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3. 고려 말의 정국과 원·명 관계
  • 3)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과 요동정벌

3)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과 요동정벌

 공민왕 때 親元派와 親明派가 생겨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명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한 이후부터이다. 이에 앞서 공민왕이 원의 쇠퇴를 틈타 반원정책을 추진할 때에 기철·김용·최유 등 부원배의 비행이 적지 않았지만, 이들 부원배를 친원파라고는 할 수 없다. 친원파 또는 친명파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서 단독으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쓰고 있을 때에도 기세를 잃지 않고 번번이 재기를 노리고 있던 부원배는 명이 흥기하여 고려가 북원과의 관계를 끊고 친명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가자 친원파로 탈바꿈하였다. 한편, 주자학의 수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신진문신계열은 공민왕에 밀착하여 친명파로 등장하였다.

 고려는 명과 정식으로 국교가 열린 공민왕 18년(1369) 4월 이후 1년에 수 차례 조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실행하였다. 물론 고려의 이러한 대명외교정책은 중국 대륙의 강대국에 대해 오래전부터 행하여 온 전통적인 외교정책이며 그들에 대한 사신파견은 臣禮의 형식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권안정과 무역 및 문화수입에 있었다.531) 국교수립 후 첫 문화수입은 공민왕 19년 5월에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成淮得이 귀국하는 편에 六經·四書·通鑑·漢書를 가져오고, 또 다음달에 온 명사 侍儀舍人 卜謙을 통해 科擧程式을 보낸 것이라던가, 동왕 21년 3월 高麗子弟의 大學入學을 허가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현실적으로 배원정책의 작용도 있고 하여 고려는 명에 대한 조공에 있어서 성의를 다하였으며, 해로와 육로를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사신을 보내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은 처음 수년간 고려의 청원을 거절하거나 외교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고려와 명의 관계는 처음부터 순조롭고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나, 명나라가 내외체제를 정비하고 북원을 압박하여 공민왕 20년(1371) 4월경부터 요동이 세력을 미치게 되자 사정은 많이 달라지게 된다. 원이 북으로 이동하게 되자 요동방면에 남아있던 원의 관료나 遺將은 북원과의 유대가 끊어져 반독립적인 상태에서 꽤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때로는 고려의 북경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때로는 사절을 보내어 화호의 뜻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王·淮王·東平王·納哈出 등은 그 대표적인 존재였으며, 遼陽行省平章 劉益과 王右丞도 그 중의 한 세력이었다. 더욱이 유익 등은 공민왕 20년 윤3월 고려에 사절을 파견하여 요양지방은 본래 고려의 땅이므로 만약 자기들이 명에 귀부하였을 때 고려에서 후원해 주면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달 명의 중서성에서는 유익 등이 이미 金州·復州·盖州·海州 등지를 들어 귀순한 사실을 고려에 통보해 왔다.532)≪高麗史≫권 43, 世家 43, 공민왕 20년 4월 무술.

 이처럼 명은 유익의 귀부로 요동에 진출하여 처음 遼東衛指揮使司를 두었다가, 동년 7월에 이를 다시 定遼東衛指揮使司로 개편하여 요동제위의 군마를 통찰하였다. 이어 이 해에 高家奴를 老鴉山에서 크게 격파하여 요양 이북으로 진공하게 됨으로써 요동 경영의 기반이 다져지게 되었다. 이로써 명의 태도는 차츰 경화되어 고려에 위압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事端으로 문제가 된 것은 공민왕 22년(1373) 7월 중순 명에서 귀국한 姜仁裕·金湑·成元揆·林完·鄭夢周 등이 갖고 온 洪武帝의 宣諭이다.533)≪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22년 7월 임자. 姜仁裕는 전년 즉 공민왕 21년 8월에 파견된 謝恩使(謝賜綵匹)이고, 金湑는 方物進獻使, 成元揆는 賀聖節使, 林完은 賀千秋使로서 동년 7월에 같이 파견되었으며, 鄭夢周는 동년 3월 賀平蜀使 洪師範의 書狀官으로서 명에 파견된 자들이다. 한편 洪師範은 먼저 귀국 중 溺死하였다. 이 선유는 홍무제가 강인유 등에게 직접 面宣한 것을 기록한 문서로서 그 동안에 벌어진 고려에 대한 의혹, 불성실 그리고 고려의 반항적 태도를 힐난한 것이다. 이를≪고려사≫세가에서 정리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534) 末松保和,<麗末鮮初に於ける對明關係>(≪史學論叢≫2, 1941), 21∼22쪽.

① 明使 孫內侍를 독살한 혐의가 있는 것535) 孫內侍에 대하여≪高麗史≫권 43, 世家 43, 공민왕 21년 5월 계유조에“孫內侍自縊于佛恩寺松樹”라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으나≪明史≫에는 그가 공민왕 17년 6월 을축에 陳理·明昇 및 그 家屬을 고려에 이송하기 위하여 개경에 왔다가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② 倭寇 포착을 장려할 것 ③ 正朝使에 정찰의 혐의가 있는 것536) 正朝使에 내정 정탐의 혐의가 있다는 것은 지난해의 정조사 韓某(韓邦彦)는 入朝에 4개월이 걸리고, 금년의 경조사(金湑)가 4개월 전에 내조한 것은 모두 정탐차 늦게 오거나 일찍 온 것이라고 생트집을 잡은 것이다. ④ 李內侍 등 商賈에 假托한 정찰인이 많은 것 ⑤ 朱姓女의 아비를 멀리 귀양보낸 것537) 주성녀의 아비에 대한 것은 잘 알 수 없다. 다만 본문에 周라는 성의 여자아이를 원조정에서 찾아 데리고 왔기에 물어 보았더니, 성이 朱라고 하였다 하여 明室의 성과 같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성이 정말 周氏 또는 朱氏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문제 삼은 것 같다. 본문에 계집아이의 아비를 遠流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나이가 13세인 것을 보면 貢女출신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명황실은 朱姓이 아닌가 하는 것 때문에 계집아이의 아비와 친족을 찾아 보내라고 하였는데, 이 사건 역시 고려에 대한 명의 不信 사례로 보인다. ⑥ 長寧公主를 살해한 것538) 조서내용에는 왕의 姪女라고만 되어 있으나 충혜왕의 딸 長寧公主임이 틀림없다. 宣諭에 명이 송환한 왕의 질녀를 살해하였다고 함은 고려에서 돌아온 金哥라는 내시가 그녀의 정체에 분명치 않은 점이 있어 왕이 죽였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을 말한다(≪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1, 長寧公主). ⑦ 遼東의 吳王과 교빙한 것 ⑧ 나하추와 통교하여 牛家莊을 침범한 것 ⑨ 徐摠兵을 향응한 것539) 徐摠兵은 북정할 때의 征虜將軍 徐達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서달을 향응한 것은 北平府의 軍官事情을 정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의 진위는 알 수 없다. ⑩ 濟州馬를 요구대로 進貢하지 않은 것 ⑪ 今後에는 海路로 오지 말 것

