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 여·원관계의 전개
  • 2) 북방문제
  • (2) 동녕부

(2) 동녕부

 원종 11년(1270) 2월에 龜州都領 출신의 서북면 병마사 崔坦 등이 중앙의 권신 林衍에게 반기를 들고 北界의 54성과 西海道 6성을 포함하는 60여 성을 몽고에 귀속시키자, 원의 세조는 이것을 심양행성에 소속시켜 동녕부를 설치하였다.≪元史≫지리지를 보면, 원의 至元 6년(1269)에 최탄, 李延齡, 玄孝哲 등이 부·주·현의 60여 성을 가지고 귀부하였으므로 지원 8년(1271) 8월에 서경을 고쳐서 동녕부라고 하였다고 한다.393)≪元史≫권 59, 志 11, 地理 2, 東寧路. 이로 보아 처음에 동녕부를 서경에 설치하여 북계와 서해도의 60여 성을 관할하게 하였음을 알 수가 있는데, 자비령으로 선을 그어 그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서북면 토호 출신 최탄과 이연령 등이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든 것은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출륙할 때 崔竩를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임연 일파가 원종을 폐위하였기 때문에, 이에 반발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서북면 토호들은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그들 토호의 관하 민호를 지배하는 권력을 강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몽고의 1차 침입 때 몽고측에 투항한 홍복원이나 후기의 최탄·이연령·현효철·韓愼 등이 모두 서북면 토호로서 하나같이 고려의 중앙 정부에 반항하여 몽고에 투항하였던 것은 서북면 지역이 중앙정부에 반항적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최탄은 귀주도령이었으며, 이연령은 三和縣 출신이었고, 현효철은 延州 출신이었는데 모두 서경 일대의 도령으로서 관하 민호를 거느리고 있었다. 국내의 토호나 변경상의 여진추장에게 주던 土官職인 고려의 도령은 중앙의 무반과는 달리 허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진군에 편입된 민호들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도령은 중앙의 권력과는 항상 대립하거나 충돌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러한 토호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을 취하였고, 이 때문에 토호세력은 필연적으로 중앙에 대하여 반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고측에서는 일단 몽고의 영역으로 편입된 지역에 대하여 이러한 토호들의 자치를 인정하여 그 예속민의 지배를 오히려 정당화시켜 주었고, 한편으로 諸路總管府와 부·주·현의 총관·만호·천호·백호 등의 관직에 이러한 토호들을 임명하였다. 다만 몽고에서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그 민호의 숫자를 파악하고 대장을 만들어 조세와 공물을 부과하는 데 그쳤다.

 고려 권신 임연 일당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그 동생 安慶公 淐을 옹립하자 서북면 토호 최탄·이연령·현효철 등이 이에 반기를 들고 서경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중앙에 대항하였다. 한편 임연 일당은 몽고에서 돌아오던 세자를 중도에서 납치하려 하였으나, 세자는 靜州(오늘의 義州)의 官奴로부터 이 사실을 듣고 婆娑府(九連城)에서 다시 燕京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원의 세조는 임연 일당이 원종을 폐위한 사실을 알고 사신 斡脫兒不花를 보내어 폐위한 죄를 힐책하는 한편 군대를 파견하여 고려를 응징하려고 하였고 이에 임연 일당은 하는 수 없이 원종을 복위시켰다.

 이처럼 고려의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원종 10년(1269) 10월에 서북면병마사 영기관 최탄·한신, 삼화현인 전교위 이연령, 定遠(定州) 都護郎將 柱文庇, 연주(寧邊)사람 현효철 등이 임연 일당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龍岡·咸從·三和 등의 인민을 불러모아 함종현령 崔元을 죽이고 椒島에 들어가 分司御史 沈元濬·監倉 朴守奕 등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394)≪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0년 10월 경해. 최탄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으로 들어가 서경유수 崔年, 판관 柳粲, 사록 曺英紱 등을 죽이고 龍州(龍川)·靈州(義州)·鐵州(鐵山)·宣州(宣川)·慈州(慈山)의 5고을 수령을 살해하였다. 이리하여 서북면의 여러 성이 모두 최탄의 세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395)≪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0년 10월 경자.

 최탄은 몽고에 투항하려고 하여 몽고사신 脫朶兒를 만나 서경을 비롯하여 북계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서해도 6성을 모두 몽고에 바치고 귀부할 뜻을 표명하는 한편, 이연령을 몽고에 보내어 고려를 공격하겠다고 공언하고 몽고군 3천 명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원의 세조는 서경 54성과 서해도 6성의 군민을 보호하겠다는 내용의 조서를 내리고 동경(遼陽)에 주둔하던 몽고병 2천 명을 보내어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원종 11년(1270) 정월에 최탄은 서북면 토호세력과 몽고군 2천 명을 거느리고 임연 일당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다시 복위한 원종은 최탄 등의 행위를 蒙古 都堂에 항의하였다.396)≪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1년 정월 정축. 그 결과 원의 세조는 최탄 등이 임연 일당을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원의 세조는 최탄과 이연령에게 금패를 내려주고 현효철과 한신에게는 은패를 내려주어 그 공로를 포상하고, 자비령을 경계로 하여 이 지역을 동녕부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최탄 등을 동녕부 총관으로 삼아 이 지역의 민호를 관할하게 하였다.≪고려사≫세가에 보면, 동녕부의 개설시기는 원종 11년(1270) 2월로 밝혀져 있다.

