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4) 삼별초의 대몽항전
  • (4) 삼별초군의 제주도항전

(4) 삼별초군의 제주도항전

 삼별초의 최후 거점이 된 제주도는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온 원종 11년 11월 개경에서 파견된 관군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확보해 놓은 지역이다. 김통정의 지휘하에 들어간 삼별초군은 먼저 방어시설의 구축에 힘쓰는 한편 제해권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아래의 기록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적(삼별초)이 이미 제주에 들어가서 內城과 外城을 쌓고 그 성이 험준하고 견고한 것을 믿고 날로 더욱 창궐하여 수시로 나와 노략질하니 해안지방이 숙연해졌다(≪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3년 6월 을묘).

 제주도에서의 삼별초의 방어시설은 내성에 해당하는 缸波頭城과 외성으로 추정되는 둘레 15리 규모의 토성이 중심이 되고 있다. 내성에는 관아와 중요 군사 시설이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같은 내외성의 구조는 아마 강도의 방어시설에서 착안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밖에 涯月木城과 해안 300여 리에 걸친 長城도 삼별초군에 의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들 유적의 연혁에 대하여는 앞으로 더욱 면밀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제주도의 삼별초군은 배중손을 대신한 김통정에 의하여 지휘되었으며, 진도가 여·몽군에 의하여 무너지자 남해도에 거점을 형성하고 있던 유존혁도 80척의 선단으로 제주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에 의하여 옹립된 승화후 온이 진도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에 정통 고려정부를 자임하던 권위는 위축되었다. 제주도의 삼별초는 현지 토착민들과의 관계를 고려, 제주에서 전통적인 권위를 유지해 오던 星主·王子의 인물들을 조정하여 대·내외관계에 이용한 것 같다. 그러나 정통성을 내세울 인물을 갖지 못하므로 군사적 측면 못지않게 정치적인 타격을 진도에서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삼별초의 항몽세력은 내륙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의 지리적 이점에 힘입어 방어시설을 새롭게 구축하고 지휘부를 재편하면서 점차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제주도에 입거한 원종 12년의 하반기에는 연안의 여러 섬에 출진하여 개경정부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였다. 이들 제주도의 삼별초세력이 회복된 군사력으로 남해안 등 연안의 여러 지역에 대하여 공세를 취하게 되는 것은 이듬해 3월 이후의 일이다.

 이들은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지역에 진출하여 개경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나포하기도 하고 전함을 불지르거나 개경에서 파견된 수령을 체포 혹은 사살하였다. 원종 13년 5월에는 전라도 古阜 해안에서 조운선 13척을, 6월에는 장흥·함평·해남·강진 등 서남해안지역에서 20척의 조운선과 미곡 3,200여 석을, 그리고 8월에도 전라도 연해에서 조운되는 미곡 800석을 빼앗아 갔다. 이처럼 조운선을 주요 공격목표로 삼은 이유는 자체 소요의 식량을 조달하는 동시에 개경정부에 대한 경제적 타격을 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주도의 삼별초세력은 전라도 연안해역에 출몰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서 원종 13년(1272) 하반기 이후 그 활동영역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그리하여 6월에는 태안반도의 安行梁을 지나 경기지역에 접근하기도 하고, 11월에는 몽고군이 주둔한 합포(마산)·거제 등지를 공격, 수십 척의 전함을 불태우고 몽고병을 포로로 잡는 등 전과를 세웠다. 9월에는 孤瀾島에서 전함 6척을 불사르고 충청도 홍주부사 李行儉과 結城·藍浦의 감무를 포로로 하였는가 하면, 11월에는 거제도에 들어가 현령을 잡았고, 安南(전주)都護府使 孔愉를 체포하기도 하였다.

 삼별초의 戰船들은 이 무렵 경기지역인 남양의 영흥도 부근까지 출몰하여 연해의 수령과 개경정부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 때 경기지역까지 삼별초가 이르자 도로가 마비되었고, 원종은 몽고 원수 忻都에게 병력을 요청, 궁궐을 수비하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삼별초는 제주도에 입거한 후에도 초기의 수습기간을 제외하고는 연해지역에 대한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고려의 관리, 병선, 몽고군 등에 대한 공격 목표를 선명히 계속함으로써 반정부·반몽고의 성격을 계속 유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삼별초에 대하여 몽고는 먼저 회유공작을 폈다. 그리하여 고려의 琴熏이 원종 13년 3월 초유사로 제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일행은 楸子島에서 억류되어 제주에는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삼별초가 진도에서와 달리 이들을 박대하고 아예 제주도에 들이지도 않은 것은 내부상황에 대한 정보의 유실을 우려한 점이 큰 것 같은데 이 점은 진도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은 것이었다.

