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 여·원관계의 전개
  • 2) 북방문제
  • (3) 쌍성총관부

(3) 쌍성총관부

 雙城總管府는 원대 고려 동북면 지방에 설치된 몽고의 관부였다. 이는 동녕부와 달리 약 1세기 동안 존속하여 고려의 동북면 주민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말하자면, 동녕부가 그 관할 영역을 고려에 환부한 후에도 그 지역 출신 유민들을 통할하는 관부를 요양·심주 지역에 계속 존치시켰던 데 비하여, 쌍성총관부는 그 관할 영역과 지역 주민을 아울러 지배하였던 것이다. 원래 쌍성은 고려의 동북면 和州(永興)를 말하는데, 화주 이북의 15주를 그 관할 아래 두었다.407)≪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東界.
≪世宗實錄地理志≫권 156, 咸吉道.

 고려의 동북면은 원래 여진의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지역이었다. 고려에서는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千里長城을 쌓았는데, 천리장성은 서쪽으로 압록강 어귀에서, 동쪽으로 定州의 都連浦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정주는 변경에 위치하여 고려 동북면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예종 2년(1107) 12월에 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에도 고려의 군사들이 관문을 나가서 여진의 葛懶甸 지역을 정벌하고 9성을 구축하였다.408) 金九鎭,<公嶮鎭과 先春嶺碑>(≪白山學報≫21, 1976).

 희종 7년(1211) 금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 추장 耶律留哥가 반란을 일으켜 몽고의 징기스칸에게 투항하자, 고종 원년(1214) 금의 요동 선무사 蒲鮮萬奴가 이를 토벌하려다가 대패하였고 그 이듬해 금의 동경(요양)이 함락되었는데, 포선만노는 여진족을 이끌고 갈라전 지역으로 들어와 東眞國을 세웠다.409) 池內宏은 輝發河 상류에 있는 房州부근의 山城子를 동녕부로 비정하였다(<金末の滿洲),≪滿鮮史硏究≫中世篇 1, 吉川弘文館, 1937).

 그런데 거란족의 일부 세력이 그 추장 야율유가에게 반기를 들어 내분이 일어났고 몽고의 징기스칸이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토벌하였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義州·西京 등지를 침입하였다. 고려의 장수 金就礪가 거란군을 原州에서 대패시키니, 거란족은 대관령을 넘어 동북면의 登州(安邊)·咸州(咸興) 지역으로 들어갔다.410) 箭內瓦,<蒙古の高麗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4, 東京, 1923). 한편 징기스칸은 고종 5년(1218) 哈眞과 札刺를 보내어 갈라전의 동진국을 정벌하여 포선만노의 항복을 받았다. 그 해 가을에 몽고 군사 1만 명과 항복한 동진국 군사 2만 명이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한다고 성언하고 고려의 동북면 국경으로 남하하여, 和州(永興)·猛州(猛山)·順州(順川)·德州(德川)의 4성을 공격하여 거란적을 격파하였다.411)≪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5년 12월 기해. 이 때 고려의 동북면 지역에 들어와 있던 몽고군은 동진국을 앞세워 고려의 동북 지역의 여러 성을 공격하고, 또 고려 조정에 사자를 보내어 공물을 요구하였다.

 몽고군은 동북 만주지역에서 거란적을 소탕하고 두만강 내외 지역에 살던 여진족들을 동진국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412) 箭內瓦,<蒲鮮萬奴事跡考>(≪史學雜誌≫21, 1910). 이러한 몽고의 동진국과의 관계는 후일 쌍성총관부가 설치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를 침입할 때 몽고에서는 동진국의 여진족을 동원하여 그 침략의 앞잡이로 이용하였다. 이에 대응해 고려에서는 화주·定州·고주(高原)·등주 등지의 여러 성을 동계의 방어선으로 삼아 몽고와 여진의 연합군과 대결하였다. 이 때 동진국의 본거지는 갈라전 지역이었는데 두만강 내외 지역에 살던 여진의 오랑캐와 우디캐를 그 세력하에 두었던 듯하다.

 고종 12년(1225) 정월에 몽고사신 著古與가 압록강을 건너다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몽고에서는 먼저 동진국으로 하여금 고려의 동계 방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종 14년 9월에 동진국의 군사들이 정주와 長州를 침입하였을 때,413)≪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14년 9월 임오. 고려에서는 3군을 보내어 이를 격퇴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참패하였다. 고립무원이 된 동계의 和州·長平鎭 등의 여러 성들은 동진국 여진의 침입을 받았고 변방 장수들이 토호와 민호들을 격려하여 이에 대항하여 싸웠다.

