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 여·원관계의 전개
  • 1) 원의 간섭과 자주성의 시련
  • (2) 몽고제국 지배체제하의 고려왕조

가. 정동행성의 존재형태와 운영실태

 고려는 충렬왕대에 원 제국질서내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독립국으로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비해 독자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당시에도 인정되고 있듯이 고려왕실이 몽고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결과이다. 당대의 지성이었던 姚燧는 고려는 원과 혼인으로 맺어진 국가로서 원의 여타 속국과는 달리 독자적인 국가운영이 가능하여 국가체제의 정비, 관인의 선발 및 충원·刑賞·號令 그리고 征賦 등의 운영에 있어 독자성을 지니고 있어‘萬國 가운데 오직 하나의’독립국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또 虞集은 고려가 원과‘甥舅之好’를 가지고 있어 왕국이 관부를 설치함에 있어 원과 비슷하여, 여타 속국이 감히 이와 더불어 할 수 없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형편에 의해 고려는 중국의 옛 봉건국가에 비정되기도 하였다.312) 姚燧,≪牧庵集≫권 3, 高麗瀋王詩序.
虞集,≪道園類稿≫권 20, 送憲部張樂明還海東詩序.

 그렇지만 고려는 원 제국의 세력권 안에 안주했던 충렬왕 즉위년에서 공민왕 5년(1356)까지 80여 년간이나 원의 직·간접적인 압력을 받게 되었고, 그 압력의 주된 통로는 정동행성이었다. 정동행성은 처음에는 원의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되었지만, 일본원정이 단념된 이후에 다시 설치되어 고려의 자주적 발전을 억제하는 기관으로서 고려 말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시초는 충렬왕 6년 제2차 일본원정을 수행하기 위해 전방사령부로서 설치된 前期征東行省이었다. 이 전기 정동행성은 원의 東征事務 치폐와 관련하여 3차에 걸쳐 고려와 중국의 강남에 설치되었으며, 동정이 중단된 충렬왕 12년 정월 경에 폐지되었다.313) 北村秀人,<高麗における征東行省について>(≪朝鮮學報≫32, 1964).
張東翼, 앞의 글(1987).
제1차 정동행성이 설치될 때에 중국 강남의 慶元에 征日本行省이 따로 설치되었는데, 양자의 구분이 분명치 않아 정동행성이 정일본행성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견해도 있다(高柄翊,<征東行省의 硏究>,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出版部, 1970).
그 후 원에 의하여 중국에 설치된 행성들이 군사적 성격을 벗어나서 지방 행정기구로 그 성격을 전환해 간 추세에 부응하여 고려에도 내정간섭 기구로서 충렬왕 13년(1287) 다시 설치되었다.314) 정동행성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의 글이 있다.
高柄翊, 위의 글.
北村秀人, 위의 글.
丁崑健,<元代征東行省之硏究>(≪史學彙刊≫10, 1980).
張東翼,<征東行省의 硏究>(≪東方學志≫67, 1990;≪高麗後期外交史硏究≫, 一潮閣, 1994).

 정동행성의 설치 목적은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만주방면에서 일어났던 乃顔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원이 고려의 협조를 효과적으로 받아내기 위한 조처의 하나로 이해된다. 즉 이는 종주국인 원에 대한 고려의 예속적 지위를 명시하는 동시에 고려의 귀복을 요구하는 뜻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 후 정동행성은 원의 尙書省의 치폐에 부응하여 行中書省, 行尙書省, 다시 행중서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지만 기본적인 체제에는 큰 변화가 없이 몇 차례 운영상의 변화를 보이면서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다.

 원의 행성은 중앙의 중서성(都省)의 지휘를 받아 府·路(州)·縣의 3단계 지방 행정체제 위에 존재하는 중간단계의 행정기구로서 10여 개가 있었다. 이 체제는 중서성과 유사하나 한 단계 낮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기본 편제는 丞相(정1품, 1명)·平章政事(종1품, 1명)·右丞(정2품, 1명)·左丞(정2품, 1명)·參知政事(종2품, 2명) 등의 재상직, 郎中(종5품, 2명)·員外郞(정6품, 2명)·都事(종7품, 2명) 등의 左右司官, 그리고 掾史·蒙古必闍赤·回回令史·通事·知印·宣使 등의 실무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 省마다 차이가 있었다. 또 행성의 중요 하부기구로 檢校所·照磨所·架閣庫·理問所·都鎭撫司·儒學提擧司 등이 있었으나, 좌우사를 근간으로 하여 운영되었다.315)≪元史≫권 91, 志 41 上, 百官 7.

