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2) 지눌의 사상
  • (4) 수행론

(4) 수행론

 지눌의 선 수행론의 요체는 이른바 頓悟漸修사상이다. 돈오점수란 자신의 본 마음인 진심 혹은 불성을 단번에 깨달은 후에는 반드시 점차적으로 마음의 번뇌를 제거해 가는 수행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이론이다. 돈오란 중국 남종선의 독특한 전통이다. 종래의 불교사상들이 오랜 수행을 거친 후에야 성불할 수 있다는 견해를 지녔음에 반하여,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강조하는 남종선의 전통에서는 성불이란 오랜 수행 끝에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자신의 본성인 부처의 성품을 깨닫는 순간(見性) 부처가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아니, ‘된다’기보다는 이미 자기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心卽佛)임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성불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 앞으로 도달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 이미 자신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자각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로서, 깨달음은 점차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단박 일어난다는 것이다(頓悟). 이와 같은 중국 남종선의 전통을 이어받아 지눌은 선 수행의 시작은 모름지기 자신의 본성을 한 순간에 깨치는 돈오의 체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체험은 마치 부귀영화를 누리던 어떤 고관대작이 꿈속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깨어나서는 자기가 여전히 존귀한 존재임을 알고 안도하는 것에 비유된다. 즉 돈오란 부처의 성품을 지닌 자신의 본래 면목을 모르고 번뇌와 망상 가운데 번민하고 방황하던 범부가 善知識의 깨우침을 받아 꿈에서 깨어나듯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는 체험인 것이다. 지눌에 의하면 이런 돈오의 체험없이 수행만을 일삼는 것은 승산없는 싸움과도 같다. ‘修’는 반드시 ‘悟’ 후에 이루어져야만 참다운 수행이 될 수 있다고 지눌은 본다. 자신의 본성을 여실히 깨닫는 체험이 있고 난 후에 하는 수행은 쉽고 가벼운 수행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오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깨달음인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자신의 진심의 세계를 체득하는 깨달음이다. 곧 ‘공적영지지심’의 자각으로서, 모든 이름과 형상을 떠난 공적한 자신의 마음의 본바탕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위에 신령한 앎이 있어서 그 마음이 어둡지 않고 맑고 밝은 자신의 마음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이 다름 아닌 진심의 묘용에 지나지 아니함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체험을 한 사람은 일상적 사물을 대할 때 그것을 진심의 수연이자 묘용으로 보기 때문에 결코 그것들을 마음의 걸림돌로 여겨 하나하나 억누르거나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맑은 구슬이 주위의 사물들을 반영하듯 자기가 대하는 모든 사물, 모든 일들을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대로 거침없이 처리하며 사는 자유로움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돈오의 체험은 지눌에 의하면 단지 문자와 경전에 근거한 지적 깨달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마음을 반조하는 관행의 노력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지눌의 돈오사상이 지닌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화엄에서도 돈오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교외별전의 기치 아래 한 생각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돈오를 선문만의 전유물로 내세우면서 모든 교학사상을 점수점오의 열등한 법문으로 백안시해 오던 종래의 선가적 입장에서 보면 매우 파격적 일이다. 지눌은 그러한 종파적 입장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체험으로 확인한 바에 따라 이러한 파격적 결론에 이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것을 자신의 선사상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아 그것에 대한 체계적 이론을 수립하기까지 했다. 지눌은 실로 당시 불교계의 고질적 병폐인 선·교의 갈등문제를 해결하고자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육조단경≫을 통해 선문의 진리를 크게 깨달은 후에 보문사에서 선의 진리에 계합하는 교가의 가르침을 찾아 3년간이나 대장경을 뒤지면서 온갖 전적과 씨름하는 각고의 노력을 보인 것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가 선가로서 교학자들이나 함직한 경전과의 씨름을 결행한 데는 이미 그의 마음에 선과 교의 대립은 잘못된 것이고 양자는 하나의 근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직관적 신념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지눌이 선과 교의 대립을 결코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의심하는 가운데 그 해결의 돌파구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부터가 실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인 것이다.

 여하튼 그는 보문사에서 3년간이나 대장경의 전적을 뒤질 수밖에 없었고 당시 불교계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이통현장자의≪신화엄경론≫이라는 방대한 문헌과 씨름하는 가운데 드디어 자신이 지녔던 직관적 신념에 대한 확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통현의 화엄사상은 중국의 정통 화엄사상인 法藏의 화엄사상과는 달리 보다 실천적이고 선적인 요소가 매우 강한 것으로서 화엄교가들 가운데서는 등한시되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눌은 바로 이와 같은 통현장자의 화엄해석에 깊은 감명을 받고 화엄에도 돈오사상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화엄은 당대 불교의 전통상 교학사상의 최고봉으로서 교학을 대표하다시피한 것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결론을 통해 지눌은 선과 교가 궁극적으로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자기 집착과 쟁론만을 일삼던 선가와 교가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지눌은 한국불교사상에서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통현의 화엄해석 가운데 무엇이 지눌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것일까. 대승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론에 의하면 범부가 수행을 시작하여 성불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수행의 계위에 52위가 있다. 즉 10信·10住·10行·10回向·10地·等覺·妙覺의 52계위이다. 그 가운데서 10신은 수행의 계위라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낮은 단계로서 범부가 수행을 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믿음을 다지는 단계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통현장자는 바로 이 10신의 초위에 관한 해석에서 범부는 자기의 마음이 곧 움직일 수 없는 지혜를 지닌 부처(不動智佛)임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범부로 여겨 자기 마음의 본래 성품이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긍정하지 않으려는 자기비하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지눌은 바로 이와 같은 10신 초위에 대한 이통현의 해석에 크게 감동하여 이것이야말로 선가에서 얘기하는 돈오의 정신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된 것이다.

