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1) 몽고족의 흥기와 여·몽관계의 성립
  • (1) 13세기 몽고족의 흥기

(1) 13세기 몽고족의 흥기

 고려시대에 있어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커다란 특징은 중국 한족의 주변에 복속되어 있던 북방민족들이 연이어 흥기하였다는 점이다. 10세기 초 당의 멸망 이후 거란족에 의해 세워진 遼가 중원의 宋을 압박하고, 12세기 초에는 다시 여진족이 흥기하여 요·송을 아우르는 金을 건국하여, 동아의 정세를 바꾸었다. 이같은 중국 대륙의 정세 변동은 때로 직접적인 군사적 침입을 수반하여 고려의 내정에 변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3세기 몽고족의 흥기는 이같은 북방민족들의 흥기와 그 맥락을 같이하는 바이지만 몽고의 경우 이전의 거란·여진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계사의 흐름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241) 몽고의 발흥과정에 대하여는 아래의 글들이 참고된다.
D’Ohsson, Histoire des Mongols, Tome Ⅰ, 1834;田中萃一郎 譯,≪ドーソン蒙古史≫, 東京, 1933.
Luc Kwanten, Imperial Nomand―A History of Central Asia, 500―1500, 1979;宋基中 譯,≪遊牧民族帝國史≫, 民音社, 1984.
金浩東,<蒙古帝國의 形成과 展開>(≪講座中國史≫Ⅱ, 지식산업사, 1989).

 11·12세기의 몽고고원에는 몽고족들이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이만(Nayimann)·케레이트(Kereyid)·메르키드(Merkid)·타타르(Tatar)·옹구트(Ongghud) 등이 그것인데, 몽고족(Mongghol)도 이러한 여러 부족 중의 한 집단이었다. 이들 각 부족들은 상호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그 생존을 영위하였다. 13세기 몽고족의 흥기는 鐵木眞〔테무진〕이라는 한 인물의 등장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몽고부족 보르지기드(Borjigid)씨족 출신의 테무진이 분열된 몽고고원의 통일을 이룩하고 오난강 상류에서 개최된 쿠릴타이에서 成吉思汗〔징기스칸〕으로 추대된 1206년(고려 희종 2) 봄은 몽고족 흥기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징기스칸은「大洋의 군주」혹은「황제 중의 황제」등으로 해석되어지곤 한다.

 몽고고원을 통일한 징기스칸의 활동력은 곧이어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그 첫 공격대상은 黨項〔당구트〕인이 세운 西夏였다. 전쟁은 1209년 본격화되었으며 그것은 금나라가 지배하던 중원정복의 전초전이었다. 그리하여 서하 복속 이후 징기스칸은 1211년부터 금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1214년 5월 마침내 금의 수도 中都가 함락되었다. 이에 금나라는 도읍을 황하이남의 汴京(開封)으로 옮겨 1234년까지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1219년 징기스칸은 중앙아시아 코레즘(Khorezm)제국에 대한 정벌전을 시작하였으며 몽고군은 오타르·부카라와 상업도시로 번창하던 사마르칸드를 불태우는 등 페르시아지역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유린하였다. 이것은 징기스칸이 파견한 몽고 사신단 몰살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행해진 것이었는데, 1223년까지 전개된 이 서방원정은 광범위한 전쟁지역을 효과적으로 장악한 유목 전술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몽고군의 급속한 대외전쟁은 그 속도와 범위, 전쟁방식 등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는 바 고종 5년(1218) 고려에 최초로 들어온 몽고군은 바로 금 정벌군의 한 부대라 할 수 있다.

 몽고의 대외원정은 1227년 징기스칸의 사망 이후에도 오고데이(太宗;1229∼1241), 구육(定宗;1246∼1248), 몽케(憲宗;1251∼1258), 쿠빌라이(世祖;1260∼1294) 등에 계승되어 계속적인 정복전쟁이 추진됨으로써 몽고 제국의 판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에 미치게 되었다.

 원 태종 오고데이〔窩闊台〕는 고종 17년(1231) 금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고 2년 후 마침내 금의 피란 수도 변경을 함락함으로써 중원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몽고의 고려에 대한 침략전쟁도 바로 이 금나라정벌의 작전과 연결되어 개시되었던 것이다. 중원에 대한 지배권 확립과 함께 오고데이는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에 대한 지배권 강화에 치중하였으며 특히 1236년부터는 러시아에 대한 원정을 개시, 1240년 키예프 점령을 고비로 사실상 러시아를 석권하였다. 이어 1241년에는 동유럽의 폴란드, 헝가리를 점령하고 서유럽의 기사단을 일거에 전멸시킴으로써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다.242) 池內宏,<金末の滿洲>(≪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0, 1922;≪滿鮮史硏究≫中世篇 1, 吉川弘文館, 1937).

 헌종대 정복전의 주요 목표는 남송과 페르시아지역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하였으며 남송에 대한 공격도 가열되어 거의 송을 고립무원에 빠뜨렸다. 그러나 남송의 멸망은 1279년 세조에 의해 성취되었다. 1271년 세조 쿠빌라이는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元으로 정하고 중원의 중심인 燕都(北京)를 새로운 수도로 하였다.

 몽고의 지속적인 정복전의 전개는 전쟁 자체가 노획물의 분배에 의한 재산 증식의 공동사업이라는 경제적 욕구가 큰 활력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몽고의 대외전쟁도 처음 징기스칸 시대의 약탈적 전쟁으로부터 점령 지역의 지속적 지배를 의도한 정복전쟁으로 변천하였는데, 13세기 몽고의 고려 침입은 이러한 몽고의 세계 정복전의 일환이었으며 그 중 특히 금·송에 대한 전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몽고의 고려에 대한 1∼3차 침략(1218∼1239)이 오고데이시대 금 정복전과 함께, 그리고 5∼6차 침략(1253∼1259)이 대남송 작전에 주력하던 몽케시대에 이루어진 것은 몽고의 고려침략이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 확립의 일환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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