 충렬왕 원년(1275) 원에서는 동녕부를 승격시켜「東寧路總管府」로 개칭하고 이를 원의 요양행성에 소속시켰으며, 錄司事를 설치하고 그 가운데 최탄 일당에게 투속하지 않은 북방의 靜州·義州·麟州·威遠鎭을 떼어내어 요동의 婆娑府에 소속시켰다.397)≪元史≫권 59, 志 11, 地理 2, 東寧路. 그 밖에 자비령 이북을 떼어내어 원에 붙일 때에 최탄 등에게 투속하지 않은 지역의 인물을 강제로 이에 포함시켰다. 지역은 銀波莊·三進江과 殷栗·谷州(谷山)·遂安(遂山)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원종 12년(1271) 7월 고려는 이들의 환부 교섭을 시작하여 충렬왕 4년(1278) 8월에 곡주·수안·은률의 인물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해 10월에 이 지역의 인물들을 환부 받았다. 원종의 뒤를 이은 충렬왕은 동녕부를 고려에 환부시켜 줄 것을 원에 간청하였는데, 충렬왕 16년(1290) 3월에 원나라는 동녕부를 폐지하고 고려에 서북면 여러 성을 환부하였다.398)≪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16년 3월 정묘. 이 때를 기준으로 하여 동녕부가 고려에 완전히 환부되었다고 본다면, 결국 동녕부는 약 20년 동안 존치되었던 셈이다.

 고려에 환부된 여러 지역의 토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고려에서는 대장군, 장군 등의 토관직을 수여하였으나 한신·현효철 등 일부 세력만이 고려에 복속하였을 뿐이었고, 최탄 등의 대다수 서북면 토호들은 원에 그대로 귀속하였다. 이 때에 고려에 반기를 든 최탄 등의 토호들은 그 관하 민호를 거느리고 요양행성의 요·심 양지역으로 옮겨 갔다.399)≪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崔坦. 그런데≪고려사≫나≪원사≫를 보면, 동녕부라는 칭호가 그 이후에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동녕부가 고려에 환부될 때에 최탄 등의 서북면 토호들이 그 관하 민호들을 이끌고 원의 요양행성에 투항하여 동녕로를 개설하여 독립된 세력으로 존속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충렬왕 16년 동녕부가 고려에 환부된 다음에도 동녕로는 그대로 요양행성의 7路의 하나로서 존치되어 동녕부 유민을 관할하였다.≪원사≫지리지를 보면 동녕로 관하에 3府·21州·12縣·13鎭을 두었는데, 모두 고려의 북계와 서해도의 지명이다. 이것은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된다.400)≪元史≫권 59, 志 11, 地理 2, 東寧路.≪고려사≫를 보면 우왕 2년(1376)에“동녕 등지에서 환부한 백성들이 요양에서 저자를 이룰 정도로 많았다”라고 하여, 동녕부의 유민들이 요양지역에 많이 살았던 것을 보여준다.≪요동지≫를 보면 명나라 초기에 동녕부를 설치할 때 동녕부 지역에다 東寧·女直·南京·淮陽·草河의 5千戶所를 두고 각각 그 인민을 다스리게 하였다.401)≪遼東志≫권 1, 遼陽. 이 때 동녕은 고려의 서북면 출신의 유민을 가리키고, 여직은 원대에 요양로에 살던 여진을 말하며, 남경은 두만강 북쪽 局子街 부근을, 회양은 고려의 동북면 吉州를, 초하는 鳳凰城의 북방 초하 상류의 草河城을 가리키는 것이라 추측된다.402) 和田淸,<明初の滿洲經略>(≪東亞史硏究≫滿洲篇, 東京, 1955). 이로 보아 원대의 동녕부의 유민들이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대의 남만주지역을 遼陽·東寧이라고 일컬었던 것도 동녕부 지역이 이처럼 넓었던 것을 의미한다. 원대 동녕부의 治所가 있었던 지역은 확실치 않으나,403) 池內宏, 앞의 글, 215쪽. 동녕부의 유민이 집단적으로 많이 거주하던 지역에 그 치소를 설치하였다고 생각되므로 요·심 일대가 동녕부가 아니였던가 추측된다.

 공민왕은 배원정책을 추진하여 기씨 일족의 세력 근거지를 토벌하기 위하여 동녕부를 공격하였다. 기철은 동녕부를 대표하는 세력으로서 요양에 거주하였다. 東寧府同知 李吾魯帖木兒(李原景) 등이 그 막하로서 압록강 중류의 亏羅山城(兀刺山城)에 웅거하여 고려의 원정군에 대항하였다.404)≪高麗史節要≫권 29, 공민왕 19년 정월 갑오. 공민왕 19년(1370) 정월에 동북면병마사 이성계가 기병 5천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黃草嶺을 넘어 압록강 중류에 우라산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이성계는 우라산성을 평정하고 원의 소속 민호 3백여 호를 항복받았다. 이리하여 동으로 黃城에서 서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압록강에서 북으로 동녕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고려 유민들이 모두 본국으로 귀속하여 왔다.

 또 같은 해 8월에 이성계와 서북면 상원수 池龍壽, 부원수 楊伯淵 등이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 지역을 공격하여 기씨 일파 등 舊元의 잔당을 무찔렀다.405)≪高麗史節要≫권 29, 공민왕 19년 12월 병진. 이 때 고려의 군대는 동녕부의 근거지 遼城(요양성)을 공격하여 기철의 아들 奇賽因帖木兒 등은 놓쳤으나 나머지 일당을 모두 사로잡았다. 요양을 정복한 고려 군사들은 요·심 일대에 사는 동녕부의 고려 군민들에게“요양은 본래 우리 나라 國界이다”라고 회유하고, 요·심 지역에 사는 고려의 군민들을 수습하여 고려 유민 2천 3백 호를 본국으로 귀환시켰다.406)≪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12월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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