 화엄이든 선이든 지눌에 의하면 인간은 수행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불성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부처가 아닌 사람이 아무리 수행을 해도 결코 부처가 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범부는 자기가 범부라는 자기비하의 마음을 과감히 물리치고 부처와 조금도 다름없는 자신의 진심을 깨닫는 자기발견과 자기긍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발견은 결코 선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화엄에서도 같은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눌은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 지눌은 화엄에서 선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화엄을 禪化시켜 선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지눌은 화엄을 禪的으로 해석하는 구체적인 이론적 작업으로서 선 수행에 있어서 화엄적 돈오의 길을 가르치는 圓頓信解門을 수립했으며 그의≪圓頓成佛論≫은 이러한 화엄적 돈오의 길을 자세히 구명·논증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원돈성불론≫은 이통현의≪화엄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지눌은≪화엄론≫이 지극히 훌륭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분량이 너무나 방대하고 문장이 너무 호한해서 사람들이 접하기 어렵다고 여겨 그 내용을 요약한≪화엄론절요≫를 만들기도 했다. 이는 그가 통현의 화엄사상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소중히 여겼는가를 말해준다.

 지눌에 의하면 돈오는 선 수행의 시작일 뿐이지 결코 전부가 아니다. 선 수행은 반드시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돈오의 체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나 그 다음에는 이러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오염시키는 온갖 번뇌들을 퇴치하려는 오랜 점진적 수행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눌은 비유를 들어 말하기를 우리가 얼음덩어리가 전적으로 물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는 하나 이 얼음이 실제로 물이 되려면 오랜 시간 동안 태양의 따뜻한 기운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즉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우리는 자신이 곧 부처임을 자각하기는 하나 그것으로 인격의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깨친 후에도 부단한 수행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은 이와 같은 점진적 수행과정을 무시하고 한순간 단박 깨달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선문의 돈오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교학자들이 스스로 비굴한 마음을 내어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긍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잘못된 일이지만, 한순간 돈오의 체험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인간의 현실을 무시한 오만한 생각으로서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지눌의 진지한 수도자적 자세를 엿볼 수 있으며 선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허황된 주장과 교만에 대한 예리한 비판적 자세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선가의 돈오적 전통과 교가의 점수적 전통을 균형있게 취함으로써 선·교의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의 일단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지눌의 돈오점수론은 자신의 선 수행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선과 교의 올바른 점은 무엇이든 종파적 입장에 구애받지 않고 수용하고자 하는 그의 개방적 자세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지눌의 선 수행의 이론 자체가 이미 그 안에 선과 교의 대립을 지양하는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지눌은 말한다. 진리(理)는 한 순간에 깨칠 수 있지만(頓悟)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구체적인 번뇌들(事)은 대번에 제거될 수 없다. 번뇌는 그 성질과 정도에 따라 하나하나 대처해 나가는 노력이 있어야만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번뇌가 끝내 실체가 없고 공한 것임을 돈오를 통하여 우리가 깨달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에는 깨닫기 이전에 오랫동안 쌓여온 번뇌의 습관적 힘으로부터 오는 장애가 너무나 두텁기 때문에 한순간의 깨달음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해탈을 누리는 성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 부처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으나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실제로 부처와 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부처와 같은 마음을 내는 데는 오랜 세월에 걸친 점차적 수행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점수의 사상이다. 한마디로 말해 悟와 修는 어느 하나도 결여될 수 없으며 반드시 같이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와 수에는 반드시 선후의 차례가 있어야 한다고 지눌은 주장한다. 즉 반드시 ‘先頓悟後漸修’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점수 후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고 사실 이것이 전통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지눌은 이와는 반대로 깨달음이 선행되어야만 참다운 닦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깨달음의 체험이 수행의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눌의 심성론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지눌에 의하면 공적영지의 진심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행하는 일상사는 맑은 거울에 비치는 상들과 같이 진심의 묘용이기 때문에 아무런 집착과 장애 없이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게 된다. 마치 다양한 색깔을 지닌 사물들이 맑은 구슬을 대하면 그 구슬이 자연스럽게 여러 색상들을 띠듯이, 진심의 본체를 깨달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그가 접하는 사물들이나 사건들에 의해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다. 