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1) 무신정권기 불교계의 변화와 조계종의 대두
  • (1) 무신정권기 불교계의 현황

(1) 무신정권기 불교계의 현황

 고려 귀족사회는 인종대 이후 제모순으로 말미암아 李資謙亂과 妙淸亂이 일어나고 뒤이어 무신란이 일어나 정치적·사회적 갈등이 노출되었고, 또한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부흥운동까지 겪게 된다.0001) 閔賢九,<高麗中期 三國復興運動의 역사적 의미>(≪韓國史 市民講座≫5, 一潮閣, 1989) 참조. 의종 24년(1170)에 일어난 무신란은 무신간에 격렬한 갈등을 겪다가 최씨정권이 들어서면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 후 무신정권은 일찍이 없었던 몽고침략을 겪으면서도 원종 11년(1270)까지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무신집권하에서는 종래 귀족사회체제가 송두리째 무너졌으며, 불교계도 새로운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신란이 일어나기 이전 고려 중기의 불교계는 華嚴宗·法相宗 등 교종이 귀족문벌과 결합하여 일세를 풍미했지만, 논리의 관념화와 풍부한 사원경제에 안주하여 대중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이러한 불교계를 개혁할 인물이 등장했으니 그가 義天(1055∼1101)이었다. 그는 본래 승려로 교학의 측면에서 性相의 兼學을 내세워 법상종에 대해 우위를 주장했고, 실천의 측면에서는 敎觀幷修를 주장하여 觀行이 결여된 기존 화엄종을 신랄히 비판하였다.0002) 崔柄憲,<東洋佛敎史上의 韓國佛敎>(≪韓國史 市民講座≫4, 1989), 35∼39쪽. 그 결과 그는 天台宗을 창립하여 선종의 승려를 규합해 고려 중기의 불교계를 이끌어가는 중심적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무신란은 기존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던 교종세력에게는 큰 변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교종세력은 귀족세력과 결합하여 사회·경제·정치적으로 특권을 누려왔지만,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종래의 귀족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교종세력 또한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종세력은 문신귀족들과 결탁하여 무신정권에 저항하였는데, 이것은 무신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큰 위협이기도 하였다.0003) 金鍾國,<高麗武臣政權と僧徒の對立抗爭に關する一考察>(≪朝鮮學報≫21·22, 1961). 무신정권이 안정기에 들어서기 전에는 부분적으로 저항했지만, 최씨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위압과 폭력으로 강압정치를 실시하자 교종사찰이 조직적으로 항전태세를 갖추고 도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0004) 閔賢九,<月南寺址 眞覺國師碑의 陰記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36, 1973), 30∼31쪽.

 명종 4년(1174) 정월에 歸法寺 승려 100여 명이 봉기한 사건은 최씨정권이 들어서기 전의 불교계에 있었던 反武臣政權을 대표할 만한 사례이다. 이 사건으로 李義方이 동원한 1,000여 명의 군대로부터 수십 명의 승려들이 희생을 당하였다. 즉 귀법사 승려의 죽음으로 인해 重光寺·弘護寺 등 여러 절의 승려 2,000여 명이 李義方 형제를 죽이기 위해 다시 성문 앞에 집결하자, 이의방은 府兵을 모아 중광사·홍호사·龍興寺·妙智寺·福興寺 등의 절을 파괴하였으며 쌍방간에 많은 인명의 손실을 초래하였다.0005)≪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정월.

 명종 26년 崔忠獻이 李義旼을 제거하면서 무신 상호간에 벌어졌던 26년간의 정쟁은 마감됐지만,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사원세력이 조직적으로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가담하게 되었다. 명종 27년 9월 興王寺의 승려 寥一의 움직임과 大禪師 淵湛 등 10여 명의 승려가 中書令 杜景升, 樞密院副使 柳得義, 上將軍 高安祐, 大將軍 白富公, 親從將軍 周元迪, 將軍 石城柱, 侍郞 李尙敦, 郞中 宋韙·廉克鬈, 御史 申光漢 등과 함께 영남으로 유배된 것도 反崔忠獻運動을 도모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0006)≪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7년 9월.
≪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신종 5년(1202) 10월에 符仁寺·桐華寺 승려들이 淸道 雲門山의 농민과 함께 일으킨 반란이라든가,0007)≪高麗史節要≫권 14, 신종 5년 10월. 신종 6년 9월에 浮石寺·符仁寺·雙岩寺 승려들이 일으킨 난은0008)≪高麗史節要≫권 14, 신종 6년 9월. 지방의 경우이기는 하나 무신정권으로서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최충헌에게 도전한 사원세력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사건은 고종 4년(1217) 개경 근처의 사찰에서 발생하였다. 개경 가까이 접근해 온 거란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동원된 興王寺·弘圓寺·景福寺·王輪寺·安養寺·修理寺 등의 승려들이 최충헌을 죽이기 위해 성안으로 들이닥쳐 최충헌의 家兵과 싸우다가 승군 300명이 희생되었다. 뒤이어 최충헌이 성문을 닫고 도망간 승군을 찾아 모두 죽이니 때마침 내린 비에 씻긴 피가 냇물을 이루었으며, 또다시 300명을 南溪寺 냇가에서 죽이니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은 거의 800명이나 되었다.0009)≪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정월.