 초유사의 파견이 실패하자 몽고는 개경에 있는 김통정의 친족을 회유에 이용하였다. 이에 따라 조카인 낭장 金贊 등 5명이 제주로 파견되었으나 삼별초는 김찬을 억류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처단해 버렸다. 곧 삼별초는 진도에서의 패전이 당시 몽고의 속임수에 넘어간 결과로 생각하였고, 따라서 몽고와는 일체의 관계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회유공작에 이은 무력동원은 그 다음의 순서였다. 이제 몽고는 제주도의 삼별초를 격멸하여 반몽세력을 일소하려 하였다. 일본에 대한 작전을 예정하고 있는 몽고로서는 삼별초의 진압이 우선적인 당면의 과제였다. 원종 13년 12월 몽고는 원종에 삼별초 공격을 위하여 군사 6천, 水手 3천을 조달케 하였고, 몽고도 증원군을 결정하였다. 작전의 시기는 진도의 경우와 같이 여름을 피하여 원종 14년 2·3월로 일단 예정되었다. 개경정부는 金伯鈞을 경상도 水路防護使에, 李信孫을 충청도 방호사에 임명함으로써 후방수비를 담당케 하고 김방경을 몽고 원수 흔도와 함께 출정케 하였다.

시 기 지 역 활 동 내 용 비 고
원종 12년
11월 중
서남해 여러 섬   개경정부에서 출륙을
우려
13년 3월 會寧郡(전남 장흥) 조운선 4척 탈취  
13년 5월 大逋(목포) 조운선 13척 나포  
耽津縣(강진) 焚掠  
경상도 정보 수집 활동 2인이 경상도에서 체
포됨.
13년 3∼5월 會寧·海際(함평)·海南
등 군현의 여러 섬
조운선 20척, 미곡 3,200석,
살해 12인, 포로 24인
3∼5월까지 전라도
서남부 연안지역에서
의 활동결과
13년 6월 경기 해안 6척이 安行梁을 지나 북상 개경에서 놀람
13년 8월 전라도 沿海 조운선 貢米 800석 탈취  
13년 9월 孤瀾島 전함 6척 소각, 船匠 살해,
洪州副使 李行儉, 結城·藍浦
監務 잡아감
 
13년 11월 安南都護府(전주) 府使 孔愉와 그 가족을 잡아감  
合逋(馬山) 전함 20척 소각, 몽고 烽卒
4명을 잡아감
 
巨濟縣 전함 3척을 태우고 縣令을
잡아감
 
靈興島(경기 남양만) 경기 연해지역 횡행 왕이 몽병 50기로
궁궐 숙위 요청
14년 정월 樂安郡 전함 10척이 침입  
合浦(馬山) 전함 32척을 태우고 몽명
10여 명 체포, 살해
 
14년 3월 耽津縣 防守散員 鄭國甫 등 15명
살해, 郎將 吳旦 등 11명을
잡아감
 

<표 1>제주도 삼별초의 활동

 진도작전에서 삼별초를 무너뜨렸던 김방경과 흔도가 이번에도 역시 연합군을 지휘하였다. 이들은 나주 潘南縣의 영산강에 집결하여 3군을 정비하고 출정하였다. 연합군의 병력은 전함 160척에 대략 1만여 명이었는데 (몽고군 2천·漢軍 2천·고려군 6천) 이들은 아마 4월 초에 여기에서 출발한 듯하며 바람과 파도로 인해 고전하다가 추자도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바람을 무릅쓰고 다시 제주로 쳐들어갔다.

 김방경 등이 이끄는 중군은 제주 동쪽 해안의 咸德浦(朝天邑)로 상륙하여 공격하였고, 함선 30척 규모의 좌군은 제주의 서부해안 飛揚島(翰林邑)에 상륙하여 바로 삼별초의 항파두성으로 쳐들어왔다. 다른 한 부대인 우군은 기록이 없으나 삼별초의 거성에서 가장 가까운 涯月방면으로 들어가 삼별초군을 끌어냄으로써, 비양도로 상륙한 좌군이 틈을 이용하여 항파두성으로 곧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합군은 화공으로 삼별초군을 제압하였는데 이 때에도 진도에서와 같이 몽고의 화기가 투입되어 크게 효과를 보았던 것 같다.

 삼별초의 수령 김통정은 70여 명의 휘하부장과 함께 산 속으로 피하였는데 잔류한 여·몽군의 수색에 의해 이들은 거의 체포되어 홍다구에 의해 처단되었으며 김통정은 자결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로써 40년에 걸치는 고려의 대몽항전은 한반도의 최남단 제주도에까지 파급되면서 종막을 고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에 있어서의 항몽세력은 거의 일소된 셈이었고 이후 고려의 몽고에 대한 附庸化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사실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尹龍爀>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