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개요

 무신정권이 성립된 뒤 2세기가 넘는 고려 후기사회는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사회·문화에 있어서 참으로 어두운 시기였다. 무인들이 문신귀족을 대신하여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반무신란을 비롯하여 이러한 사회변동의 기회를 틈타 개경이나 여러 지방에서 노비·천민·농민들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 민란은 귀족 중심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전환을 지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일련의 사회적 혼란은 무신정권이 일단 안정되면서 진압되었다. 그러나 13세기 초 몽고족의 흥기로 무신집권기의 고려는 그 침입을 맞아 30여 년의 항몽전쟁으로 국토는 초토화되고 백성은 미증유의 고난을 당하였으며, 패전에 이어서 원제국의 정치적 간섭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려는 말기에 가서 이미 원 간섭기 때부터 추진해 오던 자주권의 회복이나 국가재건을 위한 몸부림치기도 하였으나 결국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 후기 정치사가 얼마나 암울하였던가를 새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시기의 사상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이같은 어두운 시대에 살면서 절망과 체념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와 국가를 세워 보려는 진지하고도 열의에 찬 노력이 기울여졌으며, 또 그 성과는 눈에 띠게 달라지고 있었다. 불교계에 있어 普照國師 知訥에 의한 修禪社 結社를 통한 신앙운동과 圓妙國師 了世가 중심이 된 白蓮社 結社가 그것이다. 이들은 다같이 지방의 향리나 독서(인)층 출신으로 현실적으로 중앙의 불교교단에서 참여의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의 현상을 타개하고자 당면한 현실과 중앙의 교단을 박차고 도시를 떠나 멀리 깊은 산사에 침잠하여 불교와 그 신앙의 참뜻을 궁구하게 되었다. 지눌은 당시 고려 불교계가 안고 있는 禪과 敎의 갈등과 불교신앙의 참뜻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데 전심하였으며, 요세의 경우에는 신앙의 구도적 자세와 아울러 당시 고통을 받고 있던 많은 민중을 위한 현실구원에 보다 더 노력을 집중하였다고 보인다. 이들이 이룩한 신앙결사나 그 사상은 원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변질되고 쇠퇴하였다. 그러나 특히 지눌이 이룩한 불교신앙의 본질에 대한 사상적인 맥은 다음에 이어져 성리학의 수용을 가능케 하는 사유기반을 구축하였다.

 유교는 고려 초기 이래 정치사상으로서 정립되어 국교적 위치에 있던 불교와 병존하여 왔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오면 오히려 정치적 제반 여건이 좋지 않아 불교교단의 혁신운동에 대응할 만한 이념이나 실천운동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새로이 성리학이 원으로부터 수용되고 불교의 혁신운동도 쇠잔해지는 데 따라 정신적 빈 공간을 대신하게 되었다. 결국 성리학은 당시 새로이 성장하고 있던 신진사대부에 의해 익혀지고 또 이들에 의해 무너져 가던 고려사회를 개혁하거나 혹은 이를 넘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정치이념으로 수용되었다. 성리학은 마침내 불교를 대신하여 고려 말 사상계를 주도하고 고려의 구질서를 대신하여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정치사상으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역사편찬에 있어서 고려 후기는 그 의식면에서 시대적 소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민족의 침략에 따른 오랜 전란과 그 압박을 받으면서 생을 누려야 했던 이 시기에 있어서 더러는 현실에 타협하기도 하고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세계에 흐르는 분노와 저항은 여러 역사서를 통하여 표출되었다. 전기에 편찬된 사서, 특히 관찬서들은 중국문화 수용의 차원에서 그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 유학이나 불교사상을 체득한 지식인들은 당면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고뇌의 표출로써 역사편찬을 통해 강력한 민족의식이나 자주의식을 담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문학분야에 있어서는 宋詞 등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특하고 새로운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민중문학으로서 俗謠는 우리 나라 시가문학에 새 경지를 열고 있다. 특히 漢文學의 경우 수필문학이나 설화문학과 漢詩에 있어 뛰어난 문장가와 시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삼국 이래 漢字를 받아들여 생활화하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이 시기에 한문학의 융성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하겠다.