 이와 같은 윈의 행성체제하에서 정동행성도 그 외형적 체제는 여타 행성과 유사하였다. 이는 역대 행성관 임명의 사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곧 충렬왕 13년에서 고려 말까지 승상 이하 대부분의 행중서성관 및 하부기구의 관원명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 법제적 규정대로 관원이 임명되지는 않았다. 행성관 중 승상을 제외한 평장정사 이하 재상은 충렬왕 25년(1299) 이래 행성관을 증설할 때에만 보이고 있고 그것조차 인원수대로 임명되지 않았다. 행성의 근간이었던 좌우사관의 경우는 계속 임명되었고 이문소·도진무사·유학제거사 등에도 관원 임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검교소·조마소·가각고 등에는 임용사례가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 임용사례를 통해 정동행성은 외형적으로는 여타의 행성과 구조가 같지만 평상시에는 평장정사 이하 대부분의 재상들이 임명되지 않은 채, 행성의 실무 주축관서인 좌우사만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우사의 경우 원의 그것과 같이 宰屬署 또는 佐幕으로 불렸고, 관원 임용이 법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연사 이하의 실무관은 인원수대로 임명되지 않았다. 이처럼 좌우사가 기간체제만으로 운영되고 연사 이하 하급 관원이 제대로 충원되지 않았던 것은 정동행성이 원의 행성과 같은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문소는 행성의 법부로서 訊鞫事를 담당하는 관서로, 刑名과 決獄을 담당했는데, 정동행성의 경우 理問·副理問에 임명된 사례는 보이고 있으나 知事·提控按牘의 경우는 보이지 않아 법제대로 운용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진무사는 軍政司律을 맡아 군인 통솔에 관련된 관서로서 원수의 전략을 제장에게 연락하는 동시에 훈련·파병·순라 등을 장악한 기관이다. 정동행성 초기에는 合浦鎭邊萬戶府가 제대로 운영되었기에 이 관서가 어느 정도 기능했던 것 같지만 점차 유명무실한 관서가 되고 말았다. 유학제거사는 학교·제사·교양 등의 학교사무를 담당하였는데, 정동행성에서는 그 관원의 임명사례가 많이 보이고 있으므로 그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문서 관리를 맡은 검교소, 문서의 수발 및 대조, 교감을 맡은 조마소, 圖籍을 담당한 가각고 등의 경우, 조마 1명의 존재가 확인될 뿐 관서의 존재 및 관원의 임명사례가 보이지 않는 점을 볼 때, 이들 관서는 이렇다할 위치나 활동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외에 勸農使·醫學提擧司·諸軍萬戶府 등이 있었다고 하나 앞의 둘은 그 존재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고, 제군만호부는 정동행성과는 별개로 고려정부의 예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처럼 정동행성의 산하기관은 대다수가 유명무실하였고, 장관인 승상 예하에 좌우사를 주축으로 하여 이문소 및 유학제거사의 세 기관만이 실질적인 기능을 지니면서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인들은 정동행성을 통틀어「行省三所」라 불렀다.316)≪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및 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정동행성이 기간체제만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은 고려의 특수한 위치, 곧 독립된 藩國으로 독자적인 정부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위에 정동행성이라는 원의 지방조직이 중첩적으로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동행성은 고려의 국정을 총괄하지 못했고, 고려의 최고 정무기관인 僉議府가 치민·형정·수세 등을 독자적으로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정동행성은 원의 여타 행성과는 달리 국왕이 승상직을 항상 겸직했고, 여타 행성에서 불가능한 좌우사의 막료 및 제속사의 관료선발을 승상이 스스로 할 수도 있었다.317)≪元史≫권 91, 志 41 上, 百官 7. 그 결과 정동행성 예하에는 원과 같은 수많은 하부기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원과 같은 부·로(주)·현의 편성이 없었고, 지방행정을 꾸려나간 다루가치·提刑按察使 등의 외직이 없었다. 그래서 정동행성의 관직은 국왕을 제외하고는 증직으로 수여되지 않았고, 조세의 납부 및 둔전의 설치에 있어서도 예외적으로 존재하였다.

