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4) 삼별초의 대몽항전
  • (3) 삼별초의 진도 항전

(3) 삼별초의 진도 항전

 삼별초군이 개경환도를 단행한 고려정부에 대항하여 왕족 승화후 온을 옹립하고 좌·우승선 등의 관직자를 임명한 것은 이들이 별도의 독립적 정부를 수립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종래 무신정권의 권력 기반의 일부였다는 점에서 삼별초 정부는 무신정권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대외관계의 노선에 있어서도 무신정권의 반몽적 입장을 고수·견지하였지만, 정치적 입장은 정부의 권력 중심에서 반정부의 입장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일정한 차이를 갖는다.

 삼별초군이 봉기한 것이 원종 1l년 6월 초하루, 그리고 이들이 강도의 물자와 사람들을 휩쓸어 남으로 향한 것이 이틀 후의 일이었음을 볼 때 삼별초의 봉기 자체가 반드시 창황 중에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신정부가 강화도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진 섬으로 다시 옮길 것이라는 이른바「海島再遷論」은 이미 10년 전부터 끈질기게 나돌았던 것이 사실이다. 가령 원종 원년 몽고에 투항한 金守磾, 于琔(綻) 등은“고려가 급하게 되면 반드시 제주도로 옮길 것이다”라는 정보를 제공했는데 이같은 소문은 임연집권 대에 더욱 확산되어 몽고로서는 매우 우려했던 문제였다.

 삼별초의 봉기는 이같은 논의를 현실화한 것이었으며, 특히 몽고와의 관계에 있어서 고려왕실과의 관계가 밀착되면서 무신정권의 핵심부에서는 새로운 사태변화에 대응한 방책이 예견되었던 것 같다. 삼별초가 서남해안의 珍島에 입거하게 된 것은 원종 11년 8월의 일이었다. 강도에서 출발한 지 70여 일만의 일인데, 그 동안 이들의 행적은 별로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아마 서남해 연안의 여러 섬들을 점거하고 아울러 내부조직 체계를 정비해 가면서 이동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별초가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정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진도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강도에 비하여 안정성이 훨씬 높다는 점이다. 원종의 고려정부가 이미 몽고와 결탁된 상황에서 강도의 수비는 커다란 취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 진도는 이전부터 무신정권의 일정한 세력기반이 확보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최씨정권시대의 경우에서 보면 경제적 기반이 된 최씨의 농장이 경상도와 전라도 남해안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특히 전라도 남해안의 昇州·寶城·康津 등 지역과 그리고 진도에 최씨농장이 있었다. 이같은 과거의 경제적 기반은 삼별초의 활동에 주요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될 수 있었다.

 셋째, 진도는 경상·전라지역의 세곡이 조운을 통하여 서울로 운송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길목이다. 이 때문에 진도지역의 장악은 영·호남지역의 조세를 개경정부로부터 차단시키고 자체 자원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 삼별초의 진도 장악 이후 개경 정부가 받게 된 경제적 타격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삼별초정부는 진도 龍藏城을 거점으로 삼고 제반 수비시설과 관아 등을 경영하여 전시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였다. 현재 용장성유적지에서는 당시 삼별초의 궁궐 및 관아 건물의 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건물을 원래 성안에 있던 용장사라는 절을 활용하면서 점차적으로 시설을 갖추어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진도를 거점으로 한 삼별초정부의 초기 활동은 매우 왕성한 기운이 넘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 중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고려의 정통정부임을 스스로 자처하였고 帝를 칭하였다는 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삼별초정부가 독자적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 일본과의 연결을 통한 몽고세력의 차단을 의도했던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곧 진도에 입거한 이듬해인 원종 12년 진도의 삼별초정부는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당시 관련자료가 발견되어 부족한 삼별초 이해에 얼마간의 도움을 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삼별초정부는 몽고를「韋毳」라고 하고「被髮左衽聖賢所惡」 즉 오랑캐의 풍속은 성현이 싫어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여 몽고에 대한 적개심을 피력하였다. 한편「我本朝統合三韓」이라던가“강화도에 천도하여 약 40년을 지냈고 또 진도로 천도하였다”고 하여 고려 정통정부로서의 진도정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298)石井正敏,<文永八年來日の高麗使について―三別抄の日本通交史料の紹介―> (≪東京大史料編纂所報≫12, 1978). 한편 삼별초의 진도정부는 여·몽연합군에 대응하기 위한 일본과의 일정한 연결을 의도하고 있었다. 이들 삼별초정부는 추대한 溫을 몽고와 대등한 위치의 황제로 칭하였던 같다. 이미 중원의 패자가 된 몽고에 대항하는 삼별초정부로서「帝」를 칭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칭제를 통하여 개경의 원종정부를 몽고에 부용하는 일종의 꼭두각시 정부로 평가해 버림으로써 삼별초정부의 정통성을 선전하려는 의도도 있을 수 있다.