 위의 11조목 중 ②항과 ⑪항을 빼고는 모두 고려를 힐책하는, 자못 고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고려로서 보면 모두 근거가 없거나 극히 빈약한 것을 가지고 공연히 트집을 잡으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명이 고려에 대하여 북원과 내통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갖고 있는 사실이다. 북원과 밀통하고 있다는 혐의로 명이 문제삼은 것은 ⑦항과 ⑧항이다. ⑦항의 북원 오왕과의 통교는≪고려사≫에 공민왕 18년 9월·19년 3월·20년 5월 하순의 3회에 걸쳐 遣使來聘한 기록이 보인다. 한편 교빙의 길이 열린 후 곧 오왕에게 禹磾을 보내어 回謝하였을 때에는 청혼까지 하더니, 18년 10월에 시중 金逸逢의 딸을 오왕에게 보낸 것을 보면,540)≪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8년 10월 을유. 오왕과의 관계는 상당히 가까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동왕 18년 9월에는 오왕이 북원의 회양·雙哈達王과 함께 고려에 사절을 보낸 바 있으므로 명의 의혹을 살만 하다. 그러나 이들과의 사절 교환은 통상을 위한 평화적 내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⑧항은≪고려사≫세가에는 고려가 나하추와 통모하여 牛家莊馬頭의 양미 10만 곡을 절취하고 다시 군마 3천을 잃게 하였다 하고,≪明實錄≫에는 홍무 5년(공민왕 21년) 11월에 나하추가 우가장을 침입하여 창고의 곡식 10만 석과 군사 5천여 명을 함몰하였다고541)≪明實錄≫권 76, 太祖 洪武 5년 11월 임신. 적고 있어 양자의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고려가 나하추와 통모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고려와 나하추와의 교섭은 이보다 앞선 공민왕 11년(1362) 2월부터 개시되고 있으나,542)≪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1년 2월 기묘. 이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는 나하추가 북원의 遺將과 같이 고려의 북경을 침략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므로 고려가 그를 향도했다는 것이지만, 이제까지의 고려와 나하추와의 관계를 살피면, 이것은 아무 근거도 없이 다만 위압적 외교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리한 추측을 가하여 명분없는 협박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홍무제는 선유에서 공민왕을 힐난하는 가운데 그것이 마치 최후통첩이나 되는 것처럼 무력을 과시하고 위협적인 언사를 마구 늘어 놓으며 오고 싶으면 오고,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말라고까지 자못 고압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홍무제가 변방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쓴 강온양면의 외교정책이기도 하지만, 고려로서는 심상치 않은 문제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위의 선유와 함께 강인유 등이 가지고 온 중서성의 자문은 고려의 기대와는 달리 조공 횟수를 이제부터「1년 數聘」에서「3년 1빙」으로 줄인다는 것이었다. 즉 지금까지 正朝使·聖節使·千秋使 등 1년에 수차례 사신을 보내던 것을 그만두고 3년에 한 번씩 정조사만 보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3년 1빙」은 비단 고려뿐만 아니라 변방 모두 나라에 통용된 것이었지만, 고려로서는 또 하나의 큰 문제꺼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고려는 강인유 등이 돌아오고 10여 일이 지난 7월 하순에 密直副使 鄭庇를 正朝使, 判繕工寺事 周英贊을 獻馬使로 파견하였다. 정비 등은 앞서 선유에서 海路로 오지 말라고 한 것에 근거하여 육로로 요동을 경유하는 사행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일행이 요동 頭館站에 이르자, 명 관원이 원방사람들은 경내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막으므로 여러 번 교섭을 벌렸으나 끝내 거절당하여 그만 돌아오고 말았다.543)≪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23년 2월 갑자. 따라서 고려는 부득이 다시 해로로 사신을 보낼 것을 결정하였으나, 마침 정비가 병환으로 사행할 수 없게 되자 같은 해 10월 주영찬을 밀직부사로 승진시켜 대신 하정사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이번 행차 역시 靈光 慈恩島에서 풍랑을 만나 정사인 주영찬이 익사함에 따라 사행은 또 중단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정비와 주영찬이 시도한 두 차례의 사행이 실제로 돌아가자, 고려는 동왕 22년 11월 하순에 다시 밀직부사 張子溫을 賀正使로 임명하여 이번에는 육로를 택하여 요동의 定遼衛에 도착하였으나 또 다시 거절당하고 말았다.544)≪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22년 11월 을축. 그러나 고려는 기일이 지났는데도 단념하지 않고 다음해 2월 밀직부사 정비·判事 禹仁烈을 하정사로 임명하여 이번에는 해로로 가게 하였다. 정비 일행은 賀正과 함께<請路表>·<請方物仍舊表>·<謝璽書表>등 3통의 국서를 가지고 갔는데,545)≪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23년 2월 갑자. 청로표는 사신이 육로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을 간청한 것이고, 청방물잉구표는 조공을 예전과 같이 1년에 수차례 할 수 있도록 청한 것이다. 또 사새서표는 지금까지의 鴻恩을 사례함과 함께 앞서의 선유에 나타난 견책을 정중하게 해명한 것이었다.

 정비는 무사히 바다를 건너 동년 5월 金陵(南京)에 도착하여 위의 세 가지 국서를 전달하였는데, 이는 앞서 강인유 등이 가지고 온 선유 및 중서성의 자문에 대한 고려의 답변이기도 했다. 이 국서의 특징은 홍무제의 견책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변명과 관용을 바라는 내용이었으며, 고려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貢路와 貢期 문제였다. 즉, 공로(사행길)는 육로인 요동을 경유하는 것이며, 공기(사신파견 횟수)는「1년 수빙」으로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 동안 명나라는 선유에 보이는 것처럼, 공민왕 20년 11월에 파견된 하정사 韓邦彦의 사고로 기일내에 도착하지 못한 것은 정탐때문이라고 힐문한 뒤에 물속에 던져 죽이는 횡포를 자행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치욕도 참고 계속 정성을 다하여 사신을 보내며 공로와 공기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명은 좀처럼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일이 있을 때마다 트집을 잡았다.

