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5) 고려의 입보책과 지방민의 항전

가. 고려의 입보책

 고종 18년(1231) 살례탑의 침공 이후 30년 간 지속되는 여·몽전쟁은 기동성을 장점으로 하는 몽고의 군사력에 대하여 고려가 해도 혹은 산성에의 입보라는 일종의 淸野戰術로 대처한 싸움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해도 및 산성에의 입보책은 고려의 가장 주요한 대몽전략을 이루었던 것이다.

 해도입보책은 강화에의 천도 자체가 그에 해당하거니와 그것은 전쟁 초기의 고종 18년 1차전쟁 당시 이미 국경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령 몽고침입 개시 한 달도 되지 않은 고종 18년 9월 기록 중에 몽병이 黃州와 鳳州에 이르니 2주의 수령이 백성을 이끌고 鐵道에 입보하였다”는283)≪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18년 9월 정유. 것이 나타난다. 또≪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宣·昌·雲·博·郭·孟·撫·泰·殷州 등 북계의 10주가 고종 18년 몽고병을 피하여 해도에 들어갔다고284)≪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하여 북계지역에서의 이같은 해도입보의 보편화 현상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 북계 주진의 입보는 수령의 지휘하에 이루어지고 있어 그것이 정부의 공식적인 대몽전략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고종 19년 6월 중순 천도책이 결정되어 이 사실이 공시되면서 지방에 대해서는“사자를 여러 도에 보내어 백성을 산성과 해도로 옮기게 하였다”고285)≪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6월. 하였고, 유사한 조치는 이후 대몽전쟁기간 중에 되풀이하여 나타나고 있다.

 해도입보책의 시행은 앞서와 같이 사자가 지방에 파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흔히 공식적인 기왕의 행정조직을 통해 하달되었다. 후자의 경우 그 명령은 강도정부로부터 양계의 병마사 혹은 안찰사 등에게 하달되고, 이것은 다시 각 주현의 수령들에 전달되어 수령은 일선에서 입보의 지휘 감독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입보민에 대한 지휘 감독은 대체로 지방수령에게 맡겨져 있었다.

 가령 고종 18년 황주·봉주의 철도 입보, 함신진 부사 全亻間의 薪島 입보, 고종 44년 맹주 수령 胡壽의 신위도 입보, 옹진현령 李壽松의 창린도 입보 등의 사례, 그리고 여·몽간의 화의가 진행 중이던 고종 46년 3월에“州縣의 수령들로 하여금 피란민을 이끌고 출륙하여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는286)≪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6년 3월 병자. 것은 해도입보의 기본단위가 군현의 행정단위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곧 북계 주진의 경우 여·몽전쟁 기간 중 주의 소재가 자주 옮겨졌던 것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행정구획 단위의 이동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해도에의 입보책은 무인집정자의 일관된 방책이었다. 가령 고종 43년에 최항이“여러 도에 사자를 보내어 사람을 모두 몰아 섬으로 들어가게 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집과 전곡을 불태우도록 하였다”라고287)≪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3년 8월. 한 것은 이러한 입보책의 추진이 기본적으로 집정자 최씨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에 약한 몽고군에게는 확실히 효과적인 전술이 되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3차 여·몽전쟁기간 중인 고종 25년(1238) 몽고군이 강화도 맞은편에 출현, 위협적 시위를 벌이자 이에 대해 이규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이 물을 뛰어 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말하겠는가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게나.

저들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國業이 어찌 갑자기 끝나겠는가(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5, 九月六日聞虜兵來屯江外國人不能無驚以詩解之).

 당시 몽고군의 출현에 대해 강도는 많은 동요를 일으킨 듯하나 이에 대해 이규보는 물에 약한 몽고가 절대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 점은 당시 강도의 관료들이 해도입보책의 효과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288) 해도 및 산성의 입보에 대한 구체적 사례에 대해서는 尹龍爀,<고려 대몽항쟁기 지방인의 피란입보 사례>(≪百濟文化≫22, 忠南大, 1992) 참조.

 산성에의 입보책 역시 전략의 성격에 있어서는 해도입보책과 유사하다. 산성입보 역시 대개 지방의 수령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것은 특히 방호별감의 파견으로 촉진되었다. 5차 전쟁 이후 방호별감이 자주 파견되어 고종 40년(1253)의 경우만 하여도 양산성 방호별감 權世侯, 동주산성 방호별감 白敦明, 충주산성 방호별감 金允侯, 천룡산성 방호별감 趙邦彦, 원주성 방호별감 鄭至麟, 양근성 방호별감 尹椿 등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 방호별감은 고종 말년에 가서 서해도의 가수혈 혹은 양파혈과 같은 피란 가능한 자연동굴에까지 파견되어 입보책을 강행하고 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방호별감이 도서보다는 주로 내륙의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파견되었던 것을 알려 준다.

 방호별감은 해당 지역 군현민들의 입보를 총괄하는데 수령의 경우도 그 지휘에 들어갔고 여러 군현이 묶어져서 통제받는 경우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가령 고종 40년 東州山城에는 동주부사와 판관 이외에도 인근의 金城縣令과 金華監務가 함께 입보하여 방호별감 백돈명의 지휘를 받고 있는데 이 점은 방호별감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지방의 수령이 문반으로 보임되었던 것과는 달리 방호별감의 경우 무반을 임명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송문주·김윤후·윤춘 등의 경우를 볼 때 낭장급이 보임되고 휘하에는 얼마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방호별감의 군사력은 고종 46년(1259) 초 한계산성전투의 경우 야별초군이었고 강도로부터 중앙의 병력이 파견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방호별감 휘하의 병력 규모는 그것이 낭장급의 보직임을 고려할 때 대략 200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고종 40년대 광범한 방호별감의 파견은 입보책의 보다 강력한 추진을 의도한 강도 무신정권의 의도를 나타낸 것이라고 파악된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입보책이 민생의 문제로 일정한 한계에 부닥친 데 따른 불가피한 보강책이기도 하였다고 생각된다.

 고려의 해도 및 산성에의 입보책은 평원지역에서의 기병전술에 익숙한 몽고군에게 적지 않은 장애가 되었고, 그것은 항몽전쟁이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장기전의 상황으로 전개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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