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1) 무신정권기 불교계의 변화와 조계종의 대두
  • (2) 무신정권과 선종

(2) 무신정권과 선종

 최씨무신정권이 정권적 차원에서 불교계와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최씨정권이 자신에게 끝까지 도전한 교종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대신할 다른 철학이 없다는 점에서도 최씨정권과 선종과의 만남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신정권 이후 고려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은 선종에 있어서 曹溪宗의 확립이라 하겠다.

 知訥(1158∼1210)은 조계종의 확립자로 고려 중기 타락한 불교계에 頓悟漸修와 定慧結社를 내세워 정화운동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구체적 활동이 결사운동으로 나타났으니0023) 知訥의 修禪社 결사운동에 대해서는 秦星圭,<高麗後期 修禪社의 結社運動>(≪韓國學報≫36, 一志社, 1984) 참조. 그 중심 사찰은 개경을 벗어나 한반도 서남에 위치한 수선사였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누구보다도 민감했던 최씨무신정권은 신종 3년(1200)에 사찰 이름을 정혜사에서 수선사로 바꾸는 데 기여하였다.0024) 知訥,≪勸修定慧結社文≫(≪韓國佛敎全書≫4, 707쪽). 같은 내용이<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東文選≫권 117)에도 보인다. 지눌 당시에는 최씨정권이 적극적으로 후원을 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이 때에 오면 적극적 후원이 이루어지고 있다.0025) 閔賢九, 앞의 글.
秦星圭,<眞覺國師 慧諶의 修禪社活動>(≪中央史論≫5, 1987).
그 이유는 당시 수선사가 불교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靜覺國師 志謙(1145∼1229)은 임종할 때 당시 국왕인 고종과 晉陽公 최이와 수선사(송광사)주 진각국사 혜심에게 세 통의 편지를 남겼다.0026)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35, 碑銘·墓誌 故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奉宣述. 고종은 실권이 없는 왕이고, 최이는 왕위는 없지만 실질적으로 왕이나 다름없고 혜심은 법왕과 같은 존재였다. 무신정권으로서는 법왕과 같은 존재가 머물고 있는 수선사를 자신의 정신적 후원자로 이용하고자 한 것은 시대적 요청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수선사에는 지눌의 시대적 정신을 이은 뛰어난 고승들이 머물러 있었기0027) 지눌 이후 眞覺國師 慧諶, 淸眞國師 夢如, 眞明國師 混元, 圓悟國師 天英, 圓鑑國師 冲止 등 고려 후기의 불교계를 이끌어간 인물들이 수선사 法燈을 차례로 이었다. 때문일 것이다.