 이러한 존재형태로 인해 정동행성이 增置期를 제외하고는 명목상으로 존재했을 뿐이라는 견해도 제시되었다.318) 丁崑健, 앞의 글. 그러나 이는 원 행성과 비교한 정동행성의 형편을 개관한 것이고, 원의 압제의 경중과 고려의 내부적 상황이 중첩되면서 정동행성의 위치나 기능에는 몇 차례의 변모가 있었다. 연대기에 의하면 정동행성은 몇 차례에 걸쳐 치폐를 거듭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기구의 단순한 증감이나 치폐가 아니라 대내외적인 정세와 관련되어 있다. 내정 간섭 기구로서의 新行省이 설치된 직후에는 행성의 역할이 이렇다하게 부각되지 않아 어떠한 형태로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충렬왕 25년 이래의 행성관 증치로 행성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행성관 증치는 원이 충렬왕과 충선왕의 대립을 기화로 고려내정에 대해 강력한 통제와 간섭을 추진하려 한 데서 나온 것이다.319) 高柄翊, 앞의 글(1970), 200∼204쪽 참조. 곧 행성의 재상직에 원나라 사람을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려의 내정을 직접 간섭하게 하여 그 때까지 어느 정도 자주성을 띠고 있던 고려정부를 그들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행성관의 증치를 통한 원의 내정간섭은 고려인의 강한 반대를 받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원은 충숙왕대 이후 고려내의 정치적 갈등을 계기로 당시 좌우사를 중심으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행성은 또 한 차례 변모되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원나라 사람들이 행성의 산하기관에 파견되어 고려의 내정을 실질적으로 간섭하여 고려의 자주성을 크게 위축시켰다. 그러다가 원의 세력이 중원에서 점차 영향력을 잃기 시작한 공민왕 5년(1356) 이후에는 고려에서 반원 자주정책의 일환으로 정동행성의 산하기관 중 이문소를 위시한 많은 산하기관을 폐지하였다. 이 시기 이후의 정동행성은 고려정부의 영향 아래 좌우사·유학제거사의 두 기관을 중심으로 하여 對元·對倭의 외교관계 사무를 맡는 정도로 축소되어 고려 정부의 일개 관서로 변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정동행성의 시기적 성격 변모를 대체적으로 조감하면 다음<표 1>과 같이 크게 4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단계 初 期 段 階 增 置 期 左右司體制期 縮 小 體 制 期
시기 충렬왕 13년(1287)

충렬왕 24년(1298)
충렬왕 24년(1298)

충선왕 4년(1312)
충숙왕 8년(1321)

공민왕 5년(1356)
공민왕 5년(1356)

고려 말
성격 승상예하 고려인
행성관으로 구성
된 독자적 운영기
원인 재상파견에
의한 내정간섭이
심화된 시기
원의 강력한 통제
하에 좌우사를 주
축으로 한 행성 3
所 중심기
고려정부의 영향
아래 좌우사 중심
의 형식적 존재기

<표 1>정동행성의 변천

 이러한 4단계의 변천 속에서 정동행성은 처음부터 고려내에서 최고의 관부로 존재하여 원과 관계된 특정사무를 맡고, 국왕 부재시에는 權行省事가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기도 했지만, 국정전반을 모두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곧 정동행성은 평소에는 賀正·聖節 등에 원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대원사대를 포함한 양국간에 일어난 제문제 해결을 주로 담당하면서 고려정부와 별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양국간에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이를 주체적으로 담당하기도 하였다.

