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2) 지눌의 사상
  • (1) 선·교갈등의 문제

(1) 선·교갈등의 문제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확고히 자리잡기까지는 적어도 3, 4백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필요했다. 중국인들은 인도에서 전개된 다양한 형태의 불교사상과 신앙을 어느 한 시기에 한꺼번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전이 유입되어 번역될 때마다 하나의 특정한 경전을 중심으로 불법을 새로이 연구하고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학파나 종파가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天台나 華嚴과 같은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불교 이해가 성립되기까지 중국에는 많은 종파들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종파들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통하여 속속 우리 나라에도 유입되었다. 三論·涅槃·地論·攝論·戒律·法相·天台·華嚴 그리고 淨土信仰과 密敎的 종파인 眞言宗 등 다양한 불교사상들이 통일신라 전기까지 우리 나라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가운데는 법상종과 화엄종같이 막강한 교단을 형성한 종파도 있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강력한 고대국가 체제를 구축했던 당나라가 8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대략 이와 때를 같이하여 불교계에는 禪이라는 하나의 참신한 운동이 전개되면서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고 중국 전역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골품제를 기반으로 한 지배체제가 심각한 균열을 보이면서 사회적 혼란기로 들어가기 시작한 신라 하대에 이르러 신라의 당나라 유학승들 가운데는 중국에서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선불교를 가지고 돌아오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敎外別傳’·‘以心傳心’이라는 전대미문의 구호 아래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선불교를 배우고 돌아온 승려들은 대부분 화엄종 출신의 승려들로서 중국 南宗禪의 거장인 馬祖 道一(707∼786)계통의 선풍을 전수받고 돌아왔다. 그들은 자연히 화엄종이나 법상종과 같은 기성 종단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주로 지방호족세력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이른바 九山禪門의 개창자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이다. 불타의 설법이 담긴 경전들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교학적 종파들간의 사상적 차이는 높고 낮음, 깊고 옅음의 구별은 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융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전의 권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선불교와 전통적 불교와의 갈등은 불교계가 해결해야만 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갈등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불교가 국교가 되다시피 한 신라와 고려에서는 하나의 지배적인 종단이나 종파는 자연히 정치적·경제적 힘을 지닐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종파간의 갈등은 단순히 사상적·종교적 대립뿐만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현실적 대립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종파간의 대립은 뜻있는 고승들에게는 언제나 불교의 세속적 타락으로 보였으며 이와 같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선·교의 갈등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그 해결을 통해 고려 불교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시키고자 노력했던 승려는 누구보다도 大覺國師 義天(1055∼1101)이었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화엄종 출신의 승려였으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천태종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종파를 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 유학했을 때 천태사상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심지어는 천태 智顗大師의 탑을 참배하면서 후일 귀국하면 신명을 다해 대사의 사상을 전파하겠다고 서원하기까지 하였다. 화엄종 승려로서 이러한 발원을 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으며 이것은 결국 고려 불교계가 안고 있던 고질적 문제인 선·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그의 의도적 행위로 풀이될 수밖에 없다.

 의천이 천태종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敎學과 觀行을 골고루 강조하는 천태의 敎觀兼修的 전통에 있었으며 의천의 사상은 한마디로 말해 이 교관겸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당시 불교계에서 경전과 교학만의 연구에 힘쓰며 관행을 통한 수행을 등한시하던 풍조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이러한 사람들에게 양자를 모두 갖추어 공부해야 한다는 교관겸수의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수행을 위해서는 天台 止觀의 명상법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지적 연구에만 치우쳐 있던 이러한 교학자들의 병폐보다도 훨씬 더 의천이 비판을 가한 대상이 된 것은 ‘교외별전’의 구호 아래 경전공부를 아예 무시하는 선가들의 폐단이었다. 의천은 이러한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멸시하였으며 선의 병폐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역시 이론과 수행을 골고루 강조하는 천태종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의천은 단지 선을 사상적으로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종을 천태종에 흡수해 버리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선불교는 단순히 그러한 교관겸수의 이념만으로 흡수되기에는 너무나 발랄한 고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의천이 과연 당시 선불교의 진수를 바로 파악하고 있었는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결국 천태종은 오히려 선불교의 반발과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이미 여러 종파로 나뉘어 있던 불교계에 또 하나의 종파를 더하는 결과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興王寺의<大覺大和尙墓誌銘>에 의하면 의천 당시 고려불교에는 戒律宗·法相宗·涅槃宗·法性宗·圓融宗(화엄종) 및 禪寂宗의 6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천태종의 개창과 더불어 선적종은 曹溪宗이라는 새로운 이름 아래 응집되기 시작했으며 천태종은 조계종과 더불어 선종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五敎兩宗의 시대가 전개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고려 불교계의 문제를 안고서 날로 증폭되어 가는 선과 교의 갈등을 해결함과 동시에 선불교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곧 普照國師 知訥(1158∼121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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