 같은 해 11월에 동진국의 군사들이 화주를 침입하자, 金利生이 북계의 고려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화주의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여진군을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414)≪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14년 11월 기축. 그 다음해 고종 15년 7월에 동진국의 군사 1천여 명이 장평진에 와서 주둔하자, 고려에서는 3군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였다. 이러한 싸움은 몽고군이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이전에 고려가 침입한 동진국의 여진군에 대항한 싸움이었는데, 몽고의 고려 침략을 위한 전초전의 성격을 띠었다고 볼 수가 있다.

 고종 18년(1231) 9월에 몽고 원수 살례탑이 대규모의 몽고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 북계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서북면의 귀주와 서경으로 진격하고 安北城(안주)에다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이 때 동진국의 여진군은 동북면을 침입하여 화주의 토호인 宣德都令 등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415)≪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18년 10월 신축.

 이처럼 몽고군이 서경·개경으로 남하하자, 동북면 지역에서는 동진국의 여진군이 德源의 龍津鎭과 鎭溟城을 함락시키고, 고종 23년(1236) 8월에 영흥의 輝德鎭과 靜邊鎭을 점령하였으며, 고종 36년(1249) 9월에는 東州(철원)까지 진출하였다.416)≪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22년 9월 병자·고종 23년 8월·고종 36년 9월 기사. 그러나 동북면의 화주·고주·정주·등주 등의 큰 성들은 동진국의 군사들에게 함락당하지 않고 버티었다.

 고종 19년 6월에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한 다음해 동북면의 여러 성들도 몽고와 여진이 해전에 약한 것을 이용하여 그 근거지를 섬으로 옮겨서 대항하였다. 이 때 동북면의 여러 성들은 함흥으로부터 동쪽으로 3리 떨어진 무인도 松島417)≪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5년 12월 병자.
≪世宗實錄地理志≫권 155, 咸興府.
를 비롯한 동해안의 猪島·竹島로 근거지를 옮겨서 대항하였는데, 고종 45년(1258) 12월에 동진국의 수군이 송도의 고려 전함을 불태워서 고려 사람들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이처럼 전쟁이 장기화되자, 식량이 부족하고 민심이 이반하여 고려의 군민들이 동진국의 병사와 몽고군에 대항하여 버티기가 어려웠다. 이리하여 토호들 가운데 고려를 배반하고 몽고에 투항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몽고의 散吉大王과 普只의 官人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종 45년 12월에 옛 화주의 땅에 와서 주둔하고 토호들을 초무하니, 용진현 사람 趙暉와 정주 사람 卓靑이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몽고에 바치고 투항하였다. 그 경위를 살펴보기로 하자.418)≪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5년 12월 기축.

 ≪高麗史節要≫를 보면, 몽고의 산길대왕이 몽고군을 이끌고 동북면 일대에 침입하였을 때 동북면병마사 愼執平은 고주·화주·정주·장주·의주·문주 등의 15주에 거주하는 고려 군민들을 저도로 옮겼으나, 저도의 성이 크고 사람은 적어서 수비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다시 15주의 사람들을 죽도로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죽도는 너무 좁고 또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옮겨가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신집평이 강제로 사람을 몰아 옮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망을 가 죽도로 옮겨간 사람은 열에 두세 명에 불과하였다.419)≪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5년 10월. 죽도로 이주한 고려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고려 조정에 식량을 요청하고, 한편으로 다른 도에서 식량을 운반해 오도록 독촉하였으나, 식량이 모자라 굶주렸다. 그리하여 고려 군민들의 불평이 심해지고 군사들의 수비도 해이해지자 이 틈을 타서 조휘와 탁청 등이 삭방도의 등주·문주 등의 여러 성에서 온 토호들과 모의하여 몽고병을 몰래 끌어들여, 동북면병마사 신집평과 등주부사 朴仁起·화주부사 金宣甫 및 京別抄 등을 죽이고, 드디어 高城을 공격하여 집들을 불태우고 인민들을 살륙하고 약탈하니 사람들이 몽고에 투항하였다.

 이처럼 화주 이북의 여러 고을이 몽고에 내부하니, 몽고에서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으로 삼고 탁청을 천호로 삼았다고 한다.420)≪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5년 12월. 이것이 곧 쌍성총관부가 설치되는 기원이다.