 예술분야에서는 퇴조의 모습이 뚜렷하다. 고려 후기에는 오랜 전쟁과 이민족의 간섭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고 있었으므로 문화의 꽃을 피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원과의 오랜 교류과정에서 그 영향이 자연히 조형예술 등의 형식에 끼쳐 더러는 특색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 전기나 혹은 그 이전에 볼 수 있었던 미적 감각이나, 창조적이고 의욕이 넘치는 예술의 창작은 대체로 기대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고려 후기 불교계의 동향을 보면 집권무신들에 대해서 항거하던 敎宗寺院이 쇠퇴하고 새로이 禪宗이 대두하게 되었다. 선종은 경전을 통한 복잡한 이론적 공부를 배격하고 參禪에 의한 불교신앙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러한 단순성은 소박한 무인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선종의 혁신성은 문신귀족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무신들에게 환영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義天에 의한 敎觀幷修운동이나 그 동안 교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교세를 떨치지 못하던 선종교단으로서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할 수 있는 교리나 수행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知訥은 기성 교단의 타락과 현실에 대하여 실망한 나머지 이를 비판하고 새로운 신앙의 혁신을 위하여 교단을 떠나 山寺에 침잠하면서 참다운 불교와 그 신앙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구도와 탐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南宗禪의 6祖 慧能의≪六祖壇經≫과 당나라 화엄사상가인 李通玄長者의≪新華嚴經論≫, 그리고 선교통합을 주장한 圭峰 宗密의 영향을 받아 頓悟漸修와 定慧雙修의 새로운 불교사상을 세우게 되었다. 인간 스스로가 부처인 것을 깨닫고 끊임없이 定과 慧를 아울러 닦음으로써 깨침을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눌은 여기서 다시 중국 南宋代 大慧禪師의≪語錄≫을 읽고 크게 깨달아 看話禪을 선 수행의 최고 방법으로 삼기도 하였다. 돈오점수에 관한 한 선과 교의 조화를 주장한 지눌도 간화선에 있어서는 선과 교의 질적 차이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면 역시 지눌에 있어서도 선의 우월성을 엿보게 된다.

 지눌은 이러한 사상체계를 세우면서 추진해 오던 신앙결사를 송광산에 修禪社를 조직하여 대중에게 새로운 불교수행을 널리 확산하려고 하였다. 지눌 이후 수선사를 바탕으로 하여 曹溪宗이 성립되어, 의천에 의해 시도되었던 선·교조화의 노력이 그의 진지한 求道와 사상의 구축으로 선을 주로 하여 교의 융화를 이룩함으로써 한국불교의 독특한 이론과 경지를 마련하였다. 지눌의 뒤를 이은 眞覺國師 慧諶은 스승의 선사상을 대체로 계승하였으며 당시 무신정권의 崔怡와 밀착되어 있었다.

 지눌에 의한 수선사 결사운동에 이어서 天台宗에서도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圓妙國師 了世가 중심이 된 白蓮社 결사이다. 지눌처럼 요세도 개경 교단에서 실망하고 개경을 떠나 한때 지눌의 권유를 받고 함께 선을 닦은 일도 있다. 그러나 지눌과 결별하고 天台敎觀으로 전환하여 天台法華思想에 의한 수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康津에서 백련사 결사를 조직하였다. 백련사도 수선사와 같이 무신정권기의 대표적인 신앙결사로서 불교의 혁신과 민중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수선사가 불교를 혁신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론을 세우고 지방의 지식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였음에 비하여 백련사는 참회행이나 淨土觀에 보다 충실함으로써 민중구제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수선사와 백련사의 신앙결사운동은 사상과 수행방법에 차이가 있었으나 당시 불교계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주도한 것은 전기와 같이 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향리나 지방의 지식층이었으며, 또 종래의 교종과는 달리 지방에 살고 있는 민중을 기반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특히 지눌의 사상이 지방의 지식층에 확산되어 감에 따라 그의 心性論은 性理學 수용에 있어 그 사유기반을 마련하여 주었다고 하겠다.

 원 간섭기에 수선사는 그 전통과 달리 변질된 불교사상을 드러내었다. 지눌의 선교일치사상이나 혜심의 사상 등이 계승되지 못하고 오히려 지눌 이전 선종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을 정도였다. 공민왕 때에 다시 교세를 떨쳤으나 이제는 고려왕실과 밀착되어 왕권강화에 이용되고, 마침내 고려 말에 지눌의 직계법손이 끊어지면서 수선사의 전통은 단절되었다.

 한편 백련사 결사도 이 시기에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원찰인 妙蓮寺로 중심이 옮겨지면서 변질되고 뒤에 趙仁規와 같은 권문세가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에 대신하여 원 간섭기에 迦智山門이 수선사를 대신해서 불교계 중심교단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그 중추적 인물이 一然으로 대표된다. 가지산문은 보수세력의 지원을 받아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려사회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무신정권기 이후 진지하게 추진되었던 불교의 혁신운동은 원 간섭기를 기점으로 그 여맥도 유지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차츰 성리학에 넘겨주게 되었다.

