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대몽항쟁 및 뒤이은 번국으로의 전락 과정에서 여·원간에 수많은 인적·교류가 있었다. 먼저 원종 10년(1269) 고려의 세자(충렬왕)가 원 세조의 딸과 혼인하기로 결정한 이래, 고려의 역대 왕들은 세자로서 혹은 왕으로서 원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원 왕실의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구체적인 각 왕들의 혼인관계는 다음과 같다.356) 高柄翊, 앞의 글(1977), 426∼427쪽.
충렬왕 〓 忽都魯揭里迷失(세조의 딸, 齊國大長公主)
충선왕 〓 寶塔實憐(세조의 長孫인 晋王의 딸, 薊國大長公主)
충숙왕 〓 亦憐眞八刺(세조의 아들인 營王의 딸, 濮國長公主)
金童(세조의 종손인 魏王의 딸, 曹國長公主)
伯顔忽都(家系不明, 慶華公主)
충혜왕 〓 亦憐眞班(鎭西武靖王 焦八의 딸, 德寧公主)
공민왕 〓 寶塔失里(魏王 孛羅帖木兒의 딸, 魯國大長公主)
이러한 양국 왕실의 혼인관계는 약 1세기 동안 계속되어 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및 사회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몽고 공주와 고려왕의 여러 次妃사이에 왕에 대한 애정 문제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원의 황실이 親庭으로서 간섭하는 경우가 많아 정치적 소용돌이가 자주 일어났다.
한편 원의 공주들이 고려로 시집옴으로 인해서 양국 사이의 인적·물적 교류도 많아지게 되었다. 곧 원 공주들이 올 적에는 많은 일행을 데리고 왔는데, 공주의 시중을 드는 私屬人인 怯怜口들이 공주의 시중을 드는 가운데 고려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 중 일부는 여·원 양국 왕실의 총애를 받아 재상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원 공주들은 고려에 와서도 그들의 고유한 생활방식을 지켜 몽고식의 시설과 기물들이 고려의 궁중에서 널리 쓰이게 되어 몽고식 생활방식도 퍼지게 되었다. 게다가 고려의 왕들이 원에서 생활하면서 몽고식의 변발 및 의복 등을 행하게 됨에 따라 일반 관리들도 뒤따라 행함으로써 생활양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왕실과의 교류 이외에도 양국의 정치적인 밀접성으로 인해 수많은 원나라 사람들이 고려에 왔는데, 그 중 사신·군인 등은 수시로 파견되어 많은 민폐를 끼쳤으나, 이들은 체류기간이 길지 않아 문화적으로 큰 영향은 없었다. 이에 비해 고려의 내정간섭을 위해 파견된 다루가치, 정동행성의 관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고려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많을 때는 수백 명에 달하기도 하였는데, 장기간에 걸쳐 고려에 체류하면서 고려인과의 교유 및 혼인을 통한 인적 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가지로 고려에 영향을 미쳤다. 그 외 원의 역대 왕들은 사신을 보내어 고려의 명산 대찰에서 기도하고 복을 빌게 하는 경우도 많았고, 金字經·銀字經 등의 寫經을 만들어 가기도 하였다. 또 원의 정치적 문제로 왕족들이 유배되어 일족을 거느리고 탐라나 大靑島에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 밖에 승려들의 내왕도 많아 중국 및 티베트의 승려도 많이 왔는데, 특히 원 공주들은 티베트 승려들을 초청해 와서 각종 불교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몽고인·중국인·아랍인·인도인 등을 위시한 수많은 이민족들이 고려에 진출하여 개성을 위시한 주요 지방에 널리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에 유행하였다는 雙花店이라는 가사는 개성에 回回人이 가게를 열고 있었던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이러한 원나라 사람들의 고려 진출에 비해 고려인의 원 진출은 더욱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고려의 대몽항쟁 및 뒤이은 번국으로의 전락 속에서 수많은 고려인이 원에 진출하였기 때문인데 이들은 포로·투항민·유민·숙위·공녀·환관·원 제과 출신 등의 부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357) 이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 글이 있다.