 화주에 설치된 쌍성총관부는 그 관할영역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후일 공민왕 5년(1356) 7월에 고려에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을 때, 화주·등주·정주·장주·예주·고주·문주·의주의 8주와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의 여러 성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421)≪高麗史節要≫권 26, 공민왕 5년 7월. 쌍성총관부의 관할지역은 화주 이북, 정주 이남의 여러 지역으로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처음에 15주의 고려 군민들을 거느리고 저도·죽도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모두 이에 포함되었던 것 같다.

 쌍성총관부에 거주하던 민호는 고려인과 여진인이 뒤섞여 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려의 동북면 일대에 살던 동여진인은 이미 금이 건국하기 전부터 다수가 고려에 귀화하였으며, 또 금·원대를 통해서 여진인의 상당수가 고려 영내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지역은 오늘날의 함흥평야 일대로서 비옥한 농경지였으므로 여진이 남하한 목적은 평야지대에 정착하여 농경을 하기 위해서였다.

 동진국은 포선만노가 죽은 뒤에 와해되어 원의 개원로와 哈蘭府 水達達路 등으로 개편되었는데, 쌍성총관부는 개원로에 속하였다. 몽고와 고려의 관계가 정상화되자, 고려에서는 쌍성총관부에 억류된 고려 인물을 추쇄하였다. 고려인의 추쇄는 고려 측에서 원의 中書省·遼陽行省·開元路 등을 통하여 4, 5차례 행하여졌는데, 토호가 소유한 민호와 강점한 민호를 일일이 호적대장을 점고하여 밝혀내기도 하였다.422)≪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6년 7월 정묘.

 쌍성총관부는 토호 세력인 조씨·탁씨 그리고 이씨 세력들이 각각 총관과 천호의 직위를 세습하면서 그 관하 민호를 지배하였다. 원에서 조휘에게 준 총관의 직위는 그 후손들에게 세습되었으며, 천호의 직위도 마찬가지였다. 토호와 관하 민호의 관계는 혈연적인 관계가 많았으나, 같은 혈족이 아닌 민호를 강점하여 관하 민호로 편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개 혈연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지만 單弱한 민호를 토호들이 강점하여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토호와 관하 민호는 사적으로 주종관계를 형성하여 군사적인 구실과 경제적인 부담을 동시에 책임졌다. 대개 각 호에서 正軍 1인을 차출하여 토호들의 사병 노릇을 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병을 家別抄(Gabeci)라고 하였다. 또 그 나머지 민호들은 전지를 경작하거나 또는 우마를 방목하여 그 일부를 조세의 형태로써 호족에게 공납하였다.423) 金九鎭,<麗末鮮初의 豆滿江流域의 女眞分布>(≪白山學報≫15, 1973).

 쌍성총관부도 동녕부와 마찬가지로 원의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므로 쌍성총관부의 총관과 천호들은 각기 원에 일정한 세곡을 부담하는 것 외에는 정치·경제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고려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쌍성총관부로 도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에서는 화주로 도망한 범법자를 송환하도록 다루가치에게 요청하였으나, 쌍성총관은 이를 거절하고 범법자를 돌려주지 아니하였다.424)≪高麗史≫권 130, 烈傳 43, 叛逆 4, 趙暉. 고려의 범법자들이 다수 도망함에 따라 쌍성총관부의 민호는 점차 늘어났다.

 쌍성총관부가 설치된 뒤 40년만인 충렬왕 13년(1287) 고려는 원의 乃顔 반란을 정벌하는데 援軍을 파견하였으며, 충렬왕 14년 2월 내안의 잔당인 哈丹敵이 쌍성총관부를 침입하고 충청도 지역까지 남하하자 원과 힘을 합하여 합단적을 물리쳤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여·원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발전하자, 충렬왕은 쌍성총관부를 고려에 환부하도록 요청하였다.

 원에서는 쌍성의 일부를 고려에 환부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이 때 환부된 지역은 화주 이남 지역이었으며, 화주 이북 지역은 여전히 조씨·탁씨 등의 쌍성총관부 지배하에 있었다.425) 方東仁,<雙城總管府考(上)>(≪關東史學≫1, 關東大, 1982).