 공로에 대해 홍무제는 앞서의 선유를 통해 洪師範(洪彦博의 아들)이 익사한 사실을 거론하며(21년 3월 상순 출발, 귀로에 익사)546)≪明實錄≫권 75, 太祖 洪武 5년 8월 계묘. 한편≪高麗史節要≫권 29에는 공민왕 22년 7월에 익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海路入朝는 난파의 위험이 많다고 하여 해로를 이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육로를 택하면, 앞서 정비와 장자온의 경우처럼 길을 막으니 고려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공기에「1년 수공」이「3년 1공」으로 변경되는, 이른바 공기축소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명나라가 공로와 공기 문제를 갖고 일방적으로 억압적 태도를 취하고 사신을 죽이기까지 하는 횡포를 자행한 것은 고려의 반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더 나아가 정치세력간에 친명·친원의 파당을 조성하는 요인까지 되었다.

 해로를 택한 정비 일행은 공민왕 23년(1374) 6월에 귀국하여 홍무제의 手詔 및 중서성의 자문 3통을 가지고 돌아왔다.547)≪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23년 6월 임자. 공기는 여전히「3년 1빙」을 천명하였고, 공로는‘從海道來’즉 해도를 따라 입국하라는 것이었다. 공로로 해로를 택하라는 것은 곧 앞서 고려가 요청한 요동경유를 정식으로 거부하는 것이 된다. 이렇듯 고려사신의 요동왕래를 거부하는 결정을 내린 것은 곧 요동폐쇄를 뜻하는 것이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北元·遼陽行省平章事 劉益의 귀부와 高家奴의 제압으로 요동경영의 기반이 다져짐에 따라 고려는 지름길인 요동을 경유하여 명으로 사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육로로의 사행이 한 번도 실현되지 못한 채 요동폐쇄라는 어려운 문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요동폐쇄의 직접적 동기는 공민왕 21년 11월에 있었던 나하추의 우가장 침공이다. 명은 이 사건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되자, 고려가 나하추를 향도하여 침공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고려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한편, 서둘러 요동폐쇄의 결정을 내려 고려사신의 육로입조를 금지하였다. 이 사실이 요동의 현지 관원에게 전달된 것은 홍무 6년(공민왕 22) 정월이지만,548) 末松保和, 앞의 글, 343쪽. 중앙에서 결정한 것은 나하추의 우가장 침입사건이 일어난 홍무 5년 11월 임신일 직후로서 적어도 12월 중에는 정식으로 결정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어쩌면 홍무제가 고려사신에게 面宣한 12월 27일 이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선유조서 ⑪항에“금후에는 海路로 오지 말 것”이라 한 것은 곧 遼東을 경유하여 육로로 입조하라는 뜻인데, 이것으로 보면 홍무제의 고등술책으로 面宣 이전에 이미 요동폐쇄를 결정해 놓고 고려사신에게는 마치 호의를 보이는 것처럼 육로로 들어오라고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정비 일행은 요동폐쇄의 사실을 모르고 공민왕 22년 7월 하순에 처음으로 육로로 사행 길을 떠났으나 요동에서 저지되었으며, 동년 11월 하순에 보낸 장자온 일행도 실패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나하추의 우가장 침공사건은 공민왕 21년 12월의 선유 이후 고려에 위압적인 외교정책을 강행하는 좋은 구실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요동폐쇄는 한편으로는 고려사절의 요동출입을 금지함으로써 나하추 등 원의 잔존세력이 고려와 결탁하여 요동지역을 넘겨다 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고려의 불성실과 반항적 태도를 강경하게 비난하며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고려에 대한 효과적인 지배책을 강구하려는 고등술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외교적으로는 성심껏 순종의 뜻을 표방하며 친명정책을 견지하였지만 조정 신료들은 명의 지나친 강압정책에 대하여 반감을 품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이 은연중에 표면화되어 갔다. 공민왕 23년 9월 하순에 벌어진 공민왕 시해사건과 동년 11월에 일어난 명사신 살해사건은 이러한 정국의 움직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고려사≫기록에 의하면, 공민왕이 말년에 후사를 얻기 위하여 자제위를 두고 미소년을 뽑아 몰래 왕비와 밀통하게 하였는데, 益妃(종실 德豊君 義의 딸)의 임신이 幸臣 홍륜과의 간통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환관 崔萬生이 공민왕에게 밀고하였던 바, 왕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홍륜을 죽이려 했다. 이에 밀고자 최만생은 해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홍륜과 모의하여 선수를 써서 왕을 시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고려사≫찬자들의 그릇된 사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자제위는 왕의 변태색정을 충족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 아니라, 공민왕이 신돈의 실각 후 지배세력의 재편과정에서 보수적 무장세력의 재등장과 더불어 초래된 왕권약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권력의 중심을 궁중으로 끌어들이려고 젊은 衣官子弟를 선임한 정치적 성격이 강한 기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공민왕은 지배세력 사이에 도사리고 있던 여러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시해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면 홍륜·최만생 등은 왜 공민왕을 시해하였을까. 그들이≪고려사≫에 보이는 것처럼 이런 엄청난 사건을 단독으로 저질렀을 것 같지는 않다. 이와 관련해서 먼저 우왕의 즉위사실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공민왕이 갑자기 암살당한 후 정국은 후사문제로 한동안 큰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즉 江寧大君 禑를 세우려는 일과, 다른 종실에서 맞이하려는 일과, 북원의 篤朶不花를 영입하려는 일 등 의견이 셋으로 나뉘어 대립되다가 이인임 일파가 승리하여 우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다른 종실에서 세우려는 파가 경복흥 일파이고, 북원의 독타불화를 옹립하려는 파는 누구인지 기록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反恭愍王派(친원파)라고 할 수 있다. 이 독타불화의 옹립운동은 공민왕 시해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독타불화는 瀋王 暠(충렬왕의 손자)의 손자로서 심왕을 세습적으로 상속하여 오래 원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왕위 계승자로 물망에 오르내린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일찍이 공민왕 11년(1362)에 奇皇后가 그를 공민왕 대신 영립하려고 하였으나 굳이 사양함으로 덕흥군을 옹립하였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공민왕 18년 5월에 고려가 북원과 국교를 단절했을 때부터 또 그의 영립이 추진된 것 같다. 공민왕 22년 2월에 북원의 사신 波都帖木兒가 내조했을 때 왕이 강경책을 써서 그들을 국경에서 죽이려고까지 하다가 군신의 반대로 중지했지만,549)≪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22년 2월 을해. 이것은 북원이 다시 독타불화를 옹립하려 한 소문이 고려에 전문된 때문이었을 것 같다.

