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3) 수선사의 성립과 전개
  • (1) 정혜결사의 취지와 창립 과정

(1) 정혜결사의 취지와 창립 과정

 知訥(1158∼1210)0064) 知訥은 自號가 牧牛子이고 諡號는 佛日普照國師이다. 그의 저술에는≪勸修定慧結社文≫(명종 20년 ; 1190)·≪眞心直說≫·≪修心訣≫·≪誡初心學人文≫(熙宗 원년 ; 1205) 등 각 1권,≪華嚴論節要≫3권(희종 3년 ; 1207)≪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희종 5년)·≪圓頓成佛論≫·≪看話決疑論≫등 각 1권이 현존하며<六祖法寶壇經重刻跋> 1편(희종 3년)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知訥碑文에≪上堂錄≫1권·≪法語歌頌≫1권,≪海東文獻總錄≫에≪牧牛子詩集≫1권이 있다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念佛要門(念佛因由經)≫1권이 전하나 眞撰 여부에 대해서 설이 분분하다. 이상의 저술과 함께 崔詵이 지은<曹溪山修禪社重創記>(희종 7년) 및 金君綏가 지은<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 등은 지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지눌 당시 수선사에 대해서는 李鍾益,≪韓國佛敎の硏究-高麗·普照國師を中心として-≫(國書刊行會, 1980)와 崔柄憲,<定慧結社의 趣旨와 創立過程>(≪普照思想≫5·6, 1992)을 참조하였다.에 의해서 창립된 修禪社는 지눌 자신의 개인적 수행과정의 결과였으며 대사회적 신불교운동의 산물이었다. 수선사의 창립과정을 통하여, 지눌은 당시 불교계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그 대안으로 頓悟漸修라는 禪理論에 입각하여 실천적 수행방법인 定慧雙修를 주창함으로써 心(眞心)에 대한 깨달음의 원리를 독창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結社라는 선의 집단적 수행형태를 택하였다. 수선사는 정혜(禪定과 智慧)를 오로지 닦기 위해 이루어진 신앙결사로 지눌불교의 출발점이자 마지막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지눌은 의종 19년(1165) 나이 8세에 출가한 때로부터 명종 12년(1182) 25세에 普濟寺 談禪法會에 참석하기 이전까지 출가 후 18여 년의 수학기간을 거치면서 정혜결사의 기반을 닦았다. 지눌은 闍崛山派 宗暉禪師에게 출가하였다.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 그의 비문에는 병약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이와 함께 아버지 鄭光遇가 황해도 洞州(瑞興)의 土姓으로 향리층 출신이었고 성균관 國學學正(정9품)이라는 말단관리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이 독점적 지배체제를 구성하고 있던 현실에서 관직 진출에 한계를 느꼈던 아버지의 현실관이 작용하여 출가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지눌의 출신성분이 지방의 향리지식층 자제였다는 점은 그가 귀족불교의 타락상을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그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0065) 고려 후기 결사불교를 주도한 인물들의 출신성분이 고려 중기 왕족이나 문벌귀족들이 불교계를 이끌었던 것과는 달리, 대부분 ‘지방사회의 鄕吏層·讀書層’ 또는 ‘지방의 鄕吏知識層’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 점이 갖는 사상사적 의의를 언급한 연구로 다음의 글들이 있다.
蔡尙植,<高麗後期 佛敎史의 전개양상과 그 경향>(≪歷史敎育≫ 35, 1984 ;≪高麗後期佛敎史硏究≫, 一潮閣, 1991).
―――,<고려후기 修禪結社 성립의 사회적 기반>(≪韓國傳統文化硏究≫ 6, 1990 ; 위의 책).
崔柄憲,<修禪結社의 思想史的 意義>(≪普照思想≫ 1, 1987).
지눌은 출가 후 25세 이전까지는 국내에서 특정한 스승과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구도행각을 벌였다. 즉 선방을 찾는데 그치지 않고 수많은 經論이나 禪籍을 섭렵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수행의 핵심이 정혜쌍수에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불법을 빙자하여 정치권력과 결탁, 세속적 이익과 명예에 골몰하면서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 허비하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타락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0066) 知訥,<勸修定慧結社文>(≪普照全書≫, 普照思想硏究院, 1989). 이와 같은 불교계에 대한 비판의식과 정혜쌍수에 대한 확신은 일정한 준비기를 거쳐 불교개혁을 위한 정혜결사로 이어졌다.