 원에 의한 행성관 증치는 표면적으로는 충렬·충선왕의 대립, 고려내에서의 권신의 발호 등을 해소한다는 것을 내세웠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들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원이 고려를 복속시킨 이래 개혁한 내용은 고려를 제후국으로 강등하면서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미진했던 분야를 포함하여 행정·조세·신분제 등 사회전반을 그들의 지배에 적합하게 변경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을 추진한 주체가 정동행성이었다는 것은 그 설치목적이 고려를 통제·감시하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준다. 그렇다고 해서 정동행성이 원의 입장만 관철시키려는 것은 아니었으니, 평장정사 闊里吉思에 의한 극심한 통제 속에서도 행성은 고려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다. 耽羅萬戶府의 설치, 고려 권신들의 불법 규찰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므로 정동행성의 주된 기능은 고려의 통제·감시에 있었지만 그러한 속에서도 고려측의 이익을 어느 정도 대변·보호해 주려는 면도 있었으므로 행성의 존재가치는 양국의 이익을 절충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점은 충렬왕 말년 이래 원나라 서울에서 충렬왕과 충선왕의 대립이 다시 일어나자, 원이 정동행성을 중심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일단 충렬왕을 귀국시켜 행성을 진무케 한 데 비해, 충선왕은 자신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행성관의 증치를 요구했고, 그 기도가 성공한 후에는 오히려 증치의 철폐를 요구했던 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도 충숙왕 8년(1321) 이후에는 크게 변화되었다. 원에서의 제위 교체로 인해 충선왕에 대한 대우가 지금까지와는 상반된 쪽으로 진행되어 왕이 吐蕃으로 귀양가게 되는 등 원의 간섭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충선왕의 조카로서 입양된 瀋王 暠320) 姚燧,≪牧庵集≫권 3, 高麗瀋王詩序.
瀋王의 기원에 대해서는 연대기에 분명히 나타나지 않아, 충렬왕이 세자로 北京에 있을 때 瀋陽王으로 책봉되었다는 견해도 있다(金九鎭,<元代 遼東地方의 高麗軍民>,≪李元淳華甲紀念論叢≫, 敎學社, 1986, 480∼483쪽).
의 고려왕위 찬탈 기도 및 立省論의 대두를 계기로 지배층의 분열이 일어나 왕권이 크게 추락하였다. 그 와중에서 충숙왕은 장기간 원에 구류되었고, 그 자신이나 그의 후계자가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해 왕권의 안정을 기할 수 없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사정으로 인해 정동행성의 위치와 기능은 점차 변모되어 명실공히 고려를 대표하는 권력기관으로 되어 갔다. 곧 지금까지 고려국왕에게 위임되었던 행성관의 선발방식이 원나라 吏部에서 직접 선발·파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원나라 사람이 좌우사 이하 이문소·유학제거사 등의 행성 3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치도 매우 높아졌다. 이 시기에 강화된 행성관의 위치는 이전과는 달리 국왕 부재시에 행성관이 권행성사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음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원의 강력한 압제에 대해서는 행성이 전면에 나서서 이를 해결하였으니, 고려인의 군기·궁전 지참 및 기마금지 등에 대한 반대 및 이의 관철, 충혜왕의 복위 및 석방 추진 등을 주도적으로 꾸려 나간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과정에서 행성은 고려의 모든 관부 위에 군림하게 되어, 고려의 백관이 행성관에게 저자세를 취하여 중요사를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다음으로 이러한 정동행성을 움직여 갔던 행성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고려왕이 당연직으로 겸직했던 승상직은 충렬왕 13년(1287) 신행성의 설치에 따라 충렬왕이 평장정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음해에 좌승상으로 승진되어 정동행성의 장관이 된 이래 그의 후계자들도 이 직을 계속 맡게 되었다. 