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4) 삼별초의 대몽항전
  • (1) 몽고와의 강화

(1) 몽고와의 강화

 고종 46년은 고종 18년 이후 거의 30년에 걸쳐 진행되어 온 몽고군의 침입이 종식되면서 여·몽간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해이다. 전년 12월 고려정부는 몽고의 지속적인 압력을 일단 수용하기로 하고 朴希實 등을 파견, 개경으로의 출륙 환도와 태자의 입조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들은 이듬해 3월 귀환하면서 차라대의 처소에 들렀는데, 그는 강화도로 사자를 보내 태자의 입조문제를 협의하였고, 이에 따라 태자 倎이 4월에 몽고로 출발하였다. 출륙 환도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몽고군의 고려 각처에 대한 군사적 유린은 이것으로 일단 종식되었다.

 강화도 고려정부에 대한 몽고군의 본래 요구는 출륙 환도에 있었다. 이것이 이루어져야만 고려를 실제적으로 지배·통제하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은 이미 살례탑의 2차 침략 때부터 몽고군의 집요한 요구였다. 이에 고려정부가 이에 불응하자 몽고군은 각처를 초토화하여 강도정부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몽고군의 의도는 두 가지 문제에 부딪쳤다. 첫째는 고려의 각 지방에서 성보를 중심으로 한 지방민들의 저항에 봉착함으로써 전략적 효과를 충분히 거두지 못하였으며, 무신정권의 강화도에 대한 집착 또한 단호하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몽고조정의 황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종종 발생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군사전략은 반드시 일관적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려에서의 전황은 점차 장기적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

 몽고 3차 침략의 말기인 고종 25년 고려정부는 몽고군의 철수를 유도하기 위하여 金寶鼎·宋彦琦 등을 몽고에 파견하였는데, 이듬해 몽고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몽고 태종의 조서를 전하고 고려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였다. 무신정권하의 고려정부가 즉각적인 출륙 환도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몽고는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출륙에 앞서 우선적으로 관철시키려한 것이 국왕의 친조였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후 단속적으로 교환된 여·몽간의 사신들을 통하여 되풀이 확인되고 있다.

 여·몽간의 관계에 있어서 고종 26년 이후 출륙 환도보다 국왕의 친조가 우선적인 현안으로 몽고측에 의해 요구되었지만 무신정권의 고려정부로서 이 또한 실현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왕의 친조가 몽고와의 정치적 관계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상대적으로 무신정권의 정치적 안정을 동요시킬 위험성이 높은 것이었다. 국왕의 입장에서는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이역만리의 길을 떠난다는 것을 쉽게 결단하고 싶지 않았고 몽고에 대한 고려인들의 의구심 내지는 자존심으로 인하여 사실상 고려국왕의 몽고 친조라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정부는 몽고의 요구를 희석하기 위하여 국왕대신 왕족을 파견하였다. 고종 26년 12월 왕족 新安公 佺(현종의 8대손)을 동생이라 하여 입조케 하였고, 다시 고종 28년 4월에 왕족 永寧公 綧을 왕자라고 칭하여 몽고에 보내니 이러한 사정으로 고려의 반응을 몽고 역시 신뢰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므로 그들의 침략은 되풀이되었다.

 고종 36년(1249) 집정자 최우가 사망하자 몽고는 정국의 변화에 약간의 기대를 갖게 되었다. 고종 37년 고려정부는 강화도의 맞은편 昇天府의 臨海院 옛터에 궁궐을 짓는 것처럼 하여 출륙작업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물론 이 또한 몽고의 예봉을 완화하려는 의도였을 뿐 최항은 지금까지의 대몽책을 그대로 견지, 항전체제를 강화시켰다.

 고종 40년 이후 몽고군이 연이어 고려침입을 되풀이하면서 몽고군은 모종의 결과를 보고자하는 강박에 시달렸고 고려 또한 계속된 몽고군의 작전으로 인한 고통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고종 44년 6월 몽고의 차라대는 여전히 실현되지 못하는 국왕의 입조보다 더 낮은 단계의 요구를 퇴군의 조건으로 강도정부에 제시하였다. 그것은 국왕대신 태자의 입조였는데 고려 정부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는데 특히 崔滋·金寶鼎 등은 이를 공개적으로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식을 걱정하는 고종의 인간적인 우려로 인하여 쉽게 실현되지 못하였다.