 무신정권이 현실적으로 수선사를 지원해 선종을 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0028) 주로 ① 무인의 단순성이나 혁신적 기질에 맞다는 것과 ②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 등에서 무신정권이 선종을 택한 이유를 찾고 있다.
閔賢九, 앞의 글.
金塘澤,<崔氏武人政權과 修禪社>(≪歷史學硏究≫10, 全南大, 1981).
兪瑩淑,<崔氏武臣政權과 曹溪宗>(≪白山學報≫33, 1986).
그러나 秦星圭는<崔氏武臣政權과 禪宗>(≪佛敎硏究≫6·7, 韓國佛敎硏究院, 1990)에서 무신정권이 선종을 택한 이유를 선의 논리에서 찾으려고 시도했고, 그 선은 臨濟禪의 성격임을 주장하였다.
한마디로 선의 功効 때문이다. 大安寺에서 談禪法會를 개최하면서 베푼 牓文에서, 선의 효과는 국경을 침입한 외적을 물리쳐 국가가 태평해질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0029)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25, 記·牓文·雜著 大安寺同前牓. 이러한 예는 무신집권기에 불사가 행해진 곳에서 국가의 안정과 외침에 대비해 선의 공효가 막대함을 설파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0030)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25, 記·牓文·雜著 西普通寺行同前牓. 그 밖에도 同前願請說禪文·禪會請說禪文·同前請說禪文·請說禪文·廣明寺禪會設齋請說禪文 등이 있다(위의 책, 권 41). 특히 주목되는 것은 위의 인용문이 이규보가 崔忠獻을 대신해 집필한 것이기는 하나 최충헌의 선의 공효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충헌·최이 부자는 누구보다 선의 기능을 깊이 믿고 있었다. 이 당시 최고의 문인 李奎報는 談禪牓을 통해 적병과 재앙을 물리치는 데 禪法이 맹렬한 것은 見性과 證智로 헤아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0031)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25, 記·牓文·雜著 西普通寺行同前牓. 즉 견성은 자신의 심성을 알아 모든 법의 실상인 當體와 일치하는 것이고, 증지는 수행한 공이 진리에 들어맞아 모든 事象과 도리에 대해 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므로 선법은 자연히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규보는 뒤이어 선법이 위계가 없기 때문에 무슨 일에든지 곧장 뛰어나가 해결하므로 효과가 가장 크다고 하였다. 이 당시 담선방은 外護者가 최충헌·최이 부자인 것으로 보아, 이규보의 선의 공효에 대한 믿음을 이들 부자의 견해로 보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담선방에서 주장되는 說禪文은 曹溪大師 慧能(638∼713)의 불법을 의지한다거나,0032)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41, 釋道疏 禪會請說禪文. 이 頓門의 가르침은 불법의 근본이 된다거나,0033)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41, 釋道疏 同前願請說禪文. 부처는 곧 이 마음이요 이 마음은 곧 부처라는0034)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41, 釋道疏 同前禪會請說禪文. 등의 말이 모두 頓悟漸修를 주장하는 지눌의 선사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눌의 이런 주장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송나라 宗杲(1089∼1163)의≪大慧語錄≫이나 당나라 慧能의≪六祖壇經≫과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지눌이 일찍이≪대혜어록≫이나≪육조단경≫을 통해 깨침을 얻은 사실은 비명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데0035) 崔惟淸,<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東文選≫권 117, 106∼113쪽 ;≪朝鮮金石總覽≫ 하, 49쪽;≪朝鮮佛敎通史≫ 하, 337쪽). 지눌에게 영향을 끼친 대혜 종고는 臨濟義玄(787∼866)의 제11대 法孫이고 楊岐派의 5세다. 그러므로 보조국사 3문 가운데 徑截門은 결국 臨濟禪과 맞닿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0036) 徐閏吉,<高麗末 臨濟禪의 受容>(≪韓國禪思想硏究≫, 東國大 出版部, 1984), 208쪽
高翊晉,<高麗佛敎思想의 護國的 展開(Ⅱ)>(≪佛敎學報≫14, 東國大, 1977), 53쪽.
다시 말해 무신정권과 결합된 선종의 사상 가운데 바로 깨쳐 들어가는 門인 경절문은 임제선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당 말기의 선승인 의현의 禪風은 행동적이며 현재적이었다.0037) 西翁演義,<解題>(≪臨濟錄≫, 東西文化院, 1974), 12쪽. 그것은, 그가 머물러 있던 河北省 鎭州의 臨濟院이 당의 중앙정부와 대결한 하북 3진의 하나로서 당나라 왕실의 지배가 형식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신흥 권력자사회의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파괴와 건설의 격동적 교체가 있고 여기에 대처할 주체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당나라 말기의 사회적 분위기와 무신정권하의 사회적 분위기가 강력한 군사와 주체성을 요구하였다는 점은 일맥상통한다고 보겠다. 따라서 호탕한 기질이 녹아 있는 임제선이 무신들의 입맛에 맞았을 것이므로, 임제선이 河北藩鎭 신흥무인사회의 통치자들에게 빛난 것처럼 고려무신정권 담당자들에게도 환영받았을 것이다. 나말여초 일정한 거주처가 없는 선승들에게는 호족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듯이, 무신정권은 경제적 지원을 통해 정권을 지지해 줄 사상적 옹호세력으로서 선종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0038) 무신정권이 선을 택한 데는 무인이라는 직업에서도 그 이유의 일단이 찾아진다. 옛날부터 무사나 군인들은 언제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 결정적 순간을 충분히 맞이하기 위해서는 선에 의존했다는 견해가 참조된다(佑橋法龍,<禪と政治家·軍人>,≪講座 禪≫5, 筑摩書房, 1974,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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