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 여·원관계의 전개
  • 2) 북방문제
  • (1) 심양로의 심왕

(1) 심양로의 심왕

 瀋陽路는 元代에 만주 지방에 설치된「7路·1府」의 하나로서 몽고에 투항한 고려 軍民을 통솔하던 관부였다. 처음에는 洪福源이 그 중심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나중에 고려의 왕족이 瀋陽王에 봉해져서 고려 군민을 지배하였다. 요동의 중심지였던 심양과 遼陽에는 고려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원은 이 지역에 심양로를 설치하고, 또 심양왕을 따로 두어 고려의 투항민을 다스리게 하였다.「瀋王」은 심양왕을 줄여 일컫는 말이며, 또 요양과 심양을 줄여서 遼·瀋 지역이라고 통칭하기도 하였다.

 충렬왕 22년(1296) 원은 遼陽故城과 瀋州(심양)에 瀋陽路安撫軍民總管府를 설치하고 요양고성을 치소로 삼았다. 이 심양로의 관할 하에는 總管 5인, 千戶 24인, 百戶 25인을 두었고, 管下 民戶는 5,183호였다.374)≪元史≫권 58, 志 11, 地理 2, 瀋陽路.

 원에서는 심양로의 고려인들에게 요동지방의 토지를 주어 이를 경작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몽고인은 유목민족으로서 농경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또 원은 정책적으로 심양왕과 고려왕을 대립시켜 고려의 세력을 견제하였으므로 심양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려왕을 모함하거나 고려의 왕위를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따라서 고려 말엽에 이르러 심양로의 심왕은 고려의 북방문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두통꺼리였다.

 몽고가 고려를 침략할 때 고려의 북계는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왜냐하면 서북면 지역이 지리적으로 요동 지역과 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가 몽고에 대항하여 40여 년 동안 항쟁할 즈음 서북면 일대에 살던 고려와 군민들이 거의 대부분 몽고군에게 피랍되어, 요동의 요양과 심주 등지에 억류되었던 것이다.

 고종 18년(1231) 몽고의 撒禮塔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여, 북계의 40여 성을 공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몽고의 1차 침입이다. 이 때에 이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 군민들의 대다수는 몽고군에게 포로가 되거나 투항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북계 40여 성을 점령한 살례탑은 자칭「權皇帝」라 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다스렸는데, 이에 대하여≪高麗史≫의 기록을 보면, 당시 살례탑은 安北都護府에 주둔하고 이를 ‘元帥府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몽고에서 고려 땅에 설치한 최초의 관부가 되는데 살례탑이 돌아간 뒤에도 몽고에서는 이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지 아니하고, 達魯花赤〔다루가치〕를 두어 통치하였다. 원래 다루가치란 원나라의 諸路總管府와 府·州·縣의 민정을 맡아보던 掌印辦事의 장관을 말한다.375)≪黑撻史略≫,“管民曰 達魯花赤”.
≪二十二史答刂記≫권 29,“達魯花赤掌印辦事之長官”.

 한편 몽고의 1차 침입 때 서북면 麟州都領 洪福源이 솔선하여 그 주와 현의 민호를 거느리고 몽고군에 투항한 후 살례탑의 앞잡이가 되어 당시 고려에 투항하지 않았던 고려인들을 공격하였다.376)≪元史≫권 154, 列傳 41, 洪福源. 몽고군이 개경까지 진격하자 홍복원은 阿兒禿과 함께 고려 고종을 설득하였고, 그 결과 같은 해 12월에 고려에서 淮安公 侹과 軍器監 宋國瞻을 원수부의 행영에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였다.377)≪元史≫권 208, 列傳 95, 外夷 1, 高麗.

 몽고의 침략은 어디까지나 물화와 人物의 약탈에 있었으므로, 고려측에 대하여 막대한 양의 金銀·衣服·馬匹·水獺皮 등과 3천 명의 남녀 볼모를 요구하였다.378)≪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18년 12월 갑술.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러한 원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 줄 수가 없어서, 그 수량을 줄이고 또 시일을 끌었다.