원은 고려왕이 嗣位할 때 고려국왕의 책봉과 동시에 행성 승상직을 함께 임명하였으므로 고려국왕을 보통「國王丞相」이라고 불렀다.321) 李穀,≪稼亭集≫권 9, 送白雲賓還都序. 이는 藩國으로서의 고려 및 원 지배질서 내의 행성을 동시에 대표하는 것으로서 원의 세력이 중원에서 쇠퇴할 때까지 고려왕의 원 및 고려 내에서의 위치 구축에 큰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승상체제하의 역대 정동행성 관원들을 행성의 변천과 연결지워 시기적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초기단계에서는 충렬왕이 승상직만 띠고 있으면서 평장정사 이하 재상직은 임명되지 않은 채 하급관청에만 관원이 임명되었다. 그 대표적인 존재로는 좌우사에 安珦·朴全之, 유학제거사에 안향·崔伯倫, 이문소에 金富允·鄭仁卿, 도진무사에 張舜龍·李之底·元卿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행성의 일반행정 및 유학진흥을 맡은 좌우사 및 유학제거사의 관원은 재상가의 자제로 禿魯花를 거친 인물들이 많았음에 비해, 형정과 병권을 맡은 이문소와 도진무사의 관원은 고려왕의 시종인 동시에 몽고어에 능하고 특히 원 세조에게 알려진 인물로서 한미한 가문 출신이 많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감시·감독기관인 정동행성 내에서조차, 행성관 서로를 상호 견제시키기 위한 원의 조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증치기에는 원과 고려의 이해관계와 중첩되는 속에서 몇 차례에 걸쳐 행성관이 증치되었다. 먼저 재상직에 임명된 인물로는 氵闊氵闊出·闊里吉思·別速台徹里帖木兒(이상 평장정사)·哈散·耶律希逸·林元·郭貫(이상 좌우승)·王思廉·忽璘(이상 참지정사) 등이 있고, 하부기관의 관원으로는 金台鉉·權溥·鄭瑎(좌우사관·유학제거사관)·元善之(도진무사관) 등이 있다. 이들 재상 중,「總督軍馬」의 직책을 띤 채 행성을 총괄했던 평장정사는 모두 몽고인으로 짐작되는데, 대부분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알 수 없지만 활리길사322)≪元史≫권 134, 列傳 21, 闊里吉思.로 대표되는 것과 같이 몽고 핵심 지배층의 후예로 무장적 성격을 지닌 채 내외의 요직을 거친 능력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해「裁成庶務」를 담당한 부재상 좌우승 및 참지정사는 주로 한인출신인 것 같고, 文翰과 吏治를 겸비한 학자적 성격을 지닌 당대의 지성들이었다. 이처럼 무장적인 평장정사, 학자적인 좌우승 및 참지정사의 두 부류가 정동행성에 파견되었다는 것은, 원의 고려 통치방식이 무단적 압박과 유술을 내세운 회유의 두 가지 형태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던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들 행성관은 활리길사처럼 고려의 사정을 잘 아는 인물 및 야율희일·왕사렴과 같이 재임된 경우가 주목된다. 이는 원이 고려의 사정을 잘 인지하고 있는 인물을 파견하여 고려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 재상의 행성 지배하에서 행성의 실제 사무를 담당했던 하부기관의 행성관들은 모두 과거 급제로 입사한 문한으로서 국왕의 측근세력이 되어 충렬·충선왕대의 개혁 및 수구의 정치적 변동 속에서 양편을 오가면서 銓注權을 장악하여 자신과 일족을 현달시킨 인물들이었다.323) 張東翼,<高麗後期 銓注權의 行方>(≪大丘史學≫15·16, 1978). 또 이들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필가였는데, 이로 인해 국왕의 入元隨從臣 또는 入元使臣으로 선발되어 국왕 및 원 세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정동행성관으로 발탁되었다.