 12월 고려정부는 태자대신 동생인 安慶公 淐을 몽고에 보냈으나 이듬해 고종 45년 몽고의 침략은 다시 재개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12월 몽고에 파견한 고려사신이 이듬해 귀환하면서 태자 입조문제는 급진전하여 태자 倎이 4월 말 몽고로 출발하니 이로써 몽고의 고려 침략도 일단 종식되었다.

 고려 태자의 몽고입조가 이루어진 고종 46년은 몽고의 고려에 대한 무력 침공이 일단 종식됨으로써 여·몽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지만 동시에 고려·몽고 양국에 모두 일정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태자가 몽고로 떠난 지 얼마되지 않은 고종 46년 6월, 30년 동안 전쟁을 경험한 고종이 세상을 떴으며 다음달 7월에는 몽고의 헌종 역시 사망했기 때문이다.

 몽고의 헌종은 남송정벌전 중 四川省의 合州城 진중에서 사망하였으므로 헌종을 만나기 위하여 중국으로 들어왔던 태자는 개봉 근처에서 유력한 황위계승 예정자였던 忽必烈〔쿠빌라이〕을 만났다. 당시 쿠빌라이는 황위 계승을 위하여 수도로 돌아가던 중이었으며 황위를 둘러싸고 동생 阿里不可〔아리부카〕와 경쟁 중이었다. 쿠빌라이를 만나고 돌아온 태자는 곧 왕위(원종)에 즉위하였으며, 쿠빌라이 역시 황위를 계승하였다. 고려 원종과 원 세조와의 이같은 개인적 인연은 여·몽 왕실간의 관계를 급격히 밀착시키는 계기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무신집정자에 의해 장악되었던 고려의 권력구도에 있어서도 새로운 국면을 야기시켰다.

 원종 원년 4월 고려는 永安公 僖를 몽고에 파견하여 세조(쿠빌라이)의 즉위를 축하하였으며 이 때부터 원의 연호(中統)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듬해 원종 2년 아리부카란의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태자 諶이 원나라에 파견되었으며, 원종 5년(1264)에는 일찍이 전례가 없었던 국왕의 입조가 실현되었다. 이 국왕의 친조는 원에 대한 고려의 예속성을 더욱 가시화하는 것이었으나 고려의 권력구조에 있어서 국왕의 권위는 몽고 세력의 비호에 의하여 점차 회복되는 경향을 가져왔다.

 원 세조 이후 몽고의 대고려정책은 이전에 비하여 비교적 유화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江淮宣撫使 趙良弼, 혹은 陝西宣撫使 廉希憲의 말처럼 군사력을 동원한 지배대신 유화적인 회유책에 의하여 고려를 복속시킨다는 것인데 동시에 그 유화책은 고려의 왕권을 그 배후에서 뒷받침함으로써 고려왕을 통한 지배권 행사라는 보다 교묘한 차원의 것이었다. 태자 전이 처음 귀국할 때의 조서중에서는 고려의 신하로서“다시 감히 난동을 계속하여 위로 범한 자가 있다면 이는 곧 나의 법을 어지럽히는 것”이라294)3≪高麗史節要≫권 18, 원종 원년 4월. 하여 고려의 새왕 원종에 대한 도전이 곧 몽고 황제에 대한 도전임을 규정하고 있다.

 원종 5년의 국왕입조는 이같은 고려 왕실의 권위가 원 황실과의 연결을 통하여 보다 강화될 것이 분명하였으며, 이같은 전망은 당시 고려의 집정자 金俊의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친조가 실현되었으며, 더욱이 세조는 소환령을 내려 김준 부자로 하여금 元都로 오게 하였다. 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무신정권의 불안정은 증대되었으며 이러한 곤경을 타개할 목적으로 김준은 원의 사신을 살해하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원종 9년 12월 김준은 휘하의 무신 林衍에게 주살당하였다. 이같은 사태는 국왕 원종과 집정자 임연 사이의 갈등관계 속에서 야기되었으며 정변의 중심에 왕이 간여되었다는 점에서 무신정권의 약화와 함께 몽고세력을 등에 업은 국왕의 권위가 점차 확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연의 거사에는 야별초의 군사력이 동원되었으니, 당시 야별초는 실질적으로 임연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거사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왕 원종의 존재는 그 정치적 권한 행사에 일정한 제약이 되었다. 그리하여 원종 10년 위협적 분위기에서 재추의 고관들은 원종의 폐위와 동생 안경공 창을 신왕에 옹립하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몽고는 단호한 입장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당황한 임연은 다시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같은 정치적 상황은 원의 고려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무신정권의 권위가 명백히 추락함으로써 이후 원은 국왕을 통한 고려의 지배를 급격히 촉진시키는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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