 지눌은 명종 12년 보제사 담선법회에 참석한 후부터 명종 18년 31세에 普門寺에서 수행을 마치던 때까지 7여 년간 정혜결사를 위한 준비기를 거쳤다. 지눌은 명종 12년 정월에 개경의 보제사 담선법회에 참석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정혜결사의 필요성을 동학 10여 인에게 피력하였다. 그리고 법회가 끝난 후 은둔하여 결사하기로 하고 社名을 定慧社라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지눌이 의도한 결사는 僧俗을 모두 포함하지 않는, 승려 위주의 소규모적인 그것도 다분히 산림은둔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그나마 이 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사에 참여하기로 했던 동지들이 그 해 실시된 選佛場(僧科)에서 합격자와 불합격자로 나뉘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눌은 이 승과에서 합격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의 길인 승계와 승직에 관심을 두지 않고, 개경을 떠나 홀로 남쪽으로 수행의 길을 떠났다. 그는 전남 昌平(지금의 潭陽郡 昌平面)의 淸源寺에 이르러 머물게 되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六祖壇經≫을 보다가 “眞如의 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六根이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나, 본성은 萬像에 물들지 않고 眞性은 항상 自在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불가사의한 진리의 경계를 처음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는≪육조단경≫에 나타난 華嚴의 性起思想이 깨달음의 체험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0067) 吉熙星,<知訥의 心性論>(≪歷史學報≫93, 1982), 14쪽. 이로부터 더 한층 세속적인 명리를 멀리하고 산림에 깊이 은둔하여 철저한 수도생활에 들어가 3여 년의 기간을 청원사에서 보냈다.≪육조단경≫에 의한 깨달음의 체험은 정혜결사의 출발점이자 결론이기도 하였던 정혜쌍수와 惺寂等持門이라고 하는 실천문의 지도원리가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눌은 여기서 수행을 끝내지 않고 명종 15년에 下柯山(지금의 醴泉 鶴駕山) 보문사로 옮겨 선문의 ‘卽心卽佛’이라는 말에 마음을 두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華嚴敎의 깨달아 들어가는 문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의심을 갖고 3년 동안 大藏經을 열람하였다. 그러던 중≪華嚴經≫ 如來出現品에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마음속에 갖추어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라는 말에 이르러 크게 감격하였다.0068) 知訥,<華嚴論節要序>(≪普照全書≫, 普照思想硏究院, 1989). 이는 선문의 ‘즉심즉불’과 화엄교의 깨달아 들어가는 문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상통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로써 지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으로 일반 중생들의 수행체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리하여 지눌은 범부들이 최초로 믿어 들어가는 문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되었는데, 드디어 당나라 때 화엄사상가인 李通玄의≪新華嚴經論≫에 보이는 十信初位에 대한 해석을 열람하여 그 실마리를 찾았다. 즉 “범부가 十信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자신이 범부라는 것만 인정하고 자기의 마음이 바로 不動智의 부처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데에 이르러서 크게 감동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은 敎요 祖師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禪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반드시 서로 다르지 않는데, 어찌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서 각자가 익힌 것에만 집착하여 망령되게 논쟁을 일으켜 헛되이 세월만 보내겠는가”라고 하여 선과 교가 둘이 아니라는 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다.0069) 위와 같음. 이것이 바로≪화엄경≫과≪신화엄경론≫에 의거하여 두 번째 깨달음을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십신초위에서 자기 마음의 無明分別이 여러 부처의 부동지(普光明智·根本智)임을 확신하고, 이러한 頓悟 위에서 十住·十行·十回向·佛果로 진행한다는 이통현의 화엄사상은 지눌의 頓悟漸修라는 선사상체계에 도입하기에 적절한 이론이었다. 두 번째 깨달음을 계기로 지눌은 圓頓觀門에 깊은 확신을 갖게 되었고 정혜결사에서 실천문의 하나인 圓頓信解門의 이론적인 기반을 정립하게 되었다. 원돈관문에 대한 확신은 정혜결사의 지도원리 정립이라는 차원에서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고려불교사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였던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데에도 그 사상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혜결사 준비기는 지눌 자신의 수행기였을 뿐만 아니라 결사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기간이었던 것이며, 이후 지눌은 드디어 결사의 횃불을 올리게 된다.

