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4. 홍건적과 왜구
  • 2) 왜구
  • (4) 왜구에 대한 대책

가. 군사체제의 변동과 강화

 고려의 군사제도는 무신란을 계기로 변화되기 시작하여 무신집권기에는 중앙의 2군 6위 체제가 사실상 붕괴되고, 원의 간섭기에 들어서는 원과의 특수한 관계로 州鎭軍마저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군사체제는 변질되고 약화되어 군사력을 대표하던 京軍의 편제는 隊正 이상의 장교직만이 남아「벼슬자리」로서의 성격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고종대부터는 왜구의 침입이 시작되어 남방 연해지역도 국방상으로 중요하게 되었으며, 충정왕 이후 왜구가 창궐함에 따라 국방선은 전국의 연해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거의 유명무실한 지방군인 주현군만으로는 국방이 어렵게 되어, 연해의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방군으로서의 鎭戍軍을 증설하고 騎船軍의 재건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庚寅(충정왕 2;1350) 이후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하기 시작한 수자리가 공민왕 때에는 18개소에 이르렀다.624)≪高麗史節要≫권 27, 공민왕 10년 5월. 또한 연해의 軍民으로 방수에 충당케 하고, 먼 곳의 백성이 그들의 役을 제공토록 하였으며 양광·전라·경상도의 군민에게는 왜구의 방어를 전담토록 하였다.625)≪高麗史≫권 82, 志 36, 兵 2, 鎭戍 공민왕 5년 6월 敎.

 이러한 鎭戍체제는 제도화되지는 못하였으나, 국방선으로 된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군사력이 분할 배치된 것은 지방중심의 방어에서 왜구에 대한 방어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다음으로 騎船軍의 재건을 살펴보면 고려 초기의 해군은 鎭溟(원산)을 거점으로 하여 東北海賊(동여진)의 경계에 주력하였다.626)≪高麗史≫권 82, 志 36, 兵 2, 鎭戍. 그러나 중기 이후로는 동여진 해적과 관련한 국방상의 긴장상태가 없었기 때문에 쇠약해졌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왜구가 창궐하게 되자 해군력의 배양이란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공민왕 원년(1352) 3월에 李穡은 연해의 백성으로 해군을 다시 강화시킬 것을 진언했고, 동왕 21년 10월에는 禹玄寶 등이 상소를 올려 전함을 건조하고 장비를 구비하여 해군력을 강화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거의 채택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공민왕 말엽 왜구의 침입이 격심해지고 피해가 커지자 마침내 船軍의 재건 방침이 정해졌다. 공민왕 23년 정월 李禧·鄭地 등은 연해와 섬 출신자들이나 배부리는 데 익숙한 자로서 스스로 자원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싸우면 5년 안에 왜구를 깨끗이 소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이들을 楊廣道巡撫使兼倭人追捕萬戶와 全羅道巡撫使兼倭人追捕萬戶에 임명하고 그들의 휘하 군사들에게는 첨설직과 空名牒을 주었다.627)≪高麗史≫권 83, 志 37, 兵 3, 船軍 및 권 113, 列傳 26, 鄭地. 이 때 실시된 선군 강화책으로는 일반 군사가 아닌 섬 출신자를 선군에 충당시키고, 그들을 위해 첨설직과 같은 특전이 마련되었고, 선군의 지휘관을 위하여 순무사겸만호의 직함이 주어진 것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翼軍의 조직을 살펴볼 수 있다. 왜구의 창궐로 많은 군대가 필요하였으나 이미 상비군 조직이 무너진 당시에는 위급한 상태를 당할 때마다 농민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병농일치의 兵制가 마련되었는데 이것이 익군 조직이다. 일정한 지역에 여러 개의 軍翼을 두어 하나의 군사단위로 삼아 공민왕 때 서북면 지역의 국방임무를 담당케 하였다. 그런데 왜구가 창궐하게 되자 우왕 4년(1378) 서북면의 익군체제를 전국에 확대시키자는 都堂의 의견에 따라 전국에 군익조직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반년 만에 폐지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왜구에 대비한 군사조직의 정비, 강화와 아울러 新兵器로서의 화약·화기의 사용은 극성기의 왜구를 진압하는 데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고려에서 화약이나 화기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여·원연합군이 일본에 원정할 때 원의 군사가 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 뒤 고려는 왜구가 창궐하게 되자, 왜구격퇴에 사용하기 위하여 독자적인 화약 제조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崔茂宣이 최초로 화약 제조에 성공하였다. 그 후 화약과 화기가 급속히 발달하여 大將軍·三將軍·六火石砲 등 20종에 가까운 화기가 만들어졌으며 그 위력 또한 놀랄 정도였다. 또 우왕 4년 4월에는 火㷁放射軍이라는 전문부대가 편성되었고, 화기의 위력으로 우왕 6년에는 羅世의 진포싸움과 정지의 남해싸움에서 쾌승을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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