방의 각성과 더불어 주리의 횡포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 드디어 봉기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봉기는 중앙권력층과 지방토호를 함께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일차적인 공격대상은 중앙권력층의 비호를 받는 향리들이었다.

 진주지방의 소요는 신종대에 처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의 최성기로 불리어지는 문종대에 이미 1만 3천호라는 대규모의 유민이 발생했으며186)≪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원년 10월 경신. 인종대에는 南界에 해적이 횡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187)≪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6년 4월 정사. 이들의 대다수는 농민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전쟁이나 내란이 발생하지 않았고 또 뚜렷한 재해가 없으면서 이렇게 많은 인구가 토지에서 유리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고려 전기부터 지배층의 토지겸병과 지방관의 수탈에 백성들이 소극적이나마 저항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지배층의 토지겸병은 고려 중기 이후 농업생산량의 증가와 더불어 점차 성행하였고, 이에 따라 지방관의 수탈도 가속화되어 갔는데, 이는 무신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심해지는 형편이었다. 다음 내용은 지방관의 탐학을 서술한 구체적인 예이다.

① 晋州守 金光允과 安東守 李光實이 욕심이 많아 가혹하게 재물을 긁어모았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반역을 도모하니, 有司가 뇌물받은 죄로 논하여 함께 그들을 귀양보내었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6년 7월 정유).

② 中書省에서 탄핵하여 아뢰기를,‘慶尙州道 按察使 崔嚴威가 吏民을 가혹하게 조사하여 함부로 빼앗고, 뇌물을 받는 것이 염치가 없습니다’고 하였으므로 명하여 郎將 朴冲으로 대신하게 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7년 6월 병신).

 사료 ①은 진주와 안동 백성들이 지방관의 탐학을 견디지 못하여 반란을 모의한 내용이다. 이미 진주는 공사노예가 일어나기 10여 년 전에도 농민봉기의 조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국가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지방관만 귀양을 보내었으니, 농민을 수탈한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료 ②에서는 지방관이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吏, 즉 향리나 토호들에게도 뇌물을 거두어들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지배층 중심의 수탈체제를 개혁하지 않는 한 지방관을 바꾸더라도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지배층인 중앙권력층과, 그들과 제휴한 지방관에 대한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여기에 최충헌이 자신의 경제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지방관을 앞세워 토지겸병과 인신수탈을 자행하니, 이제 진주지역의 봉기는 누가 언제 무엇을 계기로 폭발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지, 일어나리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 될 정도로 분위기가 악화되어 있었다.

 진주지역의 항쟁은 진주의 공사노예가 떼를 지어 모여서 주리를 죽이고 그들의 집 50여 호를 불태우면서 시작되었다.188)≪高麗史節要≫권 14, 명종 3년 4월. 특히 최충헌 집권 때에 吉仁·萬積·密城官奴·開京家僮 등 노예들의 항쟁이 빈번했는데 이는 앞서 무신집정자와는 달리 신분제를 고착화시키려는 그의 정치성향에 연유한 바가 큰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만적에게서 나타났듯이 그들이 노예가 되어 시달림을 받는 이유가 지배층이 임의로 정한 사회체제의 모순 때문이며, 따라서 부당한 그 체제는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주의 노예들은 주리를 죽이고 그들의 집은 불태울 수 있었으나 군대가 상존하는 관아를 습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같은 결정적인 약점으로 인해 노예들은 관아의 추적을 받으면 뿔뿔이 홑어져 버렸고 난은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사노예의 봉기를 계기로 지방관, 주리와 토호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봉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처음 진주는 노예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주리에 대한 반감으로 봉기하였으나, 나중에는 도리어 노예를 토벌한 주리의 반동적인 반란으로 바뀌었다. 즉 노예들이 주리들의 집에 불을 질렀을 때 倉正 鄭方義의 집도 같이 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진주태수가 난에 연루시켜 정방의를 가두자, 오히려 동생 昌大가 정방의를 구출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켜 태수와 사록을 내쫓고 진주를 장악하였던 것이다.189)≪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鄭方義. 그는 이 과정에서 그에 반대하는 사람 6,400명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당시 진주의 토성은 姜氏·河氏·鄭氏이며, 來姓으로 柳氏가 있었다. 이 때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정씨와 대치되는 세력인 강·하씨 등의 토호와 그 휘하의 노복, 그리고 그들의 토지를 경작하는 전호 등 많은 무고한 농민들이 살해되었을 것이다.≪慶尙道地理志≫와≪世宗實錄地理志≫를 참조해서 추정하면 당시 진주의 인구수는 대략 12,000명 정도이고 진주목 소속의 군현까지 합해야 3만 명 정도였기 때문이다.190) 李貞信,<晋州民의 抗爭>(≪高麗武臣政權期 農民·賤民 抗爭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1), 255쪽<表 3>참조. 그러나 중앙의 세력이 두려워 유씨는 온존시켰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 점은 그가 주도권을 장악한 후 최충헌과의 연계를 도모하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진주목 관내는 공포분위기가 엄습하여 아무도 감히 정방의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며, 진주는 완전히 정방의의 세력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진주를 장악한 정방의는 중앙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토벌할까 두려워하며 중앙의 권력자에게 바칠 뇌물을 모았다. 여기에서 정방의는 중앙의 권력자에제 진주의 점령이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이 아님을 강조하고 만일 자신에게 진주의 주도권을 인정해 준다면 앞서 봉기를 감행했던 공사노예들을 소탕하고 진주지역에 대한 최충헌의 토지사유화를 더욱 촉진시키겠다는 약속을 한 것 같다. 최충헌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의 입장으로는 정권을 장악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않아 야기된 사건이므로 우선은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중앙 통치체제가 문란해짐에 따라 지방세력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를 억누르는 전형적인 예로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중앙 권력층의 대토지소유에 불만을 품고 대치하던 지방 토호의 성격과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었다. 진주민을 살육하고 중앙의 권세가에게 환심을 사려는 정방의의 태도에 분노와 배반감을 느낀 농민들은 노예들과 더불어 정방의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웃 陜州의 奴兀部曲民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합주에는 이미 정방의가 진주에서 실권을 잡기 이전부터 반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언제 어떤 연유로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제 합주민과 진주민이 힘을 합쳐 정방의를 공격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이 때 陝州에 光明計勃이라는 적이 있었는데 역시 세력을 부리어 그 지방의 큰 해가 되었다. 方義와 원수가 된 진주사람 20여 명이 협주의 적에게 가서 투항하고 군사를 청하여 그를 치고자 하니 적이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방의가 출격하여 그들을 쫓아버린 후 이긴 기세를 타서 奴兀部曲에 이르러 그 무리들을 다 죽였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鄭方義).