 독타불화 추대사실이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공민왕 23년 9월의 일로서 왕이 시해되기 3일 전의 일이다. 즉 이 때 胡僧이 북원에서 와서 康舜龍에게 원이 심왕의 孫을 고려국왕으로 삼았다고 말하였는데, 이 일로 호승과 강순룡·우제 등이 옥에 갇히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기사는 일견 모호한 점이 없지 않지만, 북원이 독타불화를 옹립하려고 획책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공민왕이 시해된 후 친원파 사이에 일어난 독타불화의 옹립운동은 이 때의 맥락을 이어받은 것이 틀림없으며, 이 계획은 고려가 북원과 국교를 단절한 직후부터 이미 비밀리에 추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공민왕파(친원파) 중에는 북원의 독타불화 옹립운동에 영합하여 무엇인가 사건을 꾸밀 가능성이 없지 않다. 명은 공민왕 21년(1372) 12월 이래 무리한 요구를 계속해 왔고, 공민왕은 명의 그칠줄 모르는 위압과 모멸에도 순종의 뜻을 표하고 있었으니, 여기에서부터 싹튼 공민왕과 명에 대한 반감은 반공민왕 내지 친원파의 세력기반을 다지는 좋은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호승 등의 옥사는 곧이어 일어난 공민왕 시해사건 때문에 결과를 알 수 없이 되고 말았지만, 여기에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럴 때 반공민왕파 즉 친원파는 홍륜·최만생 등의 음모와 연결되고,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왕을 암살하고 정국을 일거에 뒤엎으려고 한 것이었지만, 일이 너무 급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처 손을 쓸 여유도 없이 수문하시중 이인임 일파가 승리하였다. 이리하여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원·명의 양쪽에 다리를 걸치는 이른바 양단 외교정책을 쓰게 됨으로써 친원파의 계획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다. 친원파가 공민왕 시해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하였으리라는 심증은 다음의 명사신 살해사건을 통하여 그 일단을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명사신 蔡斌은 본래 성품이 포악하여 林密과 같이 고려에 와서 난폭한 행동을 많이 저질러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550) 都堂이 명사를 宴會할 때 기녀가 채빈의 모자에 꽂은 꽃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크게 노함으로 侍中 廉悌臣을 廣州에 유배한 일이 있고, 또 그는 천성이 난폭하여 남을 잘 치고 욕함으로 시중이하 諸宰相이 모두 능욕을 당하였다고 한 것은 그 한 예이다(≪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23년 6월 정유). 또 호송관 金義에게 모욕을 가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감정을 상하게 한 바 있다. 그러던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 開州站(지금이 鳳凰城)에 이르자 김의는 갑자기 채빈을 죽이고 임밀을 붙잡아 나하추에게 달아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도 김의의 반감으로 저질러진 단독 범행만은 아닌 것 같다. 반공민왕파의 배후조종에 의하여 강행되어 하수인 김의는 북원으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명사신 임밀 일행이 濟州馬를 요구하기 위하여 고려에 온 것은 공민왕 23년 4월 중순이다. 이 때 명은 2천 필을 요구하였지만 제주목자 哈赤 등은 이에 불응하여 350필만 출마함으로써 최영의 제주토벌이 단행되는데,551)≪高麗史≫권 113, 列傳 26, 崔瑩. 그가 정토를 끝내고 10월에 돌아왔을 때는 공민왕이 암살당한 뒤였다. 그러나 임밀 일행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영의 귀환을 기다리지 않고 공민왕이 시해되기 10여일 전에 350필 중 불량마 150필을 뺀 200필만 갖고 이 해 9월 초순에 개경을 떠난 것이다. 명사 일행은 압록강변에 도달하여 2개월동안이나 체류하다가 11월에야 강을 건넜는데, 그들이 왜 오랫동안 압록강변에 머물러 있었는지, 또 이 사이에 공민왕의 시해사실을 전해들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지만, 공식적인 통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디에선가 들어서 알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싶다. 따라서 그들은 공민왕 시해에 관한 정보를 다각적으로 수소문하기 위하여 두 달이나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소비하였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한편 호송관 김의의 귀에는 그가 밀직부사라는 고위관직에 있었던만큼 일찍이 자연스러운 경로를 밟아 전문되었을 것이다. 그는 본래 胡人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고위관직에 오른 사람이었는데, 이 때 마침 호송관이 되어 명사 일행을 데리고 압록강변에 도착하여 머무르고 있던 중 반공민왕파에 의하여 공민왕이 암살된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 사신 일행이 두 달 뒤에야 압록강을 건너 개주참에 도착하자, 곧 그들의 사주를 받아 채빈을 죽이고 임밀을 사로잡아 나하추에게 달아난 것이다. 김의는 그의 경력으로 보아 본래 친원파의 한 사람이었던 듯하며, 채빈을 죽인 후 임밀까지 생포하여 북원에 송치한 것은 친원파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다른 기록에 의하면 찬성사 安師琦가 이인임의 사주를 받아 일을 꾸민 것이라고도 하고, 안사기가 직접 김의를 선동하여 명사를 살해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일거에 독타불화를 영립하여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전자는 이인임이 장차 채빈의 귀국보고에 의하여 명으로부터 집정대신으로서 전왕 시해의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하여 미리 명사의 입을 막으려고 김의에게 지령을 내려 채빈을 죽이고 임밀을 잡아 북원으로 달아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집권 초부터 명과 북원에 양다리를 걸치는 이른바 양단외교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정치적 위치로 보아 믿기 어렵다.

 그러나 후자는 신빙성이 많다. 안사기의 음모는 다음해(우왕 원년) 4월 북원으로부터 귀국한 판사 朴思德이 明德太后에게 비밀을 누설하여 밝혀진다. 안사기는 곧 신진유학자(친명파) 朴尙衷에 의하여 격렬한 탄핵을 받고, 명덕태후의 강경한 요구로 이인임은 부득이 그를 하옥하려 하자 도망하려다가 자살하고 말았다. 이인임은 크게 노하여 안사기를 효수하고, 이 사건에 관련된 혐의가 있는 찬성사 강순룡·知密直 趙密古·同知密直 成大庸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552)≪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李仁任 및 권 112, 列傳 25, 朴尙衷.