 삼별초정부가 진도에 거점을 정하고 활동하면서 그 세력은 제주도를 포함한 남해안 일대에 뻗치고 있었다. 몽고측의 보고에 의하면, 이 무렵 30여 개의 섬이 삼별초의 수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남해도에는 대장군 출신 劉存奕이 주재하여 경상도 남부지역에 대한 제해권을 확보하고 있었고, 진도에서 가까운 전략 요충지인 완도에는 宋徵이 역시 삼별초의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대장군 유존혁은 강화도에서의 삼별초봉기 당시 그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며 완도의 송징은 지금까지도 완도지역에서는 신적인 인물로 추앙되고 있는 바 진도의 삼별초정부와 합류하여 완도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원래 지배권을 유지한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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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몽고침략군에 대한 고려의 항전(1231∼1259)
<지도 1>몽고침략군에 대한 고려의 항전(1231∼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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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의 삼별초정부는 인근의 완도 및 남해도 등 규모가 큰 섬을 전략적 거점으로 연결시켜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는 일종의 해상왕국을 경영했던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삼별초군은 합포(마산)·금주(김해)·동래·거제·장흥·나주 등 전라·경상 연안의 내륙지역을 점거하는 등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진도에 입거한 지 3개월 후인 원종 11년 11월 삼별초군은 제주도를 함락, 확보함으로써 배후의 안전성 높은 후방지역까지 갖게 되었다. 당시 제주에는 개경정부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靈巖副使 金須, 장군 高汝霖 등이 파견되어 해안지역에 방어성을 구축하는 등 鎭戍에 전력하고 있었다. 이에 삼별초군은 제주 서쪽 明月浦로부터 상륙하여 관군을 공격하였으며 치열한 전투 후 김수·고여림 등의 관군을 모두 사살하고 제주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남부지역에서 삼별초가 정통 고려정부를 자처하면서 독자적 세력을 확보하고 있을 때 내륙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농민·천민들의 집단적 움직임이 있었다. 원종 12년 정월 경상도 密城(밀양)에서는 朴慶純·方甫·桂年 등이 군민들을 불러모아 攻國兵馬使를 칭하고 밀성과 금주의 수령을 죽이고 淸道監務를 목베는 등 경상지역 일대를 점거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민란봉기 이후 장차 진도의 삼별초정부에 호응하려 했다.

 경남지역 일대를 장악한 밀성인들의 봉기에 바로 뒤이어 개경에서는 관노 崇謙·功德 등이 무리를 모아 몽고에서 파견된 다루가치와 개경정부의 고위 관직자들을 살해하고 진도에 투항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밀성인들의 봉기에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개경에서의 봉기소식이 전해지자 大部島(경기도)에서는 주민들이 몽고인 6인을 살해하고 봉기하였다. 이처럼 내륙의 여러 지역에서는 반정부세력 혹은 반몽고 항전세력들이 봉기하여 진도정부와 연결하고자 하였다.299) 申安湜,<고려 元宗代 민의 동향에 대한 一考察>(≪建大史學≫8, 1993). 이렇듯 삼별초정권의 위세가 떨쳐지자 원근의 여러 지방에서는 관원들이 진도에 들어가 삼별초정부의 요인과 승화후 온을 알현하는 형편이었다.

 삼별초군이 봉기하여 진도로 향한 원종 11년 6월 개경정부는 김방경을 追討使로 삼아 宋萬戶의 몽고군 1천과 함께 해상으로 추격케 하고 뒤이어 참지정사 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에 임명, 삼별초 진압의 책임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몽의 수륙양군은 모두 위축되어 아예 삼별초와 접전하려하지도 않았다. 몽고군은 남행하는 삼별초군을 바라보면서도 의도적으로 전투를 회피하였으며, 나주에까지 이른 신사전은 삼별초군이 출륙한다는 소식에 놀라 서울로 도망치고 말았다.