구슬에 나타난 색상들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투명체에 비친 영상들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심의 본체를 깨달은 사람은 일상적 생각이나 행위들이 결코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슬에 비친 상들과 같이 假有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을 심각하게 대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영지한 진심의 본체를 깨닫는 돈오의 체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만약 그러한 체험을 하지 않고 수행에 임하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생각들과 사사건건 대하는 사물들을 맑은 구슬에 비치는 상과 같이 가볍게 여기지 않고 실재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선악, 시비, 好·不好의 마음들이 생겨 분별심과 집착심을 내게 되며 그것들에 의해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아무리 수행을 해도 결코 번뇌를 제거할 날이 없으며 그 수행이 마치 돌로 풀을 누르는 것과 같아서 다만 번뇌들을 더욱더 맹렬하게 일어나게 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한 수행은 마음만 수고롭고 피로하게 할 뿐 아무런 성과를 가져올 수 없으며 승산없는 싸움과도 같다. 그것은 돈오의 체험을 모르는 전통적인 漸門교가들의 수행법은 될지언정 결코 선의 올바른 수행법은 될 수 없다고 지눌은 비판한다. 선가들 가운데서도 북종선은 바로 이와 같이 돈오에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수행은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여 깨끗함을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는 점수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즉 북종선은 모든 번뇌가 구슬에 비치는 상과 같이 본래부터 공적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사들이 불성의 작용이요 진심의 묘용임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들을 적대시하고 제거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어 일체의 번뇌가 본래부터 공한 것이며 진심의 묘용임을 아는데 어찌하여 점수의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일까. 이미 언급했듯이 지눌에 의하면 우리가 아무리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알았다 하더라도 과거로부터 누적되어 온 깊은 업의 장애를 받아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번뇌에 의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깨달음 후에도 계속적인 수행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깨달음의 체험을 한 사람은 자신의 참 성품을 깨닫지 못한 사람과는 달리 자신을 괴롭히는 번뇌들이 모두 자신의 마음에 본래적인 것이 아니며 본래부터 공적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을 대치함에 있어 훨씬 더 여유와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돈오가 점수에 선행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돈오 후의 점수는 단순한 점수가 아니며 결코 점수주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그 본성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쉽고 가볍게 대치할 수 있으며 따라서 돈오의 문을 전혀 거치지 못한 점문열기의 사람들이 번뇌를 제거하고자 하되 오히려 그것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눌이 돈오점수론을 주장하는 근본 이유이다. 돈오 없는 점수는 맹목적인 수행이 되고 점수 없는 돈오는 교만에 빠져 진정한 자기변화를 초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눌은 구체적인 점수의 방법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지눌의 ‘定慧雙修’, 혹은 ‘惺寂等持’의 사상에 접하게 된다. 지눌에 의하면 모든 수행의 요체는 정과 혜를 닦는 데 있다. 본래 원시불교로부터 3학이라 불리는 계·정·혜는 불교수행의 기본을 이루어 온 것인데, 지눌은 여기서 계는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정과 혜를 모든 수행의 방법이자 동시에 목표로 삼았다. 정은 산란한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하여 정신적 통일을 이룬 상태를 말하며, 혜는 이러한 고요한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는 지적 통찰력을 의미한다.

 지눌은 이러한 정과 혜를 두 가지 종류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는 ‘自性定慧’요 다른 하나는 ‘隨相定慧’이다. 자성정혜란 마음의 본성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두 가지 모습으로서 다름아닌 공적영지의 진심 그 자체이다. 즉 진심의 공적은 정이요 영지는 혜다. 따라서 정과 혜는 진심의 체상의 체와 용에 해당되는 것이다. 반면에 수상정혜란 구체적인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정과 혜로서 우리 마음의 본성이 갖추고 있는 자성정혜를 회복하고 실현하기 위해 닦아야 할 덕목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수상정혜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해주는 말로서 지눌은 성적등지를 말한다. 惺이란 마음에 어둠이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의식하는 상태로서 혜에 해당하는 것이며 적이란 마음이 온갖 번뇌를 떠나 텅 비고 고요한 상태로서 정에 해당하는 말이다. 지눌은 정과 혜, 성과 적을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 없이 고루 닦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혜와 성이 일방적으로 승하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반면에 정과 적이 너무 지배적이면 마음이 둔해지고 혼침해지기 때문에 지혜가 사라진다. 이 두 덕목은 따라서 새의 두 날개와 같이 반드시 같이 가야만 한다. 양자를 고루 닦아야 자기 마음의 본바탕인 자성정혜를 들어내어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지눌은 성과 적에 해당하는 개념으로서 寂과 知, 혹은 止와 觀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정혜쌍수와 더불어 지눌은 菩薩의 자비와 利他行의 실천과 수행도 강조한다. 자신만의 성불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 함께 열반을 얻도록 하는 자비의 행도 지눌에 의하면 한순간의 깨달음의 체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수련과 수행을 통해 발전되는 것이다. 自利와 利他, 上求菩提와 下化衆生은 지눌에 있어서 모두 깨달음 후의 점진적 수행에 의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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