 위의 기록은 사실 그대로 전부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안사기가 巡衛府의 조사도 받기 전에 도망가다가 자살한 것은 그가 채빈살해와 독타불화추대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아마 그는 옥에서 국문을 받게 되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날까 두려워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553) 池內宏,<高麗末に於ける明及び北元との關係>(≪史學雜誌≫29-1∼4, 1917;≪滿鮮史硏究≫中世篇 3, 吉川弘文館, 1963), 276∼279쪽. 모른다. 안사기는 본래 원에서 벼슬을 지낸 친원파의 거두로서 공민왕이 암살된 후 후사문제로 관료들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을 때 그는 독타불화를 영립하려는 일파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때 그들 일파의 의견은 표면화되지 못하였다. 독타불화의 추대는 이미 원·명 교체기에 북원에 의하여 은밀하게 추진되어 온 것이 고려에 알려져 큰 파란을 일으킬 뻔한 일이 있었는 데다가, 우왕이 즉위한 후 이인임의 외교정책이 친명으로 기울어져 갈 조짐이 있자 이 문제를 표면에 드러내놓고 거론하기가 극히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북원에 불리해져 가는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불만과 공포가 뒤섞인 상황 아래 친원파는 내친 걸음에 다시 명사 일행을 추적하여 김의에게 공민왕의 시해사건을 알리는 한편, 그가 친원파의 한사람이었던 것을 이용하여 명사를 죽이게 하여 이로써 명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킨 다음, 북원과 다시 국교를 회복하고 독타불화를 영립하려고 획책한 것 같다. 따라서 명사살해사건과 독타불화 추대운동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공민왕이 시해된 후 수시중 이인임은 재빨리 손을 써서 여러 의견을 물리치고 우왕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일어난 명사 살해사건으로 정국이 큰 혼란에 빠져들려는 위기 속에서 친명정책이 결정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원과의 관계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미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때 고려의 외교정책은 명과 북원에 양다리를 걸치는 이른바 이중외교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실권자 이인임은 공민왕의 장사를 치르고 곧 같은 해 11일에 典工判書 閔伯萱에게<先王恭愍王告喪表·請諡表·請襲表>를 주어 명에 파견하였다. 이어 같은 달에는 또 북원 나하추의 사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북원의 변경사태로 遣明使 민백선은 장자온과 함께 귀국하였다.554)≪高麗史≫권 133, 列傳 46, 신우 즉위년 11월. 명사신의 살해사건을 알게 된 고려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낭패와 불안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인심은 또한 흉흉해져 갔다.

 고려는 이 중대한 시국에 대처하기 위하여 같은 해 12월, 공민왕 18년 5월 이래 단절되었던 북원과의 외교관계를 정식으로 회복하고 判密直司事 金湑를 북원에 보내어 전왕의 상을 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원은 다음해 5월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신진유학파(친명파) 三司左尹 金九容·典理摠郎 李崇仁·典儀副令 鄭道傳 등의 격렬한 반대에 봉착하여 개경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고려는 할 수 없이 贊成事 黃裳·左副代言 成石璘을 江界에 보내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 보냈다.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재상 경복흥·이인임 등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보내졌다.555)≪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李仁任.

 그 동안 고려와 북원과의 관계는 篤朶不花 문제로 약간의 마찰이 있긴 하였으나556) 우왕 원년 정월에 納哈出이 고려에 사절을 보내어 북원에서 瀋王 暠의 손자 脫脫不花를 왕으로 삼은 것을 보고, 전왕이 사자가 없는데 지금 누가 왕위를 계승하였느냐고 물어온 일이 있고, 원년 7월에 심왕 모자가 김의와 같이 남진중이라는 泥城萬戶의 飛報에 의하여 知門下府事 林堅味를 西京上元帥로 삼고 諸元帥를 서북면·동북면·서해도에 배치하는 한편, 諸道兵을 징집하는 등 이에 대비하기도 하였으나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절의 교환을 계속하여 옛날의 우의를 회복하였고, 우왕 3년 2월에는 북원이 翰林承旨 孛刺的을 파견하여 우왕을 책봉하였다. 이어서 豆亇達을 보내 전왕을 孝敬大王으로 追諡함에 따라 북원의「宣光」연호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인임의 외교정책은 채빈의 살해사건을 계기로 황망 중에 한때 친원으로 기우는 듯하였으나, 현실적으로 고려의 정치추세는 친원일변도로 나아갈 수 없는 미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북원과의 통교재개에 정면으로 반대의 깃발을 올린 정치세력은 다름 아닌 신진유학파였다. 앞서 견명사 민백선이 채빈의 살해 때문에 요동에서 헛되이 돌아온 직후에 전교령 박상충이 성균사예 정도전 등과 함께 재상에게 속히 전왕의 상을 고하되, 만일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이 明帝의 의심을 사서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니 깊이 성찰함이 마땅하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이인임은 할 수 없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判宗簿寺事 崔源을 명에 보내게 되었다. 이 때는 북원에 告訃使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아니한 우왕 원년 정월의 일로 원·명에 양다리를 걸치는 이중외교정책을 쓸 수밖에 없는 고려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 때 최원이 명나라 예부에 수교한 국서에는 공민왕 시해사건의 해명과 신왕의 즉위사정, 명사 임밀 일행의 출발에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귀국길에 오르기까지의 경위, 호송관 김의의 채빈 살해사건의 전말, 첫 번째의 고부사 민백선의 회환사정 및 앞서 명이 요구한 제주도의 양마 2천 필의 나머지를 계속 발송할 것557)≪高麗史≫권 133, 列傳 46, 辛禑條에 최원의 사행보다 두 달 늦게 판사 孫天用이 명에 들어가 貢馬 1백 필을 헌납한 기록이 보인다. 등에 관한 것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고려는 조심스럽고도 어려웠던 위의 두 사건의 진상을 명에게 자세히 설명한 것이 되며, 이 가운데서 특히 문제가 미묘하고 까다로운 채빈 살해사건은 고려와 아무 관계없이 사적인 의심에서 일어난 것이라며 극구 결백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고려 외교정책은 북원에 기울면서도 한편으로는 명을 주로 해야된다는 친명파의 현실적인 주장을 외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최원의 사행으로 두 사건의 전말이 충분히 해명될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명의 경화된 불신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아 고압적인 위협과 만행이 계속되었다. 최원이 구금되고, 우왕 원년 3월의 馬匹進獻使 孫天用, 동년 5월의 마필진헌사 金甫와 동년 12월의 賀正使 金寶生이 구금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후 소식이 묘연하다가 최원과 김보 두 사람만 겨우 석방되어 귀국하였다.558) 金寶生의 석방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우왕 4년 10월에 또 사은사로 파견된 것을 보면 최원 등이 풀려난 후 김보생도 곧 풀려난 듯이 보인다. 이와 같이 사신이 구금되고 행방불명이 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고려는 새로운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려가 계속해서 명에게 요청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왕의 請諡 및 지금 왕의 承襲이었고, 다음이 歲貢問題(金銀貢·布貢·馬貢)이었다. 이미 북원의 책봉을 받고도 명과의 교섭을 계속 진행시킨 것은 안으로는 신진유학파의 강력한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고, 밖으로는 명의 강대한 신흥세력과 기울어져 가는 북원의 쇠잔한 국력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구금되었던 최원·김보 등이 석방되어 돌아오자 비록 請諡와 왕위 계승의 승인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화된 태도가 약간 누그러진 듯한 판단이 섰다. 이에 고려정부는 우왕 4년(1378) 9월에 명의 홍무 연호를 다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고려가 실리외교에 민감한 움직임을 보인 좋은 증거라 하겠다.