 고종 19년(1232) 정월 몽고군은 일단 철수하였으나, 점령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지 않고 개경과 북계의 여러 점령 지역에 각각 72인의 다루가치를 두고 이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그 해 8월 고려는 몽고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원에서 파견한 다루가치를 모두 살해하여 버렸다.379)≪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19년 8월 기유.
池內宏,<蒙古の高麗征伐>(≪滿鮮史硏究≫中世篇 3, 吉川弘文館, 1963), 7쪽.

 이러한 고려측의 반발에 직면하여 서북면의 토호 홍복원은 서경의 토호들과 손을 잡고 서북면 40여 성의 유민들을 招撫하여 몽고에 귀부시켰다. 또 몽고에서도 다시 살례탑을 보내어 고려를 제2차 침입하였다. 이 때 홍복원은 管下의 民戶를 징발하여 살례탑의 몽고 군사와 힘을 합쳐 고려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380)≪元史≫권 154, 列傳 41, 洪福源.

 이처럼 홍복원이 몽고에 귀부하고 고려를 배반한 원인은 그 관하 민호(下戶)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려는 성종 이후 지방 호족의 세력을 억제하고 그 관하 민호를 해체하여 고려의 호적에 편입하고 編氓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몽고에서는 토호들이 관하 민호를 데리고 투항한 지역에 대해서는 다루가치를 보내어 간접 통치하였고, 그 투항한 토호에게 그 관하 민호를 그대로 점유하고 그 지역을 다스리는 권리를 보장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고에 대항하는 토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토벌하여 그 일족을 멸망시켜 버렸던 것이다.

 고종 19년 12월 살례탑이 處仁城에서 金允侯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 몽고군은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원은 이미 몽고에 항복한 서북면 지역을 홍복원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381) 위와 같음. 일단 몽고군이 철수하자, 이듬해 고려에서는 宣諭使를 보내어 홍복원을 초유하였으나, 그는 고려의 선유사를 살해하고 고려에 불복하였다. 당시 고려의 실권을 잡았던 崔瑀가 家兵 3천 명을 서경으로 보내어 홍복원을 토벌하니, 그는 그 관하 민호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東京(遼陽)과 瀋州(瀋陽) 일대로 도망가서 정착하였다.382)≪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洪福源.

 이 때 몽고에서는 홍복원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金符를 내려주고, 요·심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의 투항민을 통할하게 하였다. 당시 원에서는 고려의 투항민이 거주하던 요양과 심주 등지에 심양로를 설치하고 홍복원을「高麗軍民萬戶」의 관직에 임명하여, 고려에서 투항한 모든 군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처음에 홍복원이 거느리고 몽고에 귀부한 민호가 1천 5백 호였는데 또 고종 25년(1238) 5월에 趙玄習과 李元祐가 고려에서 투항할 때 거느리고 온 고려인 2천여 명도 東京에 거주시켜 홍복원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다.383)≪元史≫권 208, 列傳 95, 外夷 1, 高麗. 그 뒤에도 원은 고려에서 투항해 오는 고려 군민들을 모두 심양로의 홍복원의 관하에 편입하였으므로, 그가 통치하던 고려군민은 4, 5천여 호가 넘었으리라 추측된다.

 원은 정책적으로 고려의 투항민을 요양과 심양 등지의 東京路에 분산·거주시키고, 성곽을 쌓고 그 지배체제를 고려인으로 구성하였다. 이 때 고려인을 다스리는 관부를 설치하여 임시로 요양고성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요양고성은 요·금대에 동경로의 首府였던 요양의 옛성을 말하는 듯하다. 이처럼 원의 동경로의 요양과 심양 일대를 지배하던 동경총관은 고려의 홍복원이었다. 고려 원종 2년(1261) 원의 세조는 요양의 관부를 安撫高麗軍民總管府로 고치고 홍복원을 총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원에 완전히 항복하자 홍복원 등의 서북면 토호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졌으므로 원에서는 도리어 그 세력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원은 요·심 일대의 고려의 투항민을 홍복원에게 관찰하도록 하는 것보다는 고려왕조를 대표하는 인물에게 그 통치권을 맡기려 하였다.

