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3) 수선사의 성립과 전개
  • (2) 최씨무신정권의 후원과 결사이념의 변화

(2) 최씨무신정권의 후원과 결사이념의 변화

 수선사는 최씨무신정권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변화과정을 수선사 제2세 慧諶·제3세 夢如·제4세 混元·제5세 天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혜심(1178∼1234)0077) 俗名은 寔, 字는 永乙, 自號는 無衣子, 諡號는 眞覺國師이다. 아버지는 崔琬, 어머니는 裵氏이며 모두 전남 和順縣의 土姓으로 향리층이고 아버지는 鄕貢試에 합격한 鄕貢進士였다. 慧諶의 저술에는≪禪門拈頌集≫30권(고종 13년 ; 1226)·<上康宗大王心要>1편·≪曹溪眞覺國師語錄≫1권·≪無衣子詩集≫2권·<狗子無佛性話揀病論>1편·<金剛般若波羅蜜經贊>1편 등이 현존하고 있다. 이상의 저술과 함께<慧諶大禪師告身>(고종 3년)·<修禪社伽藍配置狀況記>·<修禪社寺院現況記>와 李奎報가 지은<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고종 25년∼28년) 등은 혜심 때의 수선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은 본래 신종 4년(1201)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 유학자였다. 그렇지만 곧 수선사의 지눌을 찾아가 승려의 길로 들어섰다. 희종 원년(1205) 지눌로부터 선문답으로 인가를 받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趙州의 화두와 大慧宗杲의 十種病에 관한 문답으로 수선사의 계승자로 인정을 받았다. 혜심은 지눌의 불교를 기본적으로 계승한 인물로서0078) 崔柄憲,<眞覺慧諶, 修禪社, 崔氏武人政權>(≪普照思想≫ 7, 1993), 81쪽. 지눌이 입적하자 문도들에 의해 추대되고 왕의 재가를 받아 수선사 제2세가 되었다.

 혜심이 수선사에 주석하자 중앙정치권력자들은 신흥불교세력을 대표하면서 부상하던 수선사를 포섭하고자 관심과 후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먼저 강종은 수선사의 증축을 有司에 명하였으며, 혜심의 속가제자가 되어 예를 다하고 법복과 불구를 보내주면서 法要를 구하였다. 고종은 즉위하자 혜심에게 선사를 제수하였으며 동왕 3년(1216)에 승계의 최고직인 대선사를 제수하였다. 고려시대 승려들은 제도적으로 왕자나 소군을 제외하고는 승과를 거쳐야만 승계를 받을 수 있었으나, 혜심은 이러한 승정체계를 따르지 않고 파격적으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예외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최씨집정자, 즉 최충헌의 힘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吏·兵部의 장관을 겸직하여 관리들의 銓注權을 독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승정까지도 좌우하였기 때문이다.0079) 張東翼,<慧諶의 大禪師告身에 대한 檢討-高麗 僧政體系의 理解를 中心으로->(≪韓國史硏究≫34, 1981), 98쪽.

 혜심이 승과를 거치지 않고 승계를 받은 사실은, 지눌이 비록 승과에 합격했으나 승계를 받지 않고 산림에 은둔하여 자기수련과 정혜결사에 매진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제 수선사는 국가의 승정체계에 편입되고 정치권력과의 관계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관계는 최충헌 사후 최우에 이르러 이루어졌는데, 혜심비문에서 강종과 고종 이외에 들고 있는 최우와 崔洪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최우는 무신정권기 명실상부한 최고실권자로 그의 참여와 후원은 수선사의 교단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0080) 閔賢九,<月南寺址 眞覺國師碑의 陰記에 대한 一考察-高麗 武臣政權과 曹溪宗->(≪震檀學報≫ 36, 1973). 이 논문은 진각국사 혜심비의 음기분석을 통하여 최우를 중심으로 한 최씨무신정권의 주요인물을 주시하고, 이들과 혜심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양자의 관계는 결국 수선사 교단을 확립시키는 터전이 되었음을 밝혔다. 그는 수선사의 새로운 선사상에 대한 관심과 수선사를 후원하는 사회계층의 포섭, 그리고 자기 집안의 식읍이 있는 지역에 위치한 수선사를 통하여 이 지역의 경제적 관리를 원활히 하기 위한 현실적 의도에서 수선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0081) 蔡尙植,<고려후기 修禪結社 성립의 사회적 기반>(≪韓國傳統文化硏究≫6, 1990 ; 앞의 책, 20쪽). 수선사측에서도 교화라는 종교적 목적에서 뿐만 아니라 안정된 사원재정을 위해 중앙과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우에 이르러 정치권이 일단 안정되어 가고 불교계에 대한 개편도 수선사교단을 중심으로 정비되는 상황에서 양자는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게 되었다.