柳洪烈,<高麗의 元에 대한 貢女>(≪震檀學報≫18, 1957).
勞延煊,<論元代高麗奴隷與媵妾>(≪慶祝李濟先生七十歲論文集≫, 1986).
金九鎭,<元代遼東地方의 高麗軍民>(≪國史館論叢≫7, 1989).
張東翼,<元에 진출한 高麗人>(≪民族文化論叢≫11, 嶺南大, 1990;앞의 책).
먼저 포로는 규모면에서 원 진출인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그 실제 숫자도 수십만 명 이상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몽고에 끌려간 이후의 실상에 대한 자료가 없어 그 구체적인 삶은 알 수 없다. 단지 몽고인들의 정복전쟁 과정에서의 여타 정복지의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대다수가 영구히 공사노비(驅口)로 전락되어 궁중·京外 各司 및 군대에 예속되어 관노가 되거나, 전쟁에 참여한 諸王·諸將·군인 등에 분속되어 사노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속하에서 그들의 일부는 노예시장에서 매매되기도 하였고,358) 赤⻏經,≪陵川集≫권 10, 高麗歎. 일부는 工部 예하의 諸局에 소속되어 수공업에 종사하였을 것이지만, 그 대부분은 농업노동에 종사하며 극히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359) 이에 대한 예로는 溟州吏 金遷의 어머니를 들 수 있는데, 그녀는‘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방아를 찧는’열악한 생활조건 아래에 놓여 있었다(≪高麗史≫권 121, 列傳 34, 金遷). 이들에 대한 쇄환은 정부차원에서 극히 형식적이고 소극적으로 진행되어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가족에 의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쇄환도 여러 가지 제약이 수반되어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투항민은 대몽항쟁중에 주로 서북계 지역에서 많이 일어났는데, 이는 최씨무신정권에 의해 소외된 토착 지배층이 중앙정부로부터 심하게 수탈당하고 있던 기층민을 선동하여 적에게 투항한 것이다. 또한 투항민은 몽고족의 대고려 침략정책 및 요동지방의 농경민 확보를 위한 유인책에 의해서도 발생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遼陽과 瀋陽을 중심으로 한 요동지방에 산재하면서 독자적인 생활권을 형성하여 농경생활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 투항민 세력을 바탕으로 하여 홍복원 및 王綧의 후예가 安撫高麗總管府·高麗女眞漢軍總管府를 중심으로 遼陽行省의 핵심적인 지배세력이 되어 고려정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360)≪元史≫권 59, 志 11, 地理 2, 遼陽行省 瀋陽路 및 권 154, 列傳 41, 洪福源. 그 외 투항민으로 두각을 나타낸 존재로는 원의 侍衛親軍指揮使가 되어 眞定府에서 확고한 터전을 마련한 李伯祐가 있다.
유민은 여·원 양국이 강화를 체결한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그 주된 요인은 고려 국내정치의 불안정과 이에 따른 기층민의 생활 불안정이었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雙城總管府 지역을 위시하여 요양·심양·개원로·북경 등지로 분포되어 있었다. 고려정부는 이들의 진출 방지 및 그 쇄환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들의 생활상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고려인 지배층을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역의 유민들은 고려 말 영토수복의 인적 터전을 마련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숙위의 경우는 韓永·崔安道·廉悌臣·鄭仁·趙忽都不花·金伯顔察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은 숙위출신 및 그들의 후예들로서 모두 몽고황실의 숙위로 출발하여 황실의 제반 관리직을 거쳐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 중 한영과 김백안찰의 경우 燕京 관할내의 宛平縣 池水村에 위치한 高麗莊에 근거를 두고 고려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서 고려인의 결집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다.361) 李穀,≪稼亭集≫권 2, 京師金孫彌陀寺記 및 권 12, 韓永行狀.
