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2) 몽고의 고려 침입
  • (1) 몽고의 침략

(1) 몽고의 침략

 고종 6년(1219) 여·몽간에 일정한 관계가 성립된 이후 양국 사이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계속 드리워져 있었다. 이는 몽고가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주변지역을 차례로 침공, 그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는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여·몽관계의 성립 이후 십 수년은 전쟁이 있기 전 폭풍의 전야에 해당하는 기간이 되는 셈이다.

 여·몽관계 성립 이후 몽고의 고려 침입을 보다 구체화한 것은 고종 12년 고려에 온 몽고 사신 著古與의 피살 사건이었다. 저고여는 고종 8년부터 몽고 사신의 자격으로 고려에 드나들었으며 그 때마다 과도한 공물을 거두어 돌아가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고려로부터 공물을 수탈하여 돌아가던 중 압록강 너머에서 피살된 것이다. 사건 발생 이후 몽고는 진상의 확인을 위하여 사자를 현지에 파견하였는데 이 역시 기습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고종 12년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양국간의 불균형하게 지속되던 관계는 깨져버렸다. 이후 수년간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해 오기까지는 불안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저고여의 피살사건은 이후 몽고군이 고려를 침입할 때 그 명분으로 되풀이 이용되고 있지만, 실제 사건의 발생은 인근에 출몰하던 다른 세력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으로 보인다. 몽고의 무력 개입을 초래하는 모험적 행동을 고려정부 스스로 자초하여 위기를 불러들일 만큼의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몽고군이 침략의 명분을 삼고자 하는 것이었을 뿐, 그 가해자가 실제 누구였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몽고의 고려 침략은 동아대륙에 대한 정복전쟁의 일환으로 치르어지는 예정된 수순에 의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몽고의 고려 침입이 개시된 것은 고종 18년 8월의 일이다. 그 사이 몽고는 징기스칸이 사망하였고(1227) 2년 뒤에는 태종 오고데이가 황위를 계승함으로써 몽고의 정복전쟁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당시 몽고 태종의 주요 목표는 중원지방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것이었고 고려 침공은 그러한 동방전략의 일환이었다.

 몽고군의 主帥 撒禮塔이 강동성싸움 때 부원수로서 哈眞과 함께 고려에 왔었던「札刺」라고 하는 사실은245) 周采赫,<札刺와 撒禮塔>(≪史叢≫21·22, 高麗大, 1977). 이러한 몽고의 침략정책적 성격을 잘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살례탑은 몽고의 금국 정벌계획에 의거, 파견되어 먼저 요동지방의 花凉城·開州 등지를 공략하고 이듬해인 고종 18년 8월에 드디어 고려 영내에 진입하였다. 이 때 몽고군에는 王榮祖·吾也而·移刺買奴·壁門 등≪高麗史≫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여러 장수들이 함께 참전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의 서북면 지역, 압록강 하구의 관문인 咸新鎭(義州)을 경유하여 침입하였는데, 이후 몽고군은 거의 같은 경로로 고려에 입구하였다. 몽고군의 최초 침입기사는≪고려사≫권 23, 고종 18년 8월 임오조에“몽고 원수 살례탑이 함신진을 포위하고 鐵州를 도륙하였다”는 것인데 실제 이들의 내침 시기는 대략 8월 중순이었던 것 같다.

 몽고침략군은 防戍將軍 趙叔昌의 항복에 의하여 침입의 관문이 되었던 함신진을 최초 교두보로 확보하고 이후 군사를 나누어 북계의 여러 성을 차례로 공략하였다. 8월 말에 靜州·鐵州를 도륙하였으며 9월 초에는 龜州가 이들 침략군에 의하여 포위되었다. 당시 살례탑이 거느린 부대에 의해 정주가, 이후 麟州·龍州가 차례로 함락되고, 9월 말에는 宣州·郭州 등의 지역이 점거되었다. 또 다른 부대에 의해 寧德鎭·瑞昌縣을 함락당하고 8월 말인 임오일에 철주를 도륙당하였으며 9월 병술일에 귀주를 포위한 부대는 아마 제3의 부대였던 것 같다. 이 무렵 귀주는 서북면병마사 朴犀와 인근 서북면 여러 성의 지휘관들인 정주의 分道將軍 金慶孫, 삭주의 분도장군 金仲溫, 그리고 靜·朔·渭·泰州의 수령이 함께 모여 있었다. 그리하여 몽고의 1차 침입 중 최대의 공방전이 다음해 정월에 이르기까지 전후 4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이 치열한 전투과정은 여·몽군의 전투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몽고의 선봉부대는 9월 중순에 黃州·鳳州 지경에 도착하였다. 당시 몽고군의 주요 군사력이 북계 여러 성, 즉 고려의 국경부근 군사구역을 공략하는 데 투입되었지만, 한편으로 다른 병력을 빠른 속도로 남진시켜 서울을 곧바로 공격케 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몽고군의 전면적 침략에 대하여 고려정부가 3군의 출정을 결정한 것은 9월 초, 그리고 이들이 개경을 출발한 것은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개경에서 파견된 고려의 중앙군이 몽고군과 처음으로 부딪친 것은 9월 하순 황주의 洞仙驛에서였는데, 이 첫싸움에서 고려의 3군은 몽고병 8천의 기습을 받아 고전하였다.