 지눌은 명종 18년 居祖寺로 들어가 정혜결사를 이룬 때부터 신종 원년(1198) 41세에 지리산 上無住庵으로 은거하기 이전까지 11여 년간 제1차 정혜결사기를 갖는다. 지눌이 하가산 보문사에 있을 때, 永川 八公山 居祖寺에 거주하고 있던 승려 得材에게서 이전에 보제사에서 약속했던 정혜결사를 실행에 옮기자는 간곡한 요청이 왔다. 지눌은 이를 받아들여 거조사로 가서 보제사에서 함께 결사를 약속했던 동지들을 불러 모았으나, 처음의 10여 명 가운데 불과 3, 4명이 모여 결사를 이루고 약속대로 정혜사라 하였다. 이를 제1차 정혜결사라 할 수 있다. 그 후 2년 뒤인 명종 20년 늦봄에 결사의 취지를 밝히는≪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반포하면서 참여의 문을 선종만이 아니라 교종을 포함한 모든 종파의 승려에게 개방하였으며, 유교나 도교인에게도 동참을 호소하였다. 정혜결사에서 보여준 이러한 폭넓은 포용성과 개방성은 지눌 자신의 불교관의 특징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즉 출가 이후 일정한 스승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구도행각을 벌였던 점, 그리고 선종 승려로는 이례적으로 널리 경론과 선적을 섭렵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형성하여 나갔던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정혜결사문≫은 정혜를 모두 닦을 것을 주지로 하는 결사의 취지문이다. 지눌은 이 결사문에서 서설적으로 당시 승려의 타락상과 불교의 부패상을 지적하고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정혜를 고르게 닦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서 당시 불교계에서 논의되던 여러 가지 문제점, 즉 ① 念佛修行과 定慧雙修 ② 修禪과 神通 ③ 自性과 定慧雙修 ④ 佛道와 末世衆生 ⑤ 惺寂等持와 頓敎二門 ⑥ 定慧와 利他行 ⑦ 定慧와 淨土修行 등을 일일이 해명해 가는 가운데 수선·정혜쌍수·성적등지의 필요성을 재삼 반복하여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결사문에서 제기된 문제들 중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정토신앙의 문제였고 다른 한 가지는 선교대립의 문제였다. 지눌은 이 두 가지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 해결방안으로서 역시 정혜쌍수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정혜결사의 취지인 것이다.

 먼저 지눌은 일면 淨土求生을 인정하고 있다. 즉 밝고 고요한 본성 가운데에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는 사람은 선정과 지혜의 공덕이 있기 때문에 부처(阿彌陀佛)의 깨달은 경지에 부합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저 정토만을 바라보며 단지 부처의 이름만 부르고 거룩한 얼굴을 생각하여 왕생하기를 바라는, 즉 相에 집착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정토신앙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염불하여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지 않더라도 다만 마음뿐임을 밝게 알아 그대로 관찰하면 저절로 정토에 반드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하여 唯心淨土說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지눌은 타력적 정토신앙을 부정하고 최상의 수행은 바로 정혜쌍수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수선사와 함께 양대결사를 이루었던 白蓮社의 了世(1163∼1245)가 淨土求生 懺悔滅罪에 전념하였던 입장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러한 사상적 입장의 차이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중생의 根機에 대한 의식의 차이를 시사하는 것이다. 지눌은 최소한의 지해력 정도는 갖고 스스로 발심할 수 있는 수승한 근기를 전제로 하고 있었지만, 요세는 죄악의 업장이 깊고 두터워 자력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 없는 나약한 범부로서 중생을 의식하였던 것이다.0070) 高翊晉,<圓妙了世의 白蓮結社와 그 思想的 動機>(≪佛敎學報≫15, 1978).
―――,<圓妙國師 了世의 白蓮結社-思想的 特質을 中心으로->(≪韓國天台思想硏究≫, 東國大 佛敎文化硏究所, 1983).
蔡尙植,<高麗後期 天台宗의 白蓮社 結社>(≪韓國史論≫ 5, 1979 ; 앞의 책).