 그런데 우왕 5년 3월에 하정사 沈德符 등이 귀국길에 갖고 온 勅諭에는559)≪明實錄≫권 116, 太祖 洪武 10년 12월 무신. 이 勅諭는 홍무 10년(우왕 3) 12월 中書省에 하달된 것이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1년 3개월동안 中書省에 유치되어 있다가 이 때에 이르러 고려에 전달되었다. 고려에 대한 명의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즉, 중서성에서 관원을 고려에 보내어 전왕이 정말 돌아가고 지금의 왕이 즉위하여 정령이 전왕 때와 같이 시행되고 있는지, 또 嗣王은 연금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할 것이며, 공물은 금년에 말 1천 필과 집정대신의 절반을 내조시키고, 명년에는 금 1백 근·은 1백 냥·良馬 백 필·細布 1만 필로 하되, 이후에는 매년 이를 상례로 할 것이며, 고려에서 억류하고 있는 요동민을 모두 송환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별도의 조서를 통하여 명사살해의 죄를 들어 집정대신의 내조와 위의 세공을 이행하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켜 문책하겠다고 위협까지 하였다.

 고려의 시정시찰을 위한 명사 邵壘·趙振 일행은 심덕부 등과 동행하여 요동의 甛水站까지 왔다가, 고려가 아직 북원과 통교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듣고는 채빈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을까 두려워 한 나머지 되돌아 가고 말았다. 명사가 의심을 품고 중도에서 되돌아감에 따라 고려와 명과의 관계는 다시 경색되었지만, 고려는 앞서 명의 제시조건을 현실로 받아들여 앞으로 대명교섭의 기초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위의 조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명사신 소루 등이 귀국한 지 반년이 지난 우왕 5년(1379) 10월에 門下評理 李茂方·判密直 裵彦 등은 요동을 거쳐 歲貢으로서 금 31근 4냥·은 1천 냥·白細布 5백 필·黑細布 5백 필·雜色馬 2백 필을 갖고 갔으나, 登州에서 저지되어 다음해 6월 헛되이 돌려오고 말았다. 명사 소루 등의 虛歸가 불신을 조장하여 이무방 등의 사행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번 세공의 액수는 앞서 칙유에서 요구한 명년 이후의 수량으로 생각되지만, 금은 그것의 약 1/3, 은은 1/10이고, 말은 비록 2배에 달하고 있으나 양마가 아니라 잡색마였다. 고려는 이것이 힘에 알맞는 適量임을 보이고, 또 요동유이민은쇄환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 하였지만, 집정대신의 입조는 묵살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칙유에서 제시한 조건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은 힘에 벅찬 일이기도 했지만, 명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전에는 고려가 간절히 바라고 있는 전왕의 시호와 새 왕의 고명을 얻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 같이 보였다. 여기서 여·명관계는 계속 난항을 거듭하게 되고, 새로운 불씨가 겹쳐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시일만 허비하며 많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여·명교섭은 고려의 은인자중으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우왕 11년 7월에 일단 마무리 되었다. 고려로서는 전왕의 시호와 신왕의 고명을 얻게 되기까지에 긴 세월과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술한 우왕 5년 10월에 파견된 이무방 등의 사행실패로부터 잡아도 5년 9개월 동안에 무려 18회에 걸쳐 사신을 일방적으로 보냈으며, 그동안 요동에서 저지되어 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8차례이며, 구금·유배된 사신이 4회에 걸쳐 金庾 등 수십 인에 달하였다.560) 末松保和, 앞의 글, 354∼361쪽. 이는 고려로서 참기 어려운 수난이며 굴욕이었다.