 최충헌은 반기를 든 사원세력 등에 대해 물샐틈없는 경비를 강화하였다.0010)≪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수많은 승려의 살상은 최씨정권이 불교계에 대해 새로운 대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불교계를 등지고 정권을 공고히 한다는 것은 고려 사회체제에서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최충헌은 집권 첫해인 명종 26년(1196)에 朝臣을 많이 살상했으므로 인심이 흉흉하자 使者를 여러 도에 보내 위무한 적이 있듯이,0011)≪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6년 5월. 불교계의 환심을 사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들을 조계종의 승려로 만들고0012)<崔忠獻墓誌>(≪朝鮮金石總覽≫상, 朝鮮總督府, 1919, 445쪽)에 의하면 靜和宅主가 낳은 둘째 아들을 출가시켜 조계종에 속하게 했다. 그리고 李奎報의<故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東國李相國集≫권 35)에서도 아들을 출가시켰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종교심의 발로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李奎報의<捨子削髮齋疏>(≪東國李相國集≫권 41)에 의하면 사랑하는 자식을 출가시켜 나라의 기틀이 견고해지고 王業이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바랐음을 엿볼 수 있다. 고승에게 僧階를 후하게 내리는 선심을 보였다.0013) 李奎報의<第二世故斷俗寺住持(略)眞覺國師碑銘>(≪東國李相國集≫권 35)에서 慧諶이 選試를 거치지 않고 大禪師 僧階를 제수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최씨무신정권이 그 정당성을 얻기 위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문에 나타난 그의 고결한 인격과 승속이 우러러보는 인품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최충헌이 선종을 선택한 것은 정권을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 교종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한 데서도 기인하는 것인데, 선종을 회생시키는 데 최충헌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0014) 李奎報,<昌福寺談禪牓>(≪東國李相國集≫권 25)에 의하면 고려시대 왕족이나 귀족들이 사찰을 세운다거나 重創하는 것은 흔한 예이나, 崔忠獻이 선종 부흥에 기여한 공은 유별난 의미가 있다. 특히 談禪法會는 본래 禪을 강론하는 자리지만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복을 비는 목적의식을 갖는다. 이 점에서 최충헌의 지원은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는 데 일정한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씨정권의 제2대 인물인 崔怡는 가장 오랜 30년간 정권을 장악한 인물로, 아버지 못지 않게 정권유지를 위해 불교계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그 자신의 집권과정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에0015)≪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정권안정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아들 萬宗과 萬全(뒷날 沆)을 松廣寺에 보내 승려로 만들고 禪師의 승계를 내렸다.0016) 위와 같음. 崔怡가 두 아들을 출가시킨 것은 亂을 도모할까 두려워 출가시켰다고 했지만, 불교계 그것도 당시 가장 주목받던 송광사에 보낸 것은 불교계에 대한 심정적 동정과 앞으로 선종의 대표적 사찰 송광사를 장악하기 위한 예비적 포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修禪社 2세 眞覺國師 慧諶(1158∼1234)을 개경으로 불러들이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자 두 아들에게 佛事에 필요한 물건을 보내 환심을 사고자 노력하였다.0017)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35, 碑銘·墓誌<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幷序>. 이 때 최이가 사자를 보내 답장을 요구하자, 혜심은 마지못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야윈 학 고요히 소나무 꼭대기 달 위에 섰나니

한가로운 구름은 고갯마루 바람을 가벼이 좇네

그 가운데 면목은 천 리가 같거니

어찌 다시 한 통의 편지를 희롱하리

 (冲止,<謝崔怡送茶香韻>,≪圓鑑國師歌頌≫;≪韓國佛敎全書≫6, 395쪽).0018) 圓鑑國師 冲止(1226∼1293)의 저서에 이 시가 수록되어 있으나 실은 慧諶의 시로 보고 있다(秦星圭,<眞覺國師 慧諶의 現實認識>,≪又仁金龍德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8, 91쪽).

 이 시를 통해 수선사(송광사)를 장악하고자 하는 최이의 저의를 꿰뚫어 보는 혜심의 형안을 엿볼 수 있다. 최이는 불교계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고, 고종 10년(1223)에 반발이 가장 심했던 흥왕사에 무려 황금 200근으로 만든 13층탑과 화병을 보내기도 하였으며,0019)≪高麗史節要≫권 15, 고종 10년 8월. 고종 17년에는 사원세력 장악을 시도하여 선교사원의 창건 연월과 실제의 상황을 조사해 장적을 만들기도 하였다.0020)≪三國遺事≫권 4, 義解 5, 寶壤梨木. 더 나아가 최이는 무신정권의 정신적 지주기능을 담당했던 禪源社(수선사의 분사)를 고종 32년에 창건하였다. 선원사가 창건되자 眞明國師 混元을 낙성회에 主盟으로 초청하고 수선사 제4세로 자리를 잇도록 조치하여0021) 金 坵,<臥龍山慈雲寺王師贈諡眞明國師碑銘幷序>(≪止浦集≫권 3 ;≪東文選≫권 117). 사실상 선종을 장악하였다. 또 고종 18년에는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大藏經 조판이나 불경 간행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최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0022)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25, 記·牓文·雜著 大藏刻板君臣祈告文.
崔凡述,<海印寺寺刊鏤板目錄>(≪東方學志≫11, 延世大, 1970).
朴相國 編,≪全國寺刹所藏木板集≫(文化財管理局, 1987).
최씨정권은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수많은 인명 피해로 인한 정치적 불안을 불교를 통해 해소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무신정권하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江華遷都로 개경 중심의 사찰은 약화되고 지방의 사찰들이 새로운 중심무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수선사나 白蓮社 같은 사찰이 대표적으로, 그 결과 불교의 성격이나 내용에도 질적인 변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불교계의 지도자도 왕실이나 중앙귀족에서 지방향리나 독서층 출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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