 개경정부는 9월 장군 楊東茂, 고여림 등으로 진도를 공격하게 하고 김방경을 전라도추토사로 새로 임명, 몽고원수 阿海와 함께 나아가도록 하였다. 이같은 조치는 삼별초군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응케 하는 새로운 전략으로 몽고는 삼별초의 봉기에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응코자 하였다.

 여·몽연합군은 진도의 맞은 편에서 진을 치고 삼별초군과 접전하였다. 怪獸를 그린 삼별초의 함선은 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전투는 오히려 삼별초의 선공으로 벌어져 연합군이 번번이 수세에 몰리는 지경이었다. 11월의 전투에서는 연합군 전함 100여 척과 삼별초군 30척이 접전하였는데 삼별초군이 북을 치며 요란한 기세로 진격하니 몽고 원수 아해는 겁에 질려 후퇴하고 김방경은 고군분투하다 포로가 되기 직전에 겨우 목숨만을 건질 정도로 삼별초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 때문에 몽고는 아해를 파직시키고 忻都로 그 직을 대체하였다.

 삼별초군은 바다에 익숙한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고조된 사기로서 여·몽연합군을 정신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함선에 괴수를 그려 그것이 바다에 비추면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전투할 때에는 북·징 등을 최대한 사용하여 위축된 연합군을 심리적으로 제압했던 것이다.

 삼별초에 대한 무력제압이 벽에 부딪칠 상황에서 몽고는 진도정부를 회유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12월 蒙使 杜員外가 고려 원외랑 朴天浢寸와 함께 진도에 들어와 몽고황제의 書와 원종의 諭旨를 전하였으며, 이것이 여의치 않자 이듬해 원종 12년 2월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직접적인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몽고의 회유책에 대하여 진도정부는 사신단에게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거나 억류하면서 진도공격에 나선 여·몽연합군의 철수 혹은 전라도 일대의 점유 인정 등의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면서 시간을 지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별초군의 활동영역이 점차 확대되고 경상도 남부 등 내륙지역에서 이에 호응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야기되자 몽고로서는 회유책을 단념하고 진도에 대한 결정적 타격을 도모하게 되었다.

 원종 12년 4월 몽고는 진도 공격을 위한 일정을 확정하고 고려에 대하여 군선과 병력·군량 등 제반 내용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병력 6천과 진도 가까이 있던 병선 260척 이외에 140척을 추가 증원케 하고 각종 군수물자로서 작전을 지원케 하였다. 김방경·흔도·홍다구 등에 의한 진도에 대한 총공격은 5월 중순에 개시되었다.

 여·몽연합군은 좌·우·중 3군으로 나누어 동·중·서쪽의 세 방면으로 공격하였다. 이들은 그 동안의 실패를 거울삼아 진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작전을 계획했던 듯하다.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을 이끌고 진도의 관문인 碧波亭으로 들어가 삼별초의 주력을 모두 끌어들였다. 삼별초는 몽고군에 대한 연이은 승리, 몽고군의 회유, 내륙 각 지방에서의 호응 등으로 적지 않게 기세가 고무된 나머지 여·몽군에 대하여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김방경과 흔도가 지휘하는 중군쪽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킨 것은 여·몽군의 치밀한 계산에 말려든 셈이었다. 이 틈을 타 흥다구의 좌군은 獐項으로, 그리고 우군은 동편인 軍直仇味로 상륙하여 용장성의 배후와 측면에서 각각 공격해 들어왔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기습공격에 성안의 지휘부는 크게 혼란에 빠져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삼별초정권의 중심인물이던 배중손 그리고 승화후 온 등도 희생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로로 잡힌 채 일부만이 金通精의 지휘하에 진도를 빠져나와 최후의 후방기지 제주로 입거하게 된 것이다.

 몽고는 이 진도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위하여 사전 상세한 정보를 확보하고 면밀한 작전으로 삼별초군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싸움의 승리를 위하여 각종의 신무기를 본국에서 급히 들여왔으며, 그 중에는 새로 개발된 화약무기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鐵砲」라는 화약탄이 수년 후 일본정벌 때에 사용된 사실은 확인되어 있지만, 이미 이러한 무기는 진도 공격에서 먼저 사용되어 용장성내의 삼별초군을 더욱 혼란케 하였던 것 같다.300) 尹龍爀,<三別抄 珍島政權의 성립과 그 전개>(≪韓國史硏究≫84, 1994).
―――,<三別抄 抗蒙政權의 珍島抗戰>(≪朴秉國敎授停年紀念史學論叢≫,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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