 배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은 동왕 5년(1356) 5월에 기철 일당을 주멸하고 그 세력의 본거지인 요·심 지역과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작정으로, 서북면병마사 印璫에게 요양과 심양의 동녕부를 정벌하게 하였다. 인당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의주에서 강을 건너 요양행성에 이르는 東八站을 쳐서 점령하였다. 그와 동시에 柳仁雨 등을 보내어 동북면의 등주에서 쌍성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쌍성총관 趙小生과 천호 卓都卿 등이 이끄는 쌍성총관부의 세력이 강하여 쉽게 함몰시킬 수 없었다. 고려군은 그 해 7월에 조씨세력의 반대파인 이씨의 李子春과 조씨일파의 趙暾, 趙仁壁 등의 내응을 얻어 비로소 쌍성총관부가 함락될 수 있었다. 이때 쌍성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처자를 버리고 伊板嶺(摩天嶺) 북쪽 여진 땅으로 도망하였다.426)≪高麗史節要≫권 26, 공민왕 5년 7월. 유인우는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다음 조소생과 탁도경의 무리를 추격하여, 哈蘭(咸興)·洪肯(洪原)·三撤(北靑) 등을 거쳐 마천령을 넘어 두만강 하류 여진의 지역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조소생과 탁도경은 북원의 納哈出〔나하추〕세력을 끌어들여 고려군을 격퇴하고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성계에 의하여 격퇴되었으며, 탁도경과 조소생은 여진 세력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 때 쌍성총관부를 점령한 고려의 군사들은 정주 이남 지역에 머물지 않고 마천령을 넘어 두만강 하류까지 개척하여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던 것이다.

 쌍성총관부에 있어서 대토호 세력은 조씨와 이씨의 두 집안이었다. 조씨는 조휘의 집안으로서 趙暉―超良期―趙暾―趙小生으로 습직이 되고, 이씨 집안은 李安社―李行里―李椿―李子春―이성계의 계열로 습직이 되었다. 조씨는 본래부터 고주·화주의 토호였으나, 이씨는 충렬왕 16년(1290)에 두만강 중류 斡東에서 등주로 이주하였다가 함주로 근거지를 옮긴 새로운 세력이었다. 이씨는 천호의 지위였으나 다루가치를 겸하였기 때문에 총관을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 두 집안은 서로 혼인을 맺어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원 말에 이르러 원의 세력이 약화되자, 고려에 귀화한 이성계의 이씨세력과 그대로 원의 세력에 의존하던 조씨세력이 대립한 것 같다. 양가의 관계를 家系圖로 보면<표 2>와 같다.

 다음의<표 2>에서 쌍성총관부의 토호 세력인 조씨와 이씨는 혼인관계에 의하여 이중으로 얽혀 있으며, 金方掛는 토착 여진의 추장으로서 이씨, 조씨와 다시 혈연관계를 맺고 있다. 고려 말 공민왕이 유인우를 보내어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때, 이씨세력은 고려에 협조하여 조씨와 박씨세력 등 친원세력을 몰아내고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씨세력 가운데 조돈의 아들인 조인옥과 조인벽은 고려에 귀화하여 이성계를 도와 큰 공로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씨의 천호 겸 다루가치의 지위가 전처 敬妃 朴氏 소생인 이자춘―이성계로 습직되고, 후처 조씨 계열은 밀려났기 때문에 이춘(도조)과 조씨 사이에 태어난 那海가 습직을 주장하면서 이자춘과 실력으로 대결하다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나해는 외가인 조씨세력에 힘입어 천호와 다루가치의 지위를 강제로 차지하려 하였으나, 이자춘이 개원로에 호소하고 실력으로 저지하여, 마침내 천호 겸 다루가치의 지위를 습직하였던 것이다.427)≪太祖實錄≫권 1, 總書. 이 나해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씨와 조씨는 불화하여 서로 대립하다가, 쌍성총관부가 몰락한 뒤에 조씨가 몰락하고 이성계의 이씨세력이 득세하였다. 쌍성총관부가 몰락한 뒤에 여진 김방괘와 이춘의 딸 사이에 태어난 여진의 대추장 三善·三介가 북원의 나하추세력을 끌어 들여 동북면 일대를 침범한 것도 이러한 원한관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하추와 삼선·삼개의 침입을 격퇴하고 동북면을 수복하였다.

확대보기
<표 2>趙氏·李氏 가계도
<표 2>趙氏·李氏 가계도
팝업창 닫기

<金九鎭>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