 합주의 노올부곡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난 점으로 보아 아마 그들은 군현으로의 승격, 즉 신분해방이 중요한 요망사항이었을 것이다. 합주에서는 부곡민 외에도 이 봉기에 가담했던 사람 중 유민들도 상당히 많았으리라고 생각되는데 다음 사료에서 어느 정도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東南海安撫使 鄭應文이 보고하기를, ‘溟珍·松邊·鵝洲(모두 거제도에 있음:인용자 주) 3현의 해적 佐成 등 820명이 투속하였으므로 이미 陜州 三岐縣(三嘉)에 歸厚·就安의 場을 두고 晋州 宜寧縣에 和順場을 두어 거처하게 하였습니다’하니 群臣들이 하례하였다(≪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6년 10월 임자).

 위의 내용으로 이미 인종대에 거제도를 거점으로 해적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거제도에 소속되어 있는 명진·송변·아주는 고려 말기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주민들이 모두 없어졌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복구되었다고 한다.≪경상도지리지≫에서 巨濟縣의 인구수를 보면 호구는 123호이고, 남자는 423명, 여자는 522명이었다. 위의 사료에서 거제현의 해적 820명이 투속하였다고 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거제현에 살고 있던 일반 주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인종대에 왜구의 침입에 관한 사료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농경이나 어업에 종사하거나 아니면 뱃길을 이용한 해상무역에 종사했으리라 생각되는데 지방관의 탐학, 흉년, 풍랑 등으로 생계를 잇기가 곤란해지자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불가항력으로 도적이 된 그들로서는 국가에서 토지를 분배하고 경작권을 보호해 준다고 선무하자 즉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그들을 정착시킨 지역이 합주의 삼기현과 진주의 의령현이었다. 그러나 이주한 지역에도 자신이 소유한 토지가 없는 그들로서는 거제현에서 살던 때와 마찬가지로 생계가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12세기 이후 농업생산량의 증가에 따라, 권력가의 대토지소유와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은 무신정권 이후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더욱 극심하게 전개되었다. 이때 합주 노올부곡에서 光明計勃이 봉기하자 이주민들은 여기에 적극 호응하여 합류하지 않았나 보여진다.

 따라서 합주 광명계발의 난은 전호와 부곡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부곡민이나 전호가 신분은 다를지 모르나 수탈로 인한 생활 조건은 비슷했으므로 함께 봉기하게 된 것이다. 특히 부곡민은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로 인해 한때나마 신분이 양인으로 승격되거나 여러 부곡이 군현으로 승격되는 것에 고무되어 그들도 양인이 되기 위해 봉기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 점은 그 주모자의 이름이 새로운 밝음을 갈구하는「光明」이라는 사실에서 추정된다. 또는 미륵신앙처럼 새 세상을 기대하는 종교성이 내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한 사실은 잘 알 수가 없다.191) 旗田巍는 陜州 반란의 주모자인 光明計勃은 그 명칭으로 보아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으며(<高麗の武人と地方勢力―李義旼と慶州>,≪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李丙燾는 그 이름의 특이함에 비추어 외국인 포로로 추측하였다(≪韓國史―中世篇―≫, 乙酉文化社, 1961, 496쪽).