蘇天爵,≪滋溪文稿≫권 17, 元故亞中大夫…韓公神道碑銘.
공녀의 경우는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몽고로부터 받은 가장 치욕적인 압제의 하나로서, 종실을 위시한 지배층으로부터 일반 양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인들이 원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지배층 출신의 공녀들은 후비 및 고급관인의 배우자가 되어 그들의 소생이 公卿大臣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만,362) 그 대표적인 예로 仁宗妃 達麻實利皇后, 明宗妃로 추측되는 伯顔忽篤皇后, 順帝妃 完者忽都皇后 그리고 晋國夫人 金長姬 등을 들 수 있다. 양인 출신의 경우는 대부분이 궁중의 시녀로서 일생을 보냈을 것이며, 그 중 일부는 주점에서 술시중을 들어야 하는 형편으로 전락하였던 것 같다.
환관의 경우는 원에 진출한 고려인 중에서 가장 현달하여 권세를 누린 층이었다. 이들은 원 황실의 총애를 통해 원의 재상의 지위에 오른 경우도 많았으며, 여·원 양국의 국정운영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려의 수많은 어려움을 해결해 준 인물도 많았다.363) 이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方臣祐·李淑·高龍普·朴不花 등을 들 수 있다. 제과 급제자의 경우는 원 제과의 13회 응시에 각각 1∼2명이 합격하여 총 약 18명이 급제하였다. 대부분 급제 성적이 좋지 않아 요양행성 및 그 예하의 지방관에 임용되었고, 성적이 좋아 文翰官에 임명된 인물은 李穀·李穡·賓于光 3인뿐이었다. 그리나 이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동행성의 郎中職에 머물고 말았는데, 이는 고려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몽고 지상주의하에서 漢人과 南人도 겪었던 일이었다. 그 외 고려인의 이름을 중원에 떨친 인물로는 병부낭중에 오른 崔耐卿과 浙西道廉訪僉事가 된 李仲善이 있다.
이처럼 원에 진출한 지배층은 세력과 분포가 원 중앙정부내에서는 크지 않았지만, 요양에서의 홍씨·왕씨세력 및 진정부의 이씨세력처럼 특정지역에서 세력을 떨친 경우도 있었다. 원 조정내에서의 고려인 세력은 특정시기(순제 때), 특정분야(궁중내)에서는 매우 강했으며, 특히 대고려정책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려왕조의 존립문제까지 좌우할 수 있었다. 또 이들 중 일부는 원 황실과 밀착해 권력을 천단하여 원 말기의 국정문란을 유발시켜 후세인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이들 고려인들은 자신의 고려정부에 대한 적대 또는 우호적인 자세에 관계없이 당시 정신적인 구심점이었던 불교에 대하여는 불교의 사원건립, 주지 초빙, 신도의 결집 등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고려정부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인물도 많아, 이들에 의해 고려왕위의 계승, 행성관의 증치, 입성론 등이 제기되어 고려정부를 시련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또 많은 인물들이 원에서 현달하였으나, 대부분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려에서 어떠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였는데, 그것은 주로 왕위 계승전에 투영되어 많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원에 진출한 고려인에 대해 몽고인들은 고려의 문물과 함께 유학자·기술자 등을 칭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몽고지상주의에 입각하여 멸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가운데 고려인의 사회적인 위치는 당대의 법제적 규정집에 나타나는 것처럼 독립된 민족의 범주로서 다루어져 한인보다 우대되는 경우도 있었다.364) 張東翼, 앞의 책(1994), 191쪽. 그리고 이러한 고려인은 원이 중원에서 실세함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온 경우가 많았으나 일부는 도적이 되거나 유민이 되어 떠돌아 다녔으며 또 중국에 잔류한 고려인들은 중국인으로 완전히 동화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