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1) 무신정권기 불교계의 변화와 조계종의 대두
  • (3) 조계종의 대두

(3) 조계종의 대두

 무신정권시대의 불교계는 무신집권자의 의도에 따라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조계종의 대두는 불교사에 주목할 만하다.

 우선 조계종의 성립에 대해서는 견해들이 엇갈리고 있다. 먼저 戒律宗·法相宗·法性宗·圓融宗·天台宗 등 5종을 5교로 보고 曹溪宗과 禪寂宗을 양종으로 보면서 조계종은 재래의 9산의 총칭인 선적종과는 달리 지눌에 의해 개창·독립된 선종의 한 갈래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0039) 李能和,≪朝鮮佛敎通史≫하(新文館, 1918), 479쪽, 五敎兩宗祈禱平賊. 그 후 이와 달리 戒律宗·法相宗·涅槃宗·法性宗·圓融宗·禪寂宗 등 6종의 5교종과 1선종, 그리고 의천에 의해 개립된 또 하나의 선종인 天台宗과 구별하기 위해 6조 혜능의 법맥을 이은 선적종을 조계종이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0040) 金映遂,<五敎兩宗에 對하여>(≪震檀學報≫8, 1937).
―――,<曹溪禪宗에 就하여>(≪震檀學報≫9, 1938).
문제는 천태종을 교종으로 볼 것인가 선종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0041) 天台宗이 敎宗에 속하는가 禪宗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이 많지만, 당시에는 선종으로 보고 있었다. 즉 천태종 僧選에 합격한 敎雄이 인종 13년(1135) 大禪師가 되었고(≪朝鮮金石總覽≫상, 國淸寺妙應大禪師墓誌), 천태종사찰 珍丘寺 주지였던 混其도 대선사였다(權近,≪陽村集≫권 12, 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華法會衆目記). 세종 6년(1424)에 7宗을 禪·敎兩宗으로 폐합시킬 때 天台宗·摠南宗·曹溪宗을 합하여 禪宗이라고 한 것을 보면 천태종을 선종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선적종과 조계종이 같다거나 다르다거나의 여부이다. 앞서 선적종과 조계종이 같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도 있지만0042) 一然의 碑銘에서 “高麗國義興華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銘幷序”라 한 것과<麟角寺無無堂記>(李穡,≪牧隱文藁≫권 1)에서 “曹溪都大禪師諝公 新被寵命 領袖九山”이라 한 사실 등을 통해 선적종과 조계종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문을 갖게 하는 자료도 보이고 있어0043) 李奎報,<文禪師哀詞>(≪東國李相國集≫권 37)에서는 “落髮禪宗迦智山門”이라 하고 曹溪宗迦智山門이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禪宗을 선적종으로 보아야 할지 다만 선종으로 보아야 할지는 의문이다. 李在烈은 조계종과 구분해서 선적종으로 보고 있다(李在烈,<高麗 五敎兩宗의 史的 考察>,≪史學硏究≫4, 1959).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각각 일리가 있지만 고려불교사에는 5교의 문제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曹溪란 명칭은 중국 廣東省 韶州府 雙峯山에 있던 지명으로,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혜능이 이 곳에 寶林寺를 짓고 선풍을 선양하게 되면서 뒷사람들이 혜능을 조계대사로 부르고 慧能禪을 曹溪禪으로 부른 데서 연원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조계종이라 부른 적이 없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나말여초 선종이 수용되어 9산이 성립되었지만 조계종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의종 12년(1158)에 죽은 大鑑國師 坦然의 비문에 조계종이란 명칭이 처음으로 보인다.0044)<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銘幷序>(≪朝鮮金石總覽≫상, 562쪽). 이 비는 대감국사가 입적한 해에 李之茂가 찬술했으나 14년이 지난 명종 2년(1172)에 건립되었다.

 조계종이란 이름이 대감국사 탄연이 입적하던 해 지어진 비문에 보이므로, 지눌이 조계종을 개창했다고 볼 수는 없다. 조계종이 지눌에 의해 개창되었다고 하는 것은 지눌이 머물고 있던 松廣山 定慧社를 曹溪山 修禪社로 바꾸고 社額을 하사받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0045) 安啓賢,<曹溪宗과 五敎兩宗>(≪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295쪽.
<松廣寺沿革>(≪曹溪山松廣寺史庫≫, 亞細亞文化社, 1977), 58쪽.

 조계종이란 명칭이 국가의 공인 아래 사용된 것은 지눌이 죽은 지 3∼4년이 지난 康宗 때이다. 진각국사 혜심이 강종에게 올린 글에 “社文을 올리니 聖押을 내려주시면”0046) 慧諶,<上康宗大王>(≪眞覺國師語錄≫;≪韓國佛敎全書≫6, 40쪽 상). 이 구절에서 社文의 내용이 宗名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지눌·혜심의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틀림없다고 보인다.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혜심이 강종에게 조계종 명칭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한 내용으로 보인다.