 앞의 사료에 의하면 진주민이 합주로 가서 함께 정방의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자 합주의 반민들은 즉시 승낙하였다고 한다. 중앙의 후원을 받는 강력한 정방의의 세력에 맞서서 싸워야 하는 것이 그들로 볼 때는 부담스럽고 패배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진주민이 그들처럼 수탈당하는 피지배층이라는 공감대 외에도, 진주지역민 속에는 합주·진주로 분산하여 거주시켰던 거제현의 옛주민들이 있어서 무신정권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미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인 정방의를 타도한다면, 반란영역이 확대되어 중앙정부에 대해 그들의 요망사항을 관철시키기가 훨씬 용이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진주민의 제의는 그들에게 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합세하여 정방의를 친 결과는 참혹했다. 그들은 참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방의에 의해 그들의 근거지인 노올부곡까지 공격당함으로써 전멸을 면치 못하였다. 주민들의 호응도 받지 못하는 정방의가 승리를 거둔 이면에는 이미 진주를 장악하여 진주목내의 보승·정용군까지 그의 지휘 하에 두게 된 군사력과 더불어 정부의 지원이 있었으리라 보여진다. 정부측에서 볼 때는 정방의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음대로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탐탁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을지는 모르나, 그보다는 농민·천민의 봉기가 훨씬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함께 힘을 합쳐야 할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진주 주민들은 정방의를 치기 위해 주변의 농민, 부곡민들과 힘을 합쳐 끊임없이 공격하였다. 그들이 합주 부곡민과 함께 공격하다가 패배한 지 무려 6개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진주민은 정방의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진주사람들이 정방의를 죽였다. 그 동생 昌大가 200여 명을 이끌고 성에 오르니 고을사람들이 그를 공격하였다. 이에 창대가 도망가고 그 무리들도 또한 흩어지니 진주가 평정되었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鄭方義).

 진주사람들은 정방의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방의의 뒤늦은 민심수습은 그가 진주 주민들을 6,400명이나 무고하게 살상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였다고 보여진다. 이에 정부도 더 이상 정방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초기의 공사노예의 봉기가 비록 주리를 죽이는 형태로 나타나긴 했지만, 이것은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비해, 이제 진주민 봉기의 목적은 정방의 타도라는 모습으로 축소되었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진주민의 봉기가 단순히 토호와 지역민과의 갈등으로 파생된 것이라면, 계속 정방의를 도와서 주민들의 원성을 살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청도의 운문산에는 반민들의 근거지가 온존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정부가 주민들을 학살한 정방의를 돕는다는 것을 구실로 진주민과 합세한다면 봉기의 양상은 더욱 확대될 우려가 있었다. 오히려 진주민을 부추겨서 정방의를 제거한다면 최충헌으로서는 그의 기반을 확립하는 데 더욱 유리할 수도 있었다. 이제 정부는 완전히 방관적인 자세로 돌아섰다. 이에 정방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오로지 자신의 군사력으로 억압적인 통치를 계속하였으나 정부의 후원이 없는 상태에서 원한으로 더욱 가열된 진주민의 항거를 당해낼 수 없었다. 드디어 정방의가 진주사람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자 그의 아우 정창대와 나머지 측근들도 모두 숨거나 도망하였다. 이로써 정방의의 반란은 진주민에 의해 종식되게 되었다.

 중앙의 권세가를 배경으로 한 지방관과 토호와의 사이에서 더욱 많은 수탈에 시달리던 공사노예의 봉기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토호인 정방의의 등장을 가져왔으므로, 진주민의 항쟁은 일반적인 민란과 성격이 다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같은 정방의의 반민중적 성격은 전체 진주민의 분노를 사게 되어 결국 주민들에 의해 타도되고 말았다. 그러나 진주목에서는 정방의가 타도된 이후에도 그들이 바라는 요구 조건은 거의 수렴되지 않았다. 안찰사에 의한 일시적이고 미봉적인 무마책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노예나 천민들의 신분 상승이나 대토지소유의 반대 등 본질적인 문제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특히 앞서 본 바와 같이 정방의는 주민들을 6,400여 명이나 죽였고, 그로 인해 주민과 주리와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무려 1년간이나 소요상태에 있었으므로 진주는 황폐해졌다. 결국 진주주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정씨를 중심으로 한 토호를 몰아내는 데 그쳤을 뿐 농민들은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여 그들 또한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 때를 틈타 최충헌은 진주를 완전히 자신의 영유지로 만들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진주민이 최충헌의 반대세력인 토호들을 제거시켜 준 셈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농민·천민·노예들이 힘써 정방의를 타도함으로써 얻은 성과는 별로 없었다. 이후 진주의 대다수 토지들이 최충헌의 농장으로 흡수되어 버렸으므로 농민들은 전호나 유민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난을 일으키기에는 관군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피지배층은 그들을 함부로 죽이고 수탈하던 토호와 대결하여 끝내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오히려 최충헌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비록 진주민의 항쟁은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으나 부당한 억압을 배제하기 위해 피지배층이 연합하여 끈질기게 싸워 그들의 힘으로 주리를 몰아낸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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