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 여·원관계의 전개
  • 1) 원의 간섭과 자주성의 시련
  • (1) 몽고제국 지배체제로의 편입과정

가. 몽고족의 고려지배방식

 몽고족은 고려가 그들의 세력권 안에 들어간 이래 20여 년간에 걸쳐 강압적인 방법으로 그들과 접경한 고려의 북부지역 및 남부의 일부를 빼앗아 그 1/3의 영역을 차지하여 고려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또 다루가치를 파견하는 동시에 군사를 주둔시켜 정치·군사적으로 고려가 더 이상 그들에게 항거할 수 없도록 하였다. 몽고족은 세계적인 제국의 건설을 추진하면서 제국 내에 편입된 여러 지역과 민족을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는 바,301) 高柄翊,<元과의 關係의 變遷>(≪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4), 390∼393쪽. 고려에 대하여 몽고제국은 복속국으로서 감독관을 파견하여 내정간섭을 하였으나, 독립국으로 온존시켜 지배층과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인정하였으므로 고려 왕조의 자주성은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었다.

 이처럼 고려가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기간에 걸친 항쟁 후에 스스로 귀부한 데다가,302)≪高麗史≫권 36, 世家 36, 충혜왕 복위년 윤6월 경인 및 권 108, 列傳 21, 金之淑. 남송과 대치하고 있었던 몽고로서도 고려의 남송과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또 고려를 이끌어 가고 있었던 무인세력을 위시한 지배층 및 기층민의 일부가 끝까지 몽고에의 완전한 귀부를 반대했던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태도때문에 몽고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고려를 그들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편입시키지 않고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되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고려가 몽고와의 전쟁 초기부터 文人 등을 내세워 몽고정부의 토대구축에 크게 기여한 耶律楚材·劉秉忠·史天澤·王鶚 등과 같은 중요한 인물들과 개인적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구사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303) 張東翼,<麗·元 文人의 交遊>(≪國史館論叢≫31, 1992), 226∼227쪽.

 그렇지만 고려 역시 여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복속에 따른 일정한 부담을 강요받았다. 곧 복속국들이 준수해야 할 의무로서 군장의 親朝, 자제의 入質, 호구의 編籍, 驛站설치, 助兵, 군량보조, 租賦의 수송 그리고 다루가치의 설치 등과 같은「六事」304)≪元史≫권 209, 列傳 96, 外夷 2, 安南.로 표현되는 부담이 강요되었다.305)≪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0년 8월 무오. 그러나 고려는 이를 대부분 수용하지 않아 몽고의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306)≪元高麗紀事≫世祖 中統 3년. 이러한 강요 가운데 고려의 자주적 발전에 가장 저해 요소로 작용한 것은 다루가치의 설치였다. 곧 몽고는 고려를 보다 효과적으로 예속하기 위해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내정간섭을 추진하였다.

 몽고의 다루가치는 여·몽전쟁 기간과 원종 초에 일시 고려에 파견되었으나, 뚜렷한 자취는 없었다.307)≪高麗史≫권 25, 世家 25, 원종 원년 8월 임자. 그러다가 원종 10년(1269) 무신집권자 林衍이 왕을 폐립시킨 일이 일어나자, 원종은 몽고의 세력을 빌어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 몽고는 이를 계기로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시키고자 군사적인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의 지배층을 회유·이간시켜 임연의 세력을 제거하였다.308) 張之翰,≪西巖集≫권 19, 趙璧墓誌.
姚燧,≪牧庵集≫권 22, 浙西廉訪副使潘公神道碑 및 권 24, 轉運鹽使曹公神道碑.
이 때부터 이후 충렬왕 4년까지 다루가치가 계속 파견되어 왔다.309) 池內宏,<高麗に駐屯した元の達魯花赤について>(≪滿鮮史硏究≫中世篇 3, 吉川 弘文館, 1963). 그 구성은 다루가치·부다루가치 그리고 經歷과 같은 하급관리 등으로 이루어졌고, 임기는 3년이었다. 이 때에 파견된 다루가치로 脫朶兒·李益·黑赤, 부다루가치는 焦天翼·周世昌·石抹天衢 등이 찾아지고, 그 외에 시기가 불명한 帖帖兀이 보이며, 경력으로는 張國綱 등이 있었다.

 이들 다루가치는 우선 고려의 몽고에 대한 제후국으로의 정착을 위해 종 래 고려왕실이 사용하고 있었던 관제·관명·작호 등에 대한 용어를 제후국의 그것으로 강등 조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고려인의 반몽고적인 행위를 규찰하고, 고려에 주둔한 몽고군의 침탈에 저항한 고려인의 治罪, 그리고 몽고군이 포로로 삼은 고려인의 쇄환 등과 같은 사무를 관장하였다.

 이러한 대몽고관계의 사무 외에도 다루가치는 고려인이 소지한 병기를 몰수하는 동시에 중국에서와 같이 몽고인과 군인 외에는 弓箭을 소지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고려군의 군사적 실패를 다스리는 등 국방에 관한 문제를 장악하였다. 또 고려의 관리에 대한 녹봉의 분급이나 국왕의 관료임명 등과 같은 고려의 민정과 관련된 내정까지 간섭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의 사회신분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고려 노비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몽고에서 실시되고 있던 법제를 실시하려고 하였는데, 이 문제는 고려의 國基와 관련된 것이어서 고려측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시되지 못하였다.310)≪高麗史≫권 108, 列傳 21, 金之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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