 좌우사체제기는 고려왕의 王位重祚로 왕권이 추락한 데다가 附元輩의 立省策動으로 대원관계가 극히 복잡했고, 원도 내정간섭을 강화하여 좌우사 및 이문소를 위시한 하부기구에 많은 元人 및 원 관료를 파견하였던 시기이다. 그래서 행성관의 임명도 승상인 고려왕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다른 어떤 시기보다 행성관에 임명된 인물이 많이 보인다.

 이들의 출신 성분은 크게 고려인, 고려인 출신의 원의 관료, 그리고 원인의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세 부류는 시기별·관직별로 전시기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먼저 고려인 출신 중 대표적인 인물의 출신 성분을 살펴보면 金永煦·洪鐸·奇轍·辛裔·李公遂 등과 같이 원 황실 및 원 관료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 朴遠·崔安道·尹桓·康允忠·裵佺·金鏞 등과 같이 고려국왕 및 원 공주와 관련을 가진 인물, 盧濟·趙萬通 등과 같은 부원배 및 이와 관련된 인물, 許伯·李仁復·鄭䫨 등과 같은 국내외에 문명을 떨친 인물, 그리고 元忠·元松壽와 같은 관직을 세습한 인물 등이었다. 또 고려인 출신의 원 관료로서 행성관에 파견되어 온 인물은 廉悌臣·洪彬·韓帖木兒不花(孝先)·李穀·李壽山 등이 있다. 이들은 황제의 숙위 및 제과 출신의 원 관료로서, 관직을 역임하는 한 과정으로서 정동행성관에 임명·파견되었다. 이는 당시의 정동행성관이 원의 관료체계 속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 준다. 그리고 원인 출신 행성관의 경우, 좌우사와 이문소의 행성관으로는 烏赤·兀赤·阿都剌·岳友章·奉議·石抹完澤·石抹時用·蔣伯祥·揭以忠·胡鉦 등이 있다. 이들의 출신 성분 및 정동행성관을 역임한 이후의 경력은 구체적으로 찾아지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당시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사회적 위치나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았고, 문필 능력이 거의 없었던 인물이었음을 반영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유학제거사의 관원인 周長孺·敖止善·安成周·張淵·朱德潤·黃可任·王三錫·白雲賓·盧欽 등은 대체로 출신 성분이 확인되는데, 백운빈과 노흠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의 강남 출신이다.

 이 시기에는 원의 간섭이 노골화하고 있었으므로 행성관 임명에 나타난 특징은 고려왕의 뜻과 관계없이 원의 이부에서 행성관을 직접 임명하는 추세였고 이로 인해 원인 및 고려인 출신의 원 관료가 많이 임명되어 왔고, 유학제거사에는 고려인이 배제되고 거의 원인이며 이들 중 강남 출신의 유학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또 이 시기 행성관 중 고려인의 경우는 그 이전의 시기와는 달리 문한·이치의 능력과 관계없이 임명되었고, 그 임명조차 원과의 직·간접적인 연줄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원인의 경우는 유학제거사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출신 성분 및 역할이 미미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정동행성관은 정동행성과 원의 관직을 번갈아 역임하고 있는데, 이는 정동행성 자체가 원의 여타 행성과 거의 비슷한 위치로 변모해 갔음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축소체제기에는 李仁復·李穡·申仁適·唐誠 등의 행성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재임명 및 원 제과에 급제하여 원에 지명도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능은 事大吏文을 담당하는 정도여서 활약이나 위치도 그 이전의 그것과는 비교될 정도가 아니었다.

 다음으로 각 단계별로 행성관의 활동상을 정리하여 보기로 하자. 초기단계에서는 행성관의 활약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원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지 않았고, 고려에서 행성제가 아직 정착되지 못했던 결과로 보여진다. 증치기의 원인 재상들은 짧은 재직기간으로 인해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지만 원의 고려지배라는 파견목적에 부응한 강경·온건의 양면적 시책을 펴려 했던 것 같다. 그 중 활리길사에 의한 개혁은 제도적인 여러 가지 조치를 통해 고려왕조를 원의 속국으로 정착시켰으나 노비제도 개혁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해 고려의 전통적 지배질서를 완전히 부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좌우사 이하 행성관은 원인 재상에 눌려 활약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이에 고려인 고위관직자가 임명되어 고려내에서의 비중은 높아졌다.