 조계종의 명칭은 지눌 이전에도 사용되고 있었지만, 지눌 당시에 세운<大乘禪宗曹溪山修禪社重刱記>에는 조계종이란 명칭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0047)≪曹溪山松廣寺史庫≫(亞細亞文化社, 1977), 183쪽. 그러나 조계종이 지눌로부터 비롯될 수 있었던 것은 지눌의 위대한 인격과 실천력 등이 무신정권기의 타락한 고려불교계를 개혁하는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눌이 명종 12년(1182) 普濟寺의 담선법회에 참석한 후 세속의 명리에 젖어 있는 불교계를 비판하면서부터 개혁과 정화의 횃불은 예견되었던 것이다.0048) 명종 20년(1190)에 발표된≪勸修定慧結社文≫에 개혁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즉 정혜사결사운동이 그것이다. 신종 3년(1200) 송광산 吉祥寺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왕실과 최충헌의 지원으로 정혜결사의 명칭을 수선사결사로 바꾸었다. 수선사에 안착한 만큼 그 후 지눌의 과제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었다. 이후 10여 년간 수선사에 머물면서 승속을 지도한 결과 명예와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기도 하고 王·公·士·庶로서 입사한 사람은 수백 명이나 되었다.0049) 崔惟淸,<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東文選≫권 117). 또한 3種門인 惺寂等持門·圓頓信解門·徑截門을 열자 信行과 信入하는 자가 많아 禪學의 융성함이 근세에 비길 데가 없었다 한다. 3종문은 지눌의 일관된 사상인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이루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성적등지문은 실천수행의 방법으로 돈오점수설에 바탕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깨친 후 정혜(성적)를 등지(쌍수)할 것을 강조한 것이니 곧 行을 말하는 것이다. 원돈신해문은 화엄사상을 선에 수용한 것으로 돈오점수에 바탕한 것이나, 성적등지문보다 한 차원 심화된 단계로 禪·敎대립을 지양하려는 의지가 있다. 곧 信을 말하는 것이다. 경절문은 바로 깨쳐 들어가는 문이란 뜻으로 祖師의 活句를 참고해 知解障碍를 떨쳐버리라는 것이니, 곧 證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눌의 일관된 정혜쌍수와 돈오점수의 선사상은 13세기 지식계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농민층이나 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0050) 高翊晋,<圓妙國師 了世의 白蓮結社>(≪韓國天台思想硏究≫, 東國大 出版部, 1983), 213∼219쪽. 수선사에 입사한 인물들이 왕을 비롯한 지식계층과 지배층이 많은 것으로 볼 때, 선에 대한 본원적인 추구에 귀착함으로써 타력적인 정토관을 극복하려는데 중점이 두어졌던 것이다.

 지눌의 뒤를 이어 2세로 등장한 진각국사 혜심은 24년간 수선사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특히 무신정권 지배자인 최이·최항 등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조계종으로서의 종단확립을 굳히게 되었다.0051)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35, 碑銘·墓誌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幷序.
慧諶,<答崔尙書禹>(≪眞覺國師語錄≫;≪韓國佛敎全書≫6, 42∼43쪽).
특히 그의≪禪門拈頌≫30권은 여러 선사들의 어록 가운데서 1,125則의 禪問答을 모아 놓은 것이다. 최이의 아들 萬宗(斷俗寺主持)의 재정적 지원을 얻어 公案 347則을 더 수집해 고종 30년(1243)에 간행하였다.0052) 鄭 晏,<增補拈頌跋>(≪禪門拈頌拈頌說話會本≫권 30 ;≪韓國佛敎全書≫5, 923쪽 상). 혜심이 이 방대한 작업을 시작한 의도는 국난의 극복을 위해 禪道를 이용하자는 것이었고,0053) 無衣子,<禪門拈頌集序>(≪禪門拈頌拈頌說話會本≫권 1 ;≪韓國佛敎全書≫5, 1쪽 상). 만종도 최이의 武運長久와 國泰民安을 기원하고 있음을 볼 때,0054)<萬宗記>(≪禪門拈頌拈頌說話會本≫권 30 ;≪韓國佛敎全書≫5, 923쪽 상). 당시로서는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불사인지 가늠할 수 있다.

 혜심의 사상 가운데 「無心」의 문제는 중요하다. 禪境에 들기 위해서는 화두를 깨쳐야 하며 화두를 깨치기 위해서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에 집착하면 黑山窟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무심」을 주장한 것이다. 강종에게 무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일은 특히 유명하다.

無心이란 마음도 없고 마음 없음도 없으며 마음 없음이 다했다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마음이다(慧諶,<上康宗大王心要>,≪眞覺國師語錄≫;≪韓國佛敎全書≫6, 23쪽 하).