 다음으로≪정혜결사문≫에서는 선·교의 대립을 비판하고 선학자와 교학자의 문제점, 즉 전자가 헛되이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에 빠진 점과 후자가 다만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에 떨어진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선교통합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근거와 원리를 역시 정혜쌍수에서 찾고 있다. 지눌에게는 깨달음의 길에 있어서 선종과 교종의 구별은 없다. 문제는 제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고 정혜를 올바로 닦는 데에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지눌의 선교통합원리는 당나라 圭峰宗密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종밀의 선교통합이 이념상의 문제였는데 비하여, 지눌의 그것은 실천적 수행상의 문제였다는 점에 양자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지눌이 이념상의 문제를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뒷날 수선사로 결사를 옮긴 뒤에≪정혜결사문≫의 미진한 곳을 보완하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華嚴論節要≫·≪圓頓成佛論≫·≪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등은 선교통합의 이론적인 면을 체계화시킨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선교통합 노력은 고려불교사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고려불교사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혜결사문≫에서 주목되는 다른 한 가지는 지눌이 정혜쌍수를 개인적 차원의 수행으로서가 아니라 무지한 중생들과 함께 하려는 간절한 서원을 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눌의 사회의식을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고려 중기 선사상의 경향이 다분히 귀족적이고 고답적이면서 개인적인 수업형태를 중시하였던 것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0071) 崔柄憲,<高麗中期 李資玄의 禪과 居士佛敎의 性格>(≪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3). 그리고 정혜쌍수 후에 적극적인 이타행, 즉 중생구제의 菩薩道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도 역시 사회에 대한 인식과 연관하여 주목할 만하다.0072) 知訥은≪정혜결사문≫에서 뿐만 아니라, 이후의 저술인≪華嚴論節要≫·≪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圓頓成佛論≫ 등에서도 利他行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朴鍾鴻,<知訥의 思想>(≪韓國思想史(佛敎思想篇)≫, 瑞文文庫 11, 1972, 222∼229쪽)이 참고된다.

 ≪정혜결사문≫의 선언 후 결사의 횃불은 타올랐고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 전환되어 갔다. 지눌이 신종 원년 상무주암에 은거한 후부터 희종 6년(1210) 53세로 입적할 때까지 13여 년간을 제2차 정혜결사기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지눌은 결사이념의 실천에 매진하였다. 정혜결사는 결성 당시 3, 4명에 불과한 출가자 중심의 소규모 집단이었는데, 10여 년을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장소가 좁아 불편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눌은 적당한 장소로 松廣山 吉祥寺를 택하여 명종 27년 이 곳에서 정혜사 중창을 시작하였다. 지눌은 중창이 시작된 다음해 봄에 승려 몇 사람과 함께 거조사를 떠나 중창지로 가지 않고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였다. 은거 이유는 일차적으로 究竟覺의 證得을 통한 자기완성이라는 목표에 있었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혜결사를 확대하기 위하여 더 넓은 곳을 찾게 되면서 그 참여 대상자의 문제를 깊이 고려해 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눌은 이 곳에서 약 2년간 머물렀는데, 그 때 남송대 臨濟宗 大慧宗杲의≪大慧普覺禪師語錄≫에 있는 “禪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일상 인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일상 인연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일 홀연히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 곳이 집안일(本來自己)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의 깨달음을 체험하게 된다.

 지눌은 보문사의 수행에서 선·교가 다름이 없고, 또 범부가 날마다 사용하는 분별심이 그대로 청정하여 물들지 않는 根本不動智로서 부처와 추호도 다름이 없는 본래의 자기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선불교에서 금기시하는 知解·理論의 자취는 떨쳐버리지 못하였던 것인데,≪대혜보각선사어록≫을 통해 깨달은 후 비로소 이러한 장애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는 정혜사의 중창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로서 제3차의 깨달음은 바로 현실사회에 대한 의식이 적극적으로 확대되는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지눌은 선이 현실에서 갖는 적극적인 면을 발견하고 현실사회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하여 속세를 떠나는 방향에서 추진되었던 정혜결사가 속세로 돌아오면서 그 속세에 영향받거나 물들지 않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며, 이에 따라 결사의 참여대상도 확대되었다.