 그러다가 좌우사체제기에 이르면 행성 각사의 사무분장 및 운영이 원 본국의 행성과 어느 정도 유사하게 이루어졌다. 곧 이 시기의 좌우사는 대원외교 및 원 관료들에 관한 사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민·사법·조세 등 대내적인 문제에까지 깊숙히 참여하여 실질적인 내정간섭기관으로 변해 갔다. 그러한 형편에서 행성의 중심 하부기구인 좌우사에 속한 원인 행성관의 활동은 고려사회에 부정적으로 기능한 것이 많았으나, 고려 출신의 원 관료는 고려측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사법기관인 이문소 관원의 활동은 좌우사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지만, 그 활동상은 대체로 원의 입장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324) 理問所의 위치와 성격에 대해서는 高柄翊, 앞의 글(1970) 참조. 이러한 좌우사체제기의 행성관의 활동을 통해 볼 때, 이 시기 행성의 기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행성은 번국으로 떨어진 고려에 부과된 여러 가지 압제와 각종 요구를 일차적으로 담당하였고, 대원 사대외교의 창구인 동시에 원의 일방적인 요구를 완충시키고 양국간의 중대사 발생시에는 고려측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또 고려왕실로 하여금 지배층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해 주는 한편으로 본연의 사무를 넘어서서 고려의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역기능적 면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편 학교기관인 유학제거사의 관원들은 대부분 원나라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출신지·師承 등을 미루어 볼 때「修己」를 중심으로 한 북방 성리학자와「窮理」를 중심으로 한 남방 성리학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 양 계통의 유학자들이 함께 파견되어 왔으므로, 이들에 의해 남과 북, 두 계통의 성리학이 동시에 고려에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축소체제기에는 하부구조가 거의 폐지되고 좌우사·유학제거사만이 명목상으로 존속하여 고려정부에 예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행성관의 실질적인 활동이 거의 없었고, 행성 자체가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

 끝으로 정동행성 및 행성관에 대한 고려정부측의 자세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 초기단계의 행성에 대한 고려측의 자세는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이는 원의 여타 행성에 비해 독립 인정, 행성관의 독자적 임명, 조세 납부 예외 등과 같은 우대조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이 행성관의 증치를 통해 내정간섭을 강화하려 한 충렬왕 24년(1298)을 기점으로 하여 행성은 고려측의 강한 반발을 받게 되었고 그 후 고려측의 자세는 긍정·부정의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긍정적인 인식은 국왕의 경우 승상직 임명을 통해 원의 위세를 빌어 자신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려 했던 점에서, 지배층의 경우는 군왕의 전제나 권신의 천단을 행성의 힘을 빌어 견제하려 했던 점에서, 그리고 강남출신의 유학자를 통해 성리학적 문풍을 진작시키려 기도한 점 등에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인식은 극히 한정적이었으며, 행성이 끼친 부정적인 측면 및 인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려인의 행성에 대한 자구적인 대처로는 그 주체인 원제국을 상대로 한 대외적 대응과 행성·행성관의 시책에 대한 대내적 대응의 두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주로 행성관 증치와 立省 논의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후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에는 크게 세 유형의 대응이 있었다. 첫째는 행성 및 행성관이 원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의식·형법·노비제 등을 위시한 여러 사회제도에 대해 원과 같은 지배질서를 적응시키려 하는 데 대항하여 고려의 전통적 지배질서를 온존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이는 현실적 형편에 의해 그들의 요구에 직접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으므로 소극적으로 그 조치를 받아들이다가 시세의 형편을 보아 가면서 환원 조치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둘째는 행성 및 행성관의 불법·월권적인 행위에 대한 반발로서, 이는 불법을 막아 민생을 안정시키고 지배층의 권익을 옹호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 역시 직접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원의 권위를 받은 우회적인 방법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지만 행성관의 불법이 점차 고려정부의 지탱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에 이르자, 고려측의 반발도 직접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충목왕대의 整治都監에 의한 行省 3所의 폐단시정으로서, 비록 소기의 목적을 관철시키지는 못했으나 이를 통해 축적된 고려측의 반발력이 공민왕대의 행성개혁으로 이어졌다. 셋째는 행성 및 행성관의 강력한 위치를 완화시키기 위해 고려왕에게 허락된 행성관의 추천권을 통해 고려측의 유리한 인물의 임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노력을 들 수 있다. 이는 행성관의 임명에 원 및 元 婦寺들의 영향력이 크게 대두된 좌우사체제기에 주로 나타났다. 곧 원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고려인 출신의 원 관료는 물론이고 부원배조차 행성관으로 추천하여, 이들을 통해 원의 과도한 압제와 수탈을 감소시켜 고려왕조의 이익을 보장받으려 했다.

 이처럼 행성에 대한 고려측의 대내적 대응방법은 전반적으로 소극적이었다. 이는 원의 무력적 압제에 의해 속국으로 전락한 당시의 형편이 일차적인 요인이었겠지만,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대다수 지배층의 의지 결여 및 현실안주적인 태도에도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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