 원종 4년(1263) 고려에서 質子로 王綧을 원나라에 보내자, 원에서는 질자 왕준을「高麗軍民總管」에 임명한 뒤, 홍복원의 관하에 있던 고려 군민 2천여 호를 빼내어 통솔하게 하고 심주를 다스리게 하였다.384)≪元史≫권 58, 志 11, 地理 2, 瀋陽路. 이로써 고려의 투항민의 세력은 둘로 나뉘어, 요양고성에 거주하는 자들은 홍복원의 지배를 받고 심주(심양)에 살던 자들은 왕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홍복원과 질자 왕준 사이에는 세력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홍복원이 고려에서 귀순하는 인민을 몰래 병합하려고 획책하다가 도리어 원의 미움을 사 죽임을 당했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385)≪元史≫권 154, 列傳 41, 洪福源.

 홍복원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죽은 뒤 그의 둘째 아들 洪茶丘가 그 직위를 세습하였다. 홍다구는 아버지 홍복원처럼 원에 종군하여 용맹을 떨쳤기 때문에 원의 세조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그 역시 심양에 거주하던 영녕공 왕준과 권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원종 4년(1263) 홍다구가 왕준이 자기 자신의 品秩이 元의 皇太子와 같다는 말을 한다며 원의 세조에게 참소하니 세조는 크게 노하여 왕준이 거느리던 병마를 빼앗고, 대신 홍다구로 하여금 그가 통솔하던 고려 군민을 관령하게 하였다.386)≪高麗史節要≫권 18, 원종 4년 3월. 이로써 홍다구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세조로부터 그 아버지 홍복원의 직함을 세습하여 귀부한 고려군민을 관령하는 총관이 되었다.387)≪元史≫권 154, 列傳 41, 洪福源. 홍다구는 원종 12년(1271) 裵仲孫의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원종 15년 원이 일본을 정벌할 때도 造船軍民을 감독하는 총관이 되어 활약하였으므로, 원으로부터 龍虎衛上將軍·征東行省右丞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뿐만 아니라 충렬왕 13년(1287) 원의 乃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다시 遼陽等處行尙書省右丞의 관직을 받았다. 그 후 홍다구의 관직은 그 아들 洪重喜, 손자 洪滋에게로 계승되었다. 이들 홍씨세력은 심양로에 귀부한 고려군민을 관령하는 총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심 일대의 고려인·여진인·중국인을 총관하는 만호 겸 안무사였다.

 원에서는 다시 홍다구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심왕제도를 두었는 바, 심왕은 고려왕의 친자 가운데 원나라에 머물러 있던 인물로 지명되었다. 영녕공 왕준이 왕의 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심양왕으로 처음 봉해진 사람은 원종의 아들 충렬왕이었다. 심왕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를 보면, 충렬왕 즉위년(1274)에 처음으로 심왕으로 있던 충렬왕이 고려의 왕으로 부임한 기사가 나온다. 아마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에 머물면서 세조의 딸인 齊國大長公主와 결혼하고 부마로서 宿衛하자 원에서 심왕으로 봉한 것 같다. 심왕은 원의 관제에서 보면, 제 1등급의 金印·獸紐에 속하는데, 금인·수축의 43王府 가운데 심왕은 39위이고 고려국왕은 41위였다. 그러므로 심왕이 고려국왕보다 오히려 작위가 높았다.

 충렬왕은 처음에 심왕으로 불리다가 다시 심양왕으로 통칭되는 것을 보면, 심왕은 심양왕의 줄인 말이 분명하다. 심왕과 고려왕은 모두 충렬왕 계통에서 갈려져 나간 후손이었다. 江陽公 王滋는 충렬왕의 장자였으나 원의 세조의 친딸인 제국공주에게서 태어난 동생 충선왕에게 고려국왕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세자로서 원나라에 머물던 충선왕도 심양왕으로 봉해졌다가 고려국왕에 즉위하였다. 심왕과 고려왕의 두 직함을 가졌던 충선왕은 심왕의 지위를 그의 조카 王暠(完澤禿)에게 넘겼는데 그는 강양공 왕자의 아들이었다. 이 때부터 심왕은 延安君 왕고를 거쳐 그 손자 篤朶不花(脫脫不花)로 이어졌으며, 고려국왕은 충숙왕의 계통으로 이어져 공민왕에까지 이르렀다.