 지눌은 3차에 걸친 깨달음으로 자기수행을 완성하고 결사불교를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신종 3년(1200) 거조사에 있던 정혜사를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길상사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웃 鷄足山에 고려 중기 慧炤國師가 창건한 정혜사라는 사찰이 있으므로 그것과 혼동되지 않기 위해 왕명을 받아 사명을 修禪社라 하고≪정혜결사문≫을 처음으로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고 결사의 터전을 다졌다. 이로부터 5년 후 희종 원년에 수선사의 중창공사가 마무리되었다. 9년간에 걸친 중창공사 끝에 건물 80여 칸을 갖추고, 그 해 10월에 왕명을 받아 약 120일 동안 경축하는 법회를 열어 낮에는≪대혜보각선사어록≫을 공부하고 밤에는 좌선을 하였으며 국왕의 수복을 기원하는 의식을 베풀어 낙성을 축하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결사시대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를 제2차 수선결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낙성소식을 들은 희종은 산의 이름을 바꾸어 曹溪山이라 하였으며 修禪社라고 자신이 쓴 편액을 내렸다.0073) 崔 詵,<曹溪山修禪社重創記>(≪曹溪山松廣寺史庫≫, 亞細亞文化社影印, 1979).

 지눌은 조계산으로 결사를 옮긴 후 정혜결사문을 인쇄 배포한 것에 이어, 중창공사가 끝난 해에는≪誡初心學人文≫을 저술하여 널리 반포하였다.≪계초심학인문≫은 수선사의 淸規로서 수행자의 생활규범으로 제정한 것이다. 지눌이 결사를 옮긴 후 양 저서를 각각 인쇄 배포한 것은 수선사 중창공사의 마무리와 함께 결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의미가 크다.

 지눌은 조계산에 결사의 터전을 잡은 후 본격적으로 결사정신을 대중과 함께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거조사 시절과는 달리 결사에 출가자는 물론이고 속인도 그 신분 여하를 불문하고 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받아들였다. 입적할 때까지 11년간 대중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에게 항상≪금강경≫읽기를 권하였고,≪육조단경≫에 의거하여 법을 세우고 이치를 연설하였으며 이통현의≪신화엄경론≫및≪대혜보각선사어록≫으로 날개를 삼았다. 또 惺寂等持門·圓頓信解門·徑截門의 3문으로 이루어진 선의 실천체계를 세웠으니, 이에 의지해 수행하여 믿어 들어가는 이가 많아 선학이 매우 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눌이 중시한≪육조단경≫·≪신화엄경론≫·≪대혜보각선사어록≫ 등은 이미 3차의 깨달음에서 접했던 것들이고 이러한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 3문의 실천체계였던 것이다. 이같이 지눌은 남을 지도하는데 독창적인 방법으로 열성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수행생활에 철저하였으며 노동을 하는데도 남보다 먼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億寶山의 白雲精舍·積翠庵, 瑞石山의 圭峰蘭若·祖月庵 등을 짓기도 하여 결사의 외적 규모를 확대시켜 나갔다.

 이와 함께 지눌은≪정혜결사문≫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저술활동을 말년까지 계속하였는데, 이는 결사운동의 주된 취지가 되는 정혜쌍수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노력이었다. 즉≪眞心直說≫과≪修心訣≫및≪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를 저술하여 정혜쌍수와 성적등지문이라고 하는 禪 실천운동의 사상적 뒷받침으로서 돈오점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다. 그리고≪화엄론절요≫를 저술하고 이어 말년에는≪원돈성불론≫과≪간화결의론≫의 저술을 마침으로써 원돈신해문과 경절문의 이론적 기반까지 마련하였다. 실로 지눌의 돈오점수에 입각한 정혜쌍수와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경절문 3문은 독창적인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포괄한 지도원리로서, 지눌 자신의 끊임없는 수행과정에서 나왔다는데 그 1차적인 의의가 있고, 나아가 대사회적 차원에서 결사라는 신불교운동으로 완성되었다는 데 보다 커다란 의의가 있다.