 고려 후기 儒學은 삼국 이래의 전통을 이어 고려 초기에 와서 정치이념으로 정립되면서 국교적 위치에 있던 불교와 병존하여 왔다. 그 동안 불교에 있어서는 지눌이나 요세 등의 혁신운동에 의해 신앙이나 사상면에서 매우 심화되고 있었음을 앞에서 보았다. 특히 지눌의 선불교사상에 있어서 심성론은 인간의 본성이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그 자각을 통하여 妄心에 의해 가려진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고 발현해 갈 수 있다고 하는 새로운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지눌의 定慧結社文이 반포된 지 90년쯤 지난 후, 安珦에 의해 性理學이 소개되고 白頣正에 의해 수용되었다. 이후 주자학은 고려왕조가 망할 때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의 기간을 통하여 당시 이른바 新進士大夫들에 의해 흡수되었으며 차츰 중요한 학문적·정치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에는 원 간섭기에 들어가 지눌 등의 불교혁신운동도 쇠퇴하여 신앙이나 사상면에서도 매우 혼미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었고, 계속된 불교교단의 타락과 세속화 경향이 더해져 갔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정세와도 같이 고려사회는 정신적 공백상태에 처해져 새로운 지도이념의 수용이 절실한 시기였다. 여기에 새로 수용된 성리학은 기존의 고려사회를 혁신하여 국가를 재건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또는 고려의 기존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지도원리로서 삼게 되었다. 한편 성리학이 수용되는 데 있어서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도 있으나 이미 지눌에 의한 頓悟漸修의 논리는 성리학의 理氣說과 思惟구조에 있어 매우 근접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돈오와 그 점수를 통하여 成佛할 수 있다고 하여, 마치 이기설에서 인간의 본성은 理이므로 기질의 性의 혼탁을 맑게 하면 누구나 그 본성을 회복하고 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대비될 수 있을 만큼 근접되고 있다. 당시 쇠잔해가고 있던 불교는 결국 성리학에 그 자리를 내주고 이른바 유불교체라고 하는 사상적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리학은 이색과 정도전으로 대비하여 그 사상적 차이를 살필 수 있다. 이들은 정통으로서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聖學論을 익히고 이를 통하여 수양을 거쳐 성인, 즉 도덕적 완성자가 되어 삼대의 이상정치를 지향하였다. 이들은 詞章學 대신에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經世之學으로 성리학을 익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대부 사이에는 현실인식과 그 타개방안에 차이가 있었다. 고려왕조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입장과 체제를 변혁하여 역성혁명까지도 추진하려는 혁신적인 계층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李穀과 李穡 부자의 경우는 고려정계에 진출한 이래 정치적 기반을 굳히고 많은 곳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 부자는 신진사대부 출신이지만 이제는 대토지소유자이고 왕실과 밀착되어 있던 실력자였다.

 한편 정도전의 경우는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으나 이색에 비하여 열세이고 정치적·경제적 지반도 미약하였다.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결집된 신진사대부가 여말의 정치현안과 그 정치행동을 달리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정치·경제적 지반의 차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색을 중심으로 한 일파는 유교와 불교가 추구하는 목표가 궁극적으로는 같다는 儒佛同道論을 제창하고 불교를 옹호하고 다만 운영상의 문제, 즉 잘못된 폐단만을 시정하려는 입장이었다. 이색은 당시의 사회변혁에 순응한 개혁이념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으나 기존의 불교사상에다 성리학을 결합시키려 하였다. 그러므로 이색은 禮論을 중시하고「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여말에 발생하는 정치·사회의 문제를 인성과 인간의 윤리성을 통하여 지배질서를 다지려고 하였다.

