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4) 삼별초의 대몽항전
  • (2) 삼별초의 봉기

(2) 삼별초의 봉기

 원종 11년 정월 복위 이후 몽고에 입조한 원종은 고려 세자의 몽고황실과의 혼인을 청하는 한편, 임연을 제거한 후 개경으로 환도하기 위한 군사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강도의 임연정권은 막다른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임연은 근심과 번민으로 돌연 사망하고 아들 林惟茂가 권력을 계승하였다.

 5월 몽고군의 지원을 받아 귀국 도상에 있던 왕은 상장군 鄭子璵, 대장군 李汾禧를 먼저 강도에 보내 개경으로의 출륙 환도를 명령하였다. 고려 조정에서 이를 논의하자「황제의 명」을 구실로 모두 출륙 환도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유무는 이를 거부하기로 작정하고, 여러 도에 수로방호사와 산성별감을 파견하여 각 지방의 해도 및 산성에의 입보를 촉진케 하고 강도의 외곽인 교동에 장군 金文庇를 주둔시켜 왕의 군사를 막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미 정치적 기반을 상실한 임유무정권은 항전을 더 이상 지속할 수가 없었다. 원종과 비밀히 연결된 어사중승 洪文系, 직문하 宋松禮 등은 삼별초를 회유하여 임유무 등을 체포·처단하였다. 이에 따라 개경환도 날짜가 공포되고 출륙의 준비가 서둘러졌다.295) 삼별초의 봉기 및 항쟁에 관하여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金庠基,<三別抄와 그의 亂에 대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金潤坤,<三別抄의 對蒙抗戰과 地方郡縣民>(≪東洋文化≫20·21, 1981).
羅鍾宇,<高麗武人政權의 沒落과 三別抄의 遷都抗蒙>(≪圓光史學≫4, 1986).

 삼별초는 임유무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동조하였다. 그러나 막상 출륙과 개경에의 환도가 확정되자 삼별초는 동요되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40년을 끌어온 항몽전쟁시대 주요한 군사력이었다. 더욱이 삼별초 가운데 神義軍의 경우는 전쟁 중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몽적 성격이 다른 어느 군보다 강하였다.

 개경으로의 환도날짜가 공시되자 삼별초가“다른 마음이 있어 좇지 않고 제나름대로 창고를 열었다”는 것도 몽고에 복속한 원종의 고려정부에 대하여 그 마음이 돌아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삼별초가 출륙 환도의 방침에 불응하는 반응을 보이자 개경에 도착한 원종은 5월 장군 金之氐를 강화에 파견, 삼별초를 혁파해 버리고 명부를 거두어갔다. 지금까지 삼별초는 정치권력의 중심과 연결하여 항몽전에 참여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 정치권력이 몽고와 완전히 결탁한 시점에서 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6월 초하루 장군 裵仲孫, 야별초 지유 盧永禧 등의 지휘로 삼별초군은 봉기하였다. 출륙 환도의 준비로 들떠있던 강화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이에 호응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또한 다투어 강을 건너 육지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삼별초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강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으며 왕족 承化侯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대장군 劉存奕, 상서좌중 李信孫을 각각 좌·우승선에 임명하였다. 이제 대몽 항쟁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문무반 관리의 상당수가 육지로 탈출하고 군사들 또한 육지로 빠져나감에 따라 삼별초는 남으로 거점을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296) 尹龍爀,<三別抄의 蜂起와 南遷에 관하여>(≪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一潮閣, 1994). 이 모습은 “배를 모아 公私의 재물과 자녀를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仇浦로부터 缸破江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하여 무려 1천여 척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몽고의 頭輦哥 휘하 군사 2천이 곧이어 강화도에 상륙, 노략질을 일삼으니 성내의 민가가 불타고 미곡과 재물이 허다히 소실되었다.297)≪高麗史節要≫권 18, 원종 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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