 한편 수선사가 창립될 때 그 후원세력이 지방사회의 호장을 중심으로 한 향리층과 일반민이었다는 점은 수선사의 사회적 성격과 연관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희종 3년 崔詵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曹溪山修禪社重創記>에는 중창 때의 후원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언급되고 있다. 그 가운데 錦城(지금의 羅州)의 安逸戶長 陳直升이 백금 10근을 시주하고0074) 백금 10근을 곡식량으로 환산하면 대략 租 700석이 된다.<常住寶記>에 의하면 백금 86근을 곡식으로 바꾼 양이 조 6,000석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10근은 697.7석이 되는 것이다. 진직승이 시주한 해가 수선사 중창이 시작된 명종 27년(1197) 이후 몇 년간이고,<상주보기> 작성연대는 고종 17년(1230)으로 추정되니 30여 년의 시간 차이가 있어 그간 물가변동이 적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한 개인으로서 698석이라는 양은 대단히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직승이나 작수 같은 향리출신들은 경제적 후원으로 수선사중창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또한 수선사 인근지역의 지방민을 공사에 동원하는 데에도 많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어 수선사 성립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컸다고 볼 수 있겠다. 전남지역의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형편에 맞게 재물과 노동을 희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리고 수선사가 있는 富有縣(昇州)의 안일호장 爵修가 수선사에 입사하여 지눌의 감화를 깊이 받았다고 하였는데 그도 유력한 후원자였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일반민이 수선사 중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은, 그들이 12세기 사회경제의 변화와 지배체제의 동요과정에서 전반기 농민의 유망과 후반기 농민·천민의 항쟁을 경험하면서 사회의식이 성장한 데다, 이러한 변화에 상응하여 수선사가 중앙귀족불교를 배격하고 새로운 선사상에 의한 불교개혁 및 이타행의 강한 실천적 의지를 표방하면서 모든 계층에게 결사참여의 문을 활짝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앙정치권력이 아닌 지방사회, 특히 향리층의 후원으로 수선사가 성립하였기 때문에 우선 그 지원규모가 크지 않아 사원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수선사의 社勢도 전남의 남부지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치권력과의 밀착에서 벗어난 점은 결사정신을 펼쳐나가는 데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중앙의 문벌귀족에 그 성립기반을 두고 있던 기존의 불교교단이 문벌귀족의 정치적 갈등에 편승하여 종교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일반민과 유리되어 갔던 양상과는 크게 다른 점으로 주목된다.

 결사 참여대상 중 왕실과 최씨무신정권은 실질적 후원세력은 되지 못했다. 희종이 山名과 社名을 바꾸고 편액을 내려주었던 것은 국가에서 새로운 사원을 공인하는 형식적인 의미 이상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또 왕명으로<조계산수선사중창기>가 지어지고 崔瑀(怡)가 王羲之의 글에서 監集했는데, 이는 물론 신흥사원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최고 실권자인 崔忠獻(1150∼1219)의 불교정책과 지눌의 결사취지를 상기할 때, 국가권력과 수선사는 형식적 관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최충헌은 비주류에 속하는 선종교단을 중심으로 불교계를 개편하여 志謙(1145∼1229)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0075)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35, 碑銘·墓誌 古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 그리고 수선사도 낙성식 때 국왕의 수복을 기원하는 의례적인 행사 외에는 정치권력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일찍이 지눌은 승과에 합격하였으나 일체의 승계와 승직을 받지 않았고 수선사 이외의 사찰에서 주지를 지낸 적도 없다. 국가의 승정체계로부터 형식적 관계를 제외하고는 독립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눌의 사상이 당대에 인근지역의 불교교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만 개경에까지 널리 흥포되어 이해된 것은, 그가 입적한 후 제자들이 왕실·최씨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최씨정권이 주관하는 각종 법회에 주맹으로 참가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런 사실은 중앙의 정치권력과 지눌의 관계가 형식적 관계 이상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0076) 許興植은 修禪社는 이미 知訥의 생존했을 때에 국가로부터 주목과 후원을 받아 결사가 번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許興植,<修禪社重創記의 史料價値>(≪韓國中世佛敎史硏究≫, 一潮閣, 1994).

 지눌의 정혜결사는 세속과 교단의 부패상을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정치권력과 기존의 교단으로부터 독립해서 돈오점수·정혜쌍수에 근거한 신앙결사를 형성, 함께 수행하고 그 공덕을 일반대중에게 회향함으로써 역사를 정화해 가려고 한 신불교운동이었다. 이러한 정혜결사는 지눌 이후 정치권력과 밀착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전개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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