 명은 이무방 이후 우왕 8년(1382) 11월 정몽주의 사행까지 요동경유를 모두 저지한 끝에 할 수 없이 이듬해 8월에 해로로 겨우 들어간 문하찬성사 김유·밀직부사 李子庸 등을 옥에 가두면서 자못 위협적인 태도로 소원을 성취하려면 5년간 밀린 세공을 한몫에 납부하라고 독촉하였다. 이 소식은 通事 崔涓·張伯 등이 돌아오면서 갖고 온 禮部의 咨文으로 밝혀졌다. 5년간 밀린 세공이라 하면 금 5백 근·은 5만 냥·포 5만 필·말 5천 필이다. 이것은 엄청난 수량이지만 명의 입장에서 보면 표면으로는 한걸음 양보하는 것 같지만 내면으로는 실속을 차리면서 시호와 고명을 미끼로 완전한 복속을 강요하는 고등의 외교정책이었다. 고려는 이러한 명의 요구에 마지 못하여 따르기로 하고 곧 進獻盤纏色을 설치하여 그 임무를 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금 5백 근·은 5만 냥·포 5만 필·말 5천 필이 갖는 경제적 고통을 참아가며 금은의 일부는 마필로 折價하여561) 금은에 대해 산물이 아니므로 감면해 달라는 고려의 요청이 우왕 10년 5월에 받아들여져 금 5백 근 중 96근 14냥은 금으로 보내고 나머지 403근 2냥은 말 129필로 절가했다. 그리고 은 5만 냥 중 1만 9천 냥은 은으로 보내고 나머지 3만 천 냥은 말 104필로 절가하였다. 동왕 10년 윤10월에 連山君 李元紘를 보내 전량 결제를 끝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명은 고려의 지극한 성의를 받아들여 구류중인 김유 등 6인을 석방하였고, 그들은 우왕 11년 4월에 귀국하여 조빙을 허락한다는 홍무제의 뜻을 전달하였다. 고려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여 다음달 5월에 門下評理 尹虎 등을 보내 사은하는 한편, 다시금 시호·승습을 요청하고, 6월에는 密直使 安翊 등을 보내 聖節을 축하하였으며, 7월에는 前典工摠郎 宣之哲(김유 일행) 등 38인이 방환되어 귀국하였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두 나라 사이에 맺혀있던 응어리는 급속도로 풀려 명은 이해 7월에 우를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 전왕의 시호를 恭愍이라 하였으며,562)≪明實錄≫권 174, 太祖 洪武 18년 7월 계유. 곧 이어 國子監學錄 張溥를 詔書使, 國子監典簿 周倬을 諡冊使로 파견하였다. 이것은 명이 林密 이후 12년만에 사신을 고려에 보낸 것이 된다. 그리고 세공문제는 앞서 5년간의 세공을 일시에 납부할 때 홍무제가 예부에 유시한대로“三年一朝 貢馬五十匹”이 정식으로 확정된 것은 우왕 12년(1386) 7월이었다.563) 우왕 12년 2월 政堂文學 鄭夢周가 명에 들어가 왕의 便服 및 群臣의 朝服·便服을 청하는 한편 歲貢의 蠲減을 청원한 바 있는데, 그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7월에 귀국할 때 세공의 견감이 위와 같이 결정된 것이다(≪高麗史≫권 136, 列傳 49, 신우).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한 이래 10여 년간 줄곧 긴장 상태가 지속되어온 고려와 명의 외교적 갈등은 우여곡절 끝에 일단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와 명 두 나라는 국교를 회복한 지 겨우 1년 남짓한 우왕 12년 11월부터 다시 파문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명이 또 다시 어려운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즉 명으로부터 말 5천 필의 索買에 관한 자문이 문하평리 안익 등이 성절사로 갔다 오는 편에 전달되었다. 이것은 이보다 4개월 전에 결정된“3년 1조, 공마 54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세공마와는 성질이 다른 것으로서, 말값을 지불한다는 것이었지만 고려로서 볼 때는 요구하는 양이 많아 과중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때 명의 요구한 마필은 북원의 유장 나하추의 정벌(본거지 金山에서 長春 서북방)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비록 段子 1만 필·綿布 4만 필로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이었지만, 지난번에 세공으로 마필이 많이 빠져 나간 뒤였기 때문에(총 5,233필) 지극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명의 무리한 요구에 대하여 같은 해 12월에 典客令 郭海龍을 명에 보내“말의 산출이 풍부하지 못하고 또 품종이 왜소하여 대가를 받을 수 없으나 힘써 변통하겠다”564)≪高麗史≫권 136, 列傳 49, 신우 12년 12월.는 말을 전달하였다.

 고려는 다음해 3월부터 6월까지 5천 필을 모두 5運으로 나누어 요동에 보내는 성의를 보였다. 遼東都司는 그 제1운이 도착하였을 때 노약·왜소한 말을 골라서 돌려보냈으며, 제5운의 1천 필은 전부 되돌려 보내져 다시 보내는 고초를 겪었다. 말은 3등급으로 나누어 상등은 단자 2필·포 8필, 중등은 단자 1필·포 6필, 하등은 단자 1필·포 4필로 환산하여565)≪高麗史≫권 136, 列傳 49, 신우 13년 6월. 모두 단자 2,670필에 포 30,186필이 지급되었다. 단자가 예상 수량보다 많이 적어진 것은 곧 상등마보다 하등마가 많았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그만큼 부족한 말을 무리하여 변통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곽해룡이 우왕 13년 2월에 귀국하여 고려사신의 요동내왕을 또 금절한다는 뜻밖의 사실을 보고해 왔다. 즉“이미 일단 왕래를 허락하였으나 내왕이 오래 가면 쟁단이 이로부터 생겨 백성이 화를 입게되니 이제부터 내왕을 금절한다”566)≪高麗史≫권 136, 列傳 49, 신우 13년 2월.고 요동을 다시 폐쇄한다는 것이지만, 이유로서는 매우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마필색매의 경우와 같이 나하추정벌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예방조처로서 다시 요동을 폐쇄하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567) 末松保和, 앞의 글, 363쪽. 즉 고려사신이 요동을 내왕하는 가운데 나하추와 내통하여 요동경영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하고 일찍부터 경계하고 있다가 또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마필의 구색도 큰 문제이지만 요동폐쇄로 인한 내왕금지는 고려로서 또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러한 명의 일방적인 강행은 고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명의 요동폐쇄 통고를 다시 받게 되자, 조야에서는 이인임의 허약한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일부 관료중에는 이인임이 양단외교정책을 쓰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인 이익과 신진유학파의 득세때문에 차츰 친명으로 기울어 가는데 대하여 회의와 불안을 품는 사람도 늘어나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최영이었다.

 최영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공민왕 12년에 흥왕토적공신과 경성수복공신으로 녹공되고, 공민왕 폐립사건 때에는 덕흥군의 군사를 격퇴하는데 결정적인 전공을 세운 무장이다. 이리하여 무장세력의 대두와 더불어 그 전위에 서서 실권을 잡았으나 신돈의 집권 후 그의 미움을 받아 죽을뻔 하였으나 겨우 화를 면하였으며, 그가 몰락한 후에 다시 찬성사로 등용되었다. 이어 공민왕 23년에 제주반란을 평정하고, 우왕 원년에는 判三司事가 되었다가 이듬해 2년 7월에 왜구가 침입하여 公州를 함락시키고 開泰寺에 침구하여 원수 朴仁桂가 敗死하자 노구를 무릅쓰고 자청하여 鴻山에 달려가서 분전하여 적을 크게 무찌르고 개선하였다. 이 때 최영의 공을 논하여 시중으로 擬望하자 시중이 되면 가볍게 외방에 나아갈 수 없으니 왜구의 평정을 기다려 그렇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고사한 것은568)≪高麗史≫권 113, 列傳 26, 崔瑩. 그가 명망보다 애국을 더 중히 여긴 무장으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 각처에서 창궐하고 있던 왜구를 여러 차례 격멸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淸白忠直한 그의 인품은 당시의 집권자 이인임·임견미 등이 威福을 자행하고 부패의 극에 달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최영은 본래부터 친원파라기보다는 憂國至誠에서 명의 무리한 요구와 계속적인 횡포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우왕 13년(1387) 9월에 知門下府事 張方平이<賀納哈出降附表>를 갖고 요동의 甛水站에 이르자 요동도사는 요동폐쇄의 칙유를 제시하며 길을 막았는데, 이 칙유 중에 고려의 집정대신은 ‘輕簿譎詐’의 무리임으로 신빙할 수 없다고 하며 都司로 하여금 통빙을 거부케 한 사실이다. 여기서 말한 집정대신이란 물론 이인임·임견미 등을 지칭하는 것이다. 명이 이인임 등을「경부휼사」의 무리라고 힐난한 것은 마필을 압송할 때 奉使人이 도중에 말을 팔아 다른 말로 바꾸어 명나라에 노둔한 말을 상납하였는데 이는 부패한 집정대신에게 아첨하여 뇌물을 바치기 위한 것이 상례로 되어 왔기 때문이다.569)≪高麗史≫권 136, 列傳 49, 신우 13년 11월.