 이 무심한 상태는 시비선악에도 움직임이 없어서 佛과 祖師가 되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강종의 정치적 생명은 오로지 최충헌의 손아귀에 있었고 태자로 있을 때 아버지 명종과 함께 쫓겨난 적이 있었으므로 무심의 경지가 강종의 정치적 불안을 위해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혜심과 관계를 맺은 인물로 靜和宅主(최충헌의 처)·崔瑀(怡)·崔洪胤·鄭晏(奮) 등이 돋보인다. 혜심은 학문적 출발이 유학에서 비롯되어 불교로 옮겨 갔으므로 유학에 대한 인식태도는 유별난 바가 있다. 유·불이 같다거나 老子는 迦葉菩薩이고 孔子는 儒童菩薩이라 하여 儒·道의 宗은 불법에 근원하지만 실상은 같다는0055) 慧諶,<答崔參政洪胤>(≪眞覺國師語錄≫;≪韓國佛敎全書≫ 6, 46∼47쪽). 주장은 도의 궁극적 경지에 이르면 모두 관통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로 본다면 혜심은 유·불의 조화를 추구하여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지식인의 역할을 한 것으로서도 의의를 가진다. 즉 성리학을 이해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수선사 불교에서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혜심의 뒤를 이어 3세 淸眞國師 夢如(?∼252),0056) 碑銘이 남아 있지 않아 행적 및 활동상황을 알 수 없다. 4세 眞明國師 混元(1191∼1271),0057) 金 坵,<臥龍山慈雲寺王師贈諡眞明國師碑銘幷序>(≪止浦集≫권 3 ;≪東文選≫권 117). 5세 圓悟國師 天英(1215∼1286)0058)<佛臺寺慈眞圓悟國師靜照塔碑>(≪朝鮮金石總覽≫상), 595쪽. 그러나 이보다는≪曹溪山松廣寺史庫≫, 443쪽에 수록된 碑銘이 양으로나 내용상으로 우수하다.이 배출되어 지눌과 혜심의 수선사 결사정신을 이어 修禪의 淵藪를 이루었지만, 몽여부터 천영까지는 저서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 선사상은 알 수 없다.

 6세 圓鑑國師 冲止(1226∼1293)는≪圓鑑國師集≫이 남아 있어0059) 승려 李雪月에 의해 1680년에 간행된<圓鑑國師歌頌>을 底本으로 하고 林錫珍이≪東文選≫·≪東國輿地勝覽≫등에서 모은 자료를 통해 1920년≪圓鑑錄≫으로 간행하였다. 그 후에 이 책은 亞細亞文化社에서 그대로 영인해 널리 반포되었고(1973), 동국대에서 간행한≪韓國佛敎全書≫6책에도 실렸다. 秦星圭는 그 후≪高麗佛籍集佚≫(東國大 出版部, 1985)에 閔泳珪 소장본<曹溪宓庵和尙雜著>가 수록된 것을 확인하고≪원감록≫과 합해 영인과 동시에 번역하여≪圓鑑國師集≫(아세아문화사, 1988)으로 改題하여 간행하였다. 수선사의 禪脈은 물론이고, 항몽의 좌절과 그에 따른 농민의 고통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 주목된다. 충지는 당의 從諗(778∼893)의 ‘평범한 일상생활이 禪’이라는 禪觀를 보여주고 있지만0060) 冲止의 禪思想은<偶書問諸禪者>(≪圓鑑國師集≫, 94쪽 ;≪韓國佛敎全書≫6, 385쪽) 참조. 경전을 떠나서 玄機를 찾을 수 없음을 강조하여0061)<丹本大藏慶讚疏>(≪圓鑑國師集≫, 17쪽 ;≪韓國佛敎全書≫6, 397쪽). 당시 불경을 무시한 선의 경향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高麗史≫나 다른 어떤 자료에도 보이지 않는 원 간섭기의 시대상황을 사실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0062) 秦星圭,<圓鑑國師 冲止의 生涯>(≪釜山史學≫5, 1981).
―――,<圓鑑錄을 통해 본 圓鑑國師 冲止의 國家觀>(≪歷史學報≫94·95, 1982).
고뇌에 찬 시대상황을 산문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던지 주로 시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지눌 이후 수선사에서는 16국사가 배출되었지만0063) 16國師에 대한 자료는,<松廣寺嗣院事蹟碑>(≪朝鮮金石總覽≫하, 954쪽)와 采永의≪佛祖源流≫가 있다. 두 자료는 차이가 있으므로 독자의 주의를 요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管野銀八,<高麗曹溪山松廣寺十六國師の繼承に就いて>(≪靑丘學叢≫9, 1932)가 있다. 7세 이후는 원 지배하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경제적 제모순 때문인지 남겨진 자료도 없고 별다른 활동도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수선사 2세 혜심이 보여주었던 유·불의 조화도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였고 불교 자체의 사상적 발전도 없었으므로, 새로이 원을 통해 수용되기 시작한 성리학에 사상계의 중심적인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눌의 수선사를 통한 조계종의 정신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의 조계종으로 연결되고 있다.

<秦星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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