아군이 동선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침 해가 저물었고 척후병의 보고에도 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3군이 안장을 풀고 쉬고 있었다. 이 때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 ‘몽고병이 온다’하며 소리치니 군사들이 크게 놀라 다 도망하였다. 몽고병 8천여 명이 돌연 닥치매 李子晟과 장군 李承子, 盧坦 등 5, 6인이 죽기로 막아 싸우다가 이자성은 流矢에 맞고 노탄은 창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으나 군사가 이를 구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高麗史≫권 103, 列傳 16, 李子晟).

 몽고는 기병을 주축으로 한 기동력으로 불시에 고려군을 기습, 허를 찔렀던 것인데, 이 전투에서 인상적인 것은 당시 3군에 편성되어 출전하였던 草賊 농민군의 분전이었다.

3군이 비로소 집결하여 함께 싸우니 몽고병이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와 우리 右軍을 치거늘 散員 李之茂·李仁式 등 4, 5인이 이를 맞아 싸우는데 馬山 草賊으로 종군한 자 2인이 몽고병을 쏘니 시윗줄을 따라 엎드러졌고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 쳐서 패주시켰다(위와 같음).

 마산(경기 파주군) 초적군의 역전에 힘입어 몽고군 선봉대의 기습을 일단 격퇴시킨 고려의 3군은 다시 북상하여 10월 계유일에 고려 北界의 군사적 거점도시 安北府(安州)에 도착하게 된다. 고려의 중앙군이 안북성에 입성하자 곧이어 여·몽 양군의 일대 접전이 개시되었다.

3군이 이에 적과 싸웠는데 몽병은 모두 말을 내려 隊를 나눠 열을 지었다. 그리고 기병으로 우리 우군을 향하여 돌격, 화살을 비오듯 쏘니 우군이 어지러워지는지라 중군이 이를 구원하다가 또한 어지러워지니 다투어 성으로 돌아왔다. 몽병은 승승장구하여 살상이 반이 넘었으며 장군 李彦文·鄭雄과 右軍判官 蔡識 등이 전사하였다(≪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18년 10월 계유).

 고려정부는 안북성의 패배 이후 즉각 5군 병마를 추가로 징발하는 조처를 취하였지만 이것은 실효성이 없었다. 6일 후 몽고군은 平州城을 처참하게 도륙하였고 뒤이어 개경 교외에까지 당도하였다. 이들 몽고군은 잔학한 약탈을 서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그 피해의 실상은 매우 비참하였다.

 개경에 내도한 몽고군의 일부는 남하를 계속, 충주에까지 내려갔는데“지나는 곳마다 잔멸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 것처럼 혹심한 약탈을 일삼았다. 충주에 침입하였던 몽고군은 현지의 임시 방어조직으로 편성된 奴軍·雜類別抄에 의하여 격퇴되었고 여·몽간의 화의 진전에 따라 1차 침략의 몽고군은 충주에서 일단 군사적 움직임이 저지되었다.

 몽고 1차 침략군은 충주 이남까지 내려오지는 못했지만 외침으로 인한 위기감은 이미 남부지방에서도 팽배하여 있었던 것 같다. 몽고군이 침입하자 경주에서는 이 지방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木郎(豆豆里)의 지시라 하여 집정자 崔瑀에게“무기와 말을 보내주면 승첩을 보고하겠다”고 전갈하고 있는데246)≪新增東國輿地勝覽≫권 21, 慶州府 古蹟. 이는 몽고 침입에 따른 위기감이 이미 남부지역에도 널리 퍼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蒲桃·迪巨·唐古 등의 몽고군 장수들이 개경 근교에 주둔하자 이미 전세를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 고려정부는 근교의 몽병을 먹이거나 안북부의 살례탑에게 사자를 파견하는 등 빠르게 화친을 모색하였다. 즉 12월 초 왕족 淮安公 挺을 살례탑에 파견하였고 고려에 온 몽고 사신을 통해 표문을 올리는 등 和議 체결에 부심하였다.

 고종 18년(1231) 몽고의 1차 침략으로 몽고군은 고려의 국경 군사구역인 북계 여러 성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북계지역이 점거된 이같은 상황 아래서 고려정부가 이후 몽고의 압력을 거부하기는 매우 어렵게 되어 있었다. 몽고는 북계지역의 지배를 보다 항구화하기 위하여 이들 지역에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여·몽간의 화의 진전에 따라 이듬해 정월 일단 군대를 철수시켰다. 북계지역의 장악으로 고려의 대항능력을 마비시키고 아울러 지배를 항구화하는 장치의 설정으로 몽고는 일단 그 군사적 성과를 달성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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