 집정대신의 이러한 부패는 이보다 앞서 賀聖節使로 들어갔던 安翊의 관련 기록에도 보이고 있는 바,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실을 알게 된 안익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명에 사행한 것은 국가를 위한 것 뿐이었는데, 비로소 권문이 營産하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고 탄식할 정도였다.570)≪高麗史≫권 136, 列傳 49, 신우 12년 6월. 이처럼 마필공납에 따른 협잡은 일찍이 명에 알려져서 謝恩使 張子溫을 하옥한 일까지 있었다. 물론 요동폐쇄가 집정대신의 부패와 마필상납의 부정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인임 등 집정대신의 탐람과 명에 대한 저자세 외교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이인임 등은 정권안정을 위하여 이중외교정책을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명에게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 외교를 펴지 않을 수 없었고, 명도 집권대신의 탐람과 부패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위압을 서슴없이 가함에 따라 그들은 애원과 굴종으로 시종하다가 또 다시 요동폐쇄라는 반갑지 않은 사태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요동폐쇄의 결정이 전달되기는 했지만 고려는 이에 개의하지 않고 우왕 13년 윤6월에 문하찬성사 장자온을 사은사(許改冠服)로, 문하평리 偰長壽를 賀聖節使로 임명하여 요동을 거쳐 명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해 9월에 파견된 장자평을 비롯하여 10월의 하정사 문하평리 李玖, 14년 정월의 정몽주는 모두 요동에서 저지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때마침(우왕 13) 요동에서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이 명제가 장차 처녀 秀才 및 宦者 각 1천 명·牛馬 각 1천 필을 요구할 것이라고 하니 都堂은 이를 걱정하였으나 崔瑩은 “사실이 이와 같다면 곧 군대를 일으켜 이를 격퇴함이 옳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명의 무리한 요구에 고려인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워졌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고려와 명의 관계에 다시 풍파가 번지고 있을 때 명은 홍무 20년(우왕 13년) 6월에 나하추를 평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명의 세력이 요동에서 북만주에 걸쳐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요동경영이 궤도에 오르게 되어 명의 야욕을 더욱 부추겼던 것이다.

 요동폐쇄의 가장 큰 목적이 나하추를 정벌하기 위한 사전조처였다고 하면, 평정 후에는 고려와의 통모대상이 없어졌음으로 의당 폐쇄를 해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요동폐쇄는 그 후에도 더욱 굳어져서 고려사신의 왕래를 아주 금절하는 사태를 빛고 말았으니, 요동 폐쇄 문제를 놓고 양국 사이에 다시 풍파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 안으로는 우왕 14년 정월에 최영이 이성계의 협력을 얻어 이인임·임견미 일당을 숙청하여 정권을 잡았고, 밖으로는 명이 나하추의 평정으로 요동경영에 큰 진전을 보이게 되자, 우왕 13년 12월 하순에는 드디어 고려에 침략의 손을 뻗쳐 철령 이북·이동·이서의 땅을 회수한다는 이른바 鐵嶺衛 설치를 들고 나왔다.571)≪明實錄≫권 187, 太祖 洪武 20년 12월 임신. 이것이 고려에 정식으로 전달된 것은 우왕 14년 2월에 귀국한 설장수에 의해서였지만, 고려는 그의 복명에 앞서 현지보고에 의하여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문하시중 최영은 여러 장상과 더불어 定遼衛를 공격할 것인가 또는 화의를 청할 것인가를 의논하였고, 그 결과 화의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져572)≪高麗史節要≫권 33, 신우 14년 2월. 곧 密直提學 朴宜中을 명에 파견하였다. 그가 갖고 간 국서는 철령 이북 公嶮嶺에 이르는 땅은 모두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이곳을 徵收하려는 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 후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적극 추진하여 홍무 21년(우왕 14년;1388) 3월 하순에 鐵嶺衛指揮使司를 奉集縣(요동성의 동북방)에 설치하게 된다.573)≪明實錄≫권 189, 太祖 洪武 21년 3월 신축. 이 소식이 고려에 전해지자 조야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고, 명에 대한 비난의 소리는 더욱 높아갔다. 이에 최영이 백관을 소집하여 철령 이북을 헌납하는 가부를 묻자, 백관이 모두 옳지 않다고574)≪高麗史≫권 137, 列傅 50, 신우 14년 2월. 하였고, 이로 인해 최영은 攻遼計劃을 수립하였다. 최영은 왕을 움직여 비밀리에 공요계획을 세운 바 있고, 그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이에 앞서 고려는 요동폐쇄의 긴장이 감돌고 있을 때인 우왕 13년 11월에 서북의 변에 대비하여 漢陽山城의 수축, 전함의 수리, 重興山城(漢湯府 三角山)의 지형을 조사하고, 또 이듬해 초에는 5도의 성을 수리하고, 여러 원수를 서북에 파견하여 무비를 정비하는 등 우왕·최영을 위시한 많은 군신은 명과의 일전을 각오하기에 이르렀다.

 명의 그칠줄 모르는 야욕과 마수를 눈 앞에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국가를 유지하는 현명한 길이 못된다는 것이 최영의 확고한 신념이었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외래침략자에 대한 고려인의 끈질긴 저항의식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순한 친원파라기보다는 철저한 애국자였으며 최영의 공요계획은 외국침략자에 대한 고려의 저항운동이었던 것이다.

 공요계획은 처음 친명을 표방하는 이성계 일파가 이른바「四不可論」을 내세워 반대하기는 하였으나, 최영은 단호하게 이를 물리치고 우왕과 같이 평양에 진주하여 서둘러 攻遼軍을 편성하였다. 최영을 8道都統使, 조민수를 左道都統使, 이성계를 右道都統使로 삼아 평양에 본영을 설치하니 총 군세는 좌·우군이 38,830명, 딸린 인원이 11,634명, 말이 21,682필이었다.

 공요군은 드디어 4월 임술일에 평양을 출발하니 일컬어 10만 군이라 하였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공요군이 위세당당하게 출발하고 나서 3일 후 바로 홍무 연호를 정지한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한마디로 자주정신의 발로이며 요동정벌을 완수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비록 이 공요군의 요동정벌은 이성계의 반란, 즉「威化島回軍」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고려의 마지막 북진정책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하겠다.

<金成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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