 심왕과 요양고성은 총관 홍씨세력은 고려 군민의 관할권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충선왕이 심왕과 고려왕을 겸임하자, 홍복원의 손자 홍중희가 원 조정에게, “한 몸이 양국의 印章을 겸하여 차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반대하니388)≪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5년 7월 기사. 충선왕은 동왕 4년(1312)에 고려국왕의 자리를 장자 충숙왕에게 넘기고, 4년 후에는 심왕을 큰조카 연안군 왕고에게 넘겨 주었다.

 충렬왕 22년(1296) 원에서는 요양고성과 심주에 있던 두 관부를 하나로 병합하여「瀋陽等路安撫軍民總管府」로 만들어 요양고성을 치소로 삼았는데,389)≪元史≫권 154, 列傳 41, 洪福源. 이것이 바로 원대의 심양로이다. 관할 호수는 5,183호였는데, 심양로의 호수는 모두 고려의 투항민이었다. 이리하여 초기에 서북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몽고의 1·2차 침입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혀 요양과 심양 등지의 심양로로 강제로 이주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러한 심양로의 고려 군민의 관할권을 심양왕에게 맡기게 되자, 심양왕과 고려 국왕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고려 왕위 계승에 대하여 심양왕이 왕권을 주장하자 더욱 복잡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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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역대 심(양)왕과 고려왕의 관계
<표 1>역대 심(양)왕과 고려왕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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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왕과 고려국왕은 대등한 지위를 가졌지만, 원의 종실 서열상으로 심왕이 고려국왕보다 오히려 높았던 것도 문제였다. 심왕 왕고는 충선왕을 끊임없이 무고하여 곤경에 빠뜨렸다. 왕고는 충숙왕 7년(1320)에 원의 仁宗이 죽고 英宗이 즉위하자, 고려국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하여 그 일파 曹頔, 蔡河中 등과 더불어 온갖 참소를 다하였다.390)≪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그 때“國人의 대다수가 그에게 마음이 쏠렸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심왕의 기반이 심양로에 살던 고려 군민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충렬왕 28년(1302) 12월에 심왕파는 요양행성의 관원을 시켜 원의 성종에게 청하기를,“요양행성과 본국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이를 遼陽府의 옛성에 합병하여 1行省을 새로 세워 그 관부를 東京에 옮기도록 하자”고 하였는데, 이것은 요양의 고려 군민이 거주하던 성을 중심으로 고려 본국과 요동지방을 합친 새로운 行中書省을 세워서 그 실권을 심왕파가 잡으려던 계책이었다.391)≪高麗史≫권 32, 世家 32, 충렬왕 28년 12월 임오.

 충숙왕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할 때 심왕파는 원의 太師 伯顔의 도움을 받아 고려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백안의 실각과 어사대부 脫脫의 도움으로 충렬왕이 무사히 즉위할 수가 있었다.

 공민왕 때 고려 출신 奇皇后 일파는 공민왕을 폐하고 심왕 篤朶不花를 고려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독타불화가“내가 어찌 숙부의 왕위를 빼앗을 수 있겠는가”라고 사양하니, 기철은 德興君 塔思帖木兒를 왕으로 추대하였다.392)≪高麗史≫권 91, 烈傳 4, 宗室 2. 그러나 이러한 음모는 공민왕의 배원정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또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할 때에도 심왕 독타불화를 고려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이처럼 심왕(심양왕)과 홍씨세력, 그리고 본국 고려국왕과의 삼각관계에서 볼 때 고려의 왕위 쟁탈전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심왕의 세력은 요·심의 고려 군민세력과 결탁하여 그 在地的 기반을 가지고 고려 왕권에 도전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심양로에 고려 군민을 지배하는 통치권을 둘러싸고 다시 심왕과 홍씨세력은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고려 말에 배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은 印璫과 李成桂 등을 보내어 요·심 지역을 토벌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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