 반대로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일파는 성리학에 충실하고 道統과 道學을 내세우며 斥佛論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불교의 비현실성·반윤리성·반도덕성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고려왕조와 이해를 같이한 불교를 배척하고 이와 연결된 이색 등의 반대파를 비판하였다. 이들은 불교 대신 성리학적 사회체제를 지향하였다. 나아가서 당시 유·불 등 혼용된 정치체제를 개혁하여 성리학적 이념을 갖춘 정치체제와 권력구조를 세우려 하였다. 이들은 재상 중심의 정치론과 이상군주론을 제기하고 민생안정을 도모하고 이를 위해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사대부 전체의 이해를 제도적으로 보장받으려 하였다. 이들은 마침내 위화도회군을 통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주자학에 입각한 정치·사회개혁을 급진적으로 단행하고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이리하여 신유학인 성리학은 정치이념으로서 굳건한 터전을 마련하고, 이전부터 共生並進하여 오던 불교를 공적 질서에서 몰아내고, 일원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으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 와서 10여 종이 넘는 역사서가 편찬되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고종 때 李奎報가 지은 <東明王篇>과 역시 고종 때 覺訓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海東高僧傳≫이 있고 충렬왕 때 一然이 펴낸 ≪三國遺事≫, 그리고 李承休가 지은 ≪帝王韻紀≫ 등이 있다. 이들 사서가 모두 민족의 역사전통에 대한 강열한 자아의식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규보는<동명왕편>에서 전통적 神異史觀과 이 땅의 역사를 天과 직결시켜, 그 후에 일연과 이승휴에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단서를 열고 있다. 각훈은 그의≪해동고승전≫에서 우리 나라의 불교사를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어 당시 고려불교의 발전을 토대로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당시 유교사관에 기초한 관찬사서가 편찬되고 있던 것과 대비를 이룬다. ≪삼국유사≫는 이보다 130여 년 앞서 유교사관에 의해 편찬된 正史인 ≪三國史記≫와는 달리 불교사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과 아울러 설화나 신화를 수록하고 있는 개인의 저술이다. ≪삼국사기≫가 중국의 정사체제에 따라 편찬된 데 대하여 ≪삼국유사≫는 설화나 신화 등 神異的 사실을 많이 담고 있어 신이사관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서, 전자의 儒敎的 合理史觀에 대한 비판의 의미도 지닌다고 평가된다. 따라서≪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역사의 출발을 단군신화에서 시작하고 있다.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은 중국이 아닌 天에서 온 것이라 하여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자주의식을 담고 있다. 이것은 몽고의 침입과 항쟁에서 패배하고 다시 그들의 간섭을 받고 있던 현실에서 일어난 민족자주의식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삼국유사≫를 논의하는 가운데 이것이 일연의 단독 찬술이 아니라 그 문도와 공동으로 정리하였으리라는 견해가 있다. 물론 가능한 추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일연의 편찬의도가 지배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은 분명한 것이며 이민족의 침입과 복속국의 처지에 있던 당시 일연을 중심으로 한 불교지성인들의 공동의 고뇌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삼국유사≫와 같은 시기에 나온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경우에도 우리 역사의 서술이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여기서도 하늘과 연결된 단군을 우리의 공동시조로 인식하는 민족의식을 강조하고 있으며, 우리의 역사를 중국과 대등하게 파악하여 자주성을 드러내고 있다. 일연과 이승휴에 이어 李齊賢이 남긴 <忠憲王世家>와 史贊 등에서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찾을 수 있다. 이승휴나 이제현에 있어 원 간섭기에 살면서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내면적으로 민족적 자아를 회복하려던 유교지식인들의 고뇌를 간파할 수 있다.

 고려 후기의 문학에 있어 새로운 경향은 景幾體歌의 등장이었다. 宋詞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신진 문인관료들의 호사스러우면서도 득의에 차고 희망에 넘친 현실생활이 잘 그려져 있다.<翰林別曲>·<關東別曲>·<竹溪別曲>이 바로 그것이다. 또 고려 후기 문인관료들의 문학으로 漁父歌가 있다. 어부가는 같은 문인관료들의 노래이지만 경기체가가 득의에 차고 현실에 만족한 관료적 문학인데 반하여 물러나서 강호에 묻혀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處士的 文學이었다.

 한편 高麗歌謠라고 알려진 俗謠 또는 長歌는 민요를 바탕으로 자라난 민중들의 노래로서 그것은 작가가 분명치 않다. 장가로는 <動動>·<井邑詞>·<鄭瓜亭>·<處容歌>·<靑山別曲>·<雙花店> 등 토속적이며 솔직한 감정을 나타내는 형식으로 읊은 노래로서 우리 나라 詩歌文學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것이다.

 한문학이 전기에 이어 보다 높은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한문을 중심으로 살고 있던 시대인 만큼 당시의 문인이나 학자들은 모두 한문학자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 학자로는 李仁老·崔滋·李奎報 등을 위시하여 李齊賢·李穀·李穡·鄭夢周·李崇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수필형식의 稗官文學이라든가 또는 사물을 의인화한 說話文學의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漢詩도 난숙한 경지에 이르러 특히 이인로와 이규보가 명성을 떨쳤고 이규보는 고구려 건국을 노래한 <동명왕편>에서 종래의 한문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문장체를 구사함으로써 새로운 문학세계를 추구하였다. 고려 말의 이제현과 이색은 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고려 후기의 예술은 전반적으로 퇴조를 보이고 있다. 오랜 전란과 원의 간섭으로 불안과 위축 속에서 살고 있던 시대를 반영하기도 한다. 다만 원과 교류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조형미술의 형태와 양식에서 특색을 나타내기도 한다. 원의 영향을 받은 多包樣式의 장엄한 목조건축물이 있고 석조물 역시 원의 영향을 받은 이색적인 석탑이 조영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書畵에 있어서도 원의 영향이 미쳐 松雪體나 北畵의 영향을 받고 있고 佛畵의 경우에는 일본에 흘러들어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어 장엄하고 화려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李熙德>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