 최우는 자신의 아들 萬宗과 萬全을 혜심 문하에 출가시켰다. 그 밖에 법복과 불구를 계속 지원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修禪社寺院現況記>에서 볼 수 있듯이 寶라는 명목으로 전답과 山田 및 염전 등을 수선사에 시납하였다. 최우의 후원을 시작으로 고위관료들이 대거 수선사에 입사하여 후원자가 되었으며, 결국 수선사는 이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초창기 인근 지방민의 소규모적 후원하에서 빈약할 수밖에 없었던 사원재정을 일정한 궤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康津郡에 月南寺와 같은 대찰을 세울 수 있었으며 지눌 때보다 많은 사찰을 수선사의 영역에 둘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대 제일의 사원으로 부상하여 불교계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최우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參政(종2품) 崔洪胤은 혜심이 사마시에 응시하였을 때 試官이었는데, 혜심이 수선사 사주가 되자 입사하여 제자됨을 청하면서 편지를 보내온 뒤로 교류를 갖게된 인물이다. 혜심이 이러한 유학자 관리와 깊이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학을 공부한 과거출신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는≪曹溪眞覺國師語錄≫에서 볼 수 있듯이 최홍윤을 비롯한 유학자 관료와의 교유에서 다양한 불서를 인용하고 자유자재로 偈頌을 구사하면서 看話禪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유불일치사상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수선사의 새로운 선사상이 중앙으로 널리 확산되는데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

 혜심은 수선사에 입사한 강종을 비롯한 왕실과 최우를 중심으로 한 무신세력 및 최홍윤으로 대표되는 유학자 관료에게 각각의 위치와 상황에 맞게 법요를 설하고 다양한 화두를 내려주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지도하고 있다. 특히 최우에게는 그의 정치적 교화를 칭송하고 上根人이라 치켜 세웠다. 그리고 왕실과 최씨가를 위해 장수를 기원하는 祝聖儀式을 행하였으며 선법의 선양으로 전쟁의 종식을 기원하는 호국적 차원의 鎭兵儀式을 자주 행하였다. 이는 당시 거란유족과 몽고침입이라는 전쟁상황 아래 수선사가 정신적 구심체가 되어 국가의식을 고양시켜 고려의 국가체제 유지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급부상하던 신흥불교사원의 명망받는 사주로서 그의 최우정권에 대한 칭송은, 무신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최우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힘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선사가 결사이념에서 경계한 정치권력과의 밀착을 멀리 예고하는 것으로, 결국 향후 수선사가 권력에 종속됨을 알리는 전주곡이 되는 것이다.

 이같이 혜심은 중앙정치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고 대사회적 인식도 갖추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최우가 개경으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결코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菩薩布施行을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지배층으로서 재물이 있는 사람은 빈민을 위해 물질적 차원에서의 구제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0082) 慧諶,<答鄭尙書邦甫>(≪曹溪眞覺國師語錄≫;≪韓國佛敎全書≫6, 東國大, 1984).

 이는 천민·농민항쟁과 몽고침입으로 피폐해진 민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常住寶의 건전한 운영을 표방한 것도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일반민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혜심이 중앙정치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일반민을 위한 사회적 인식을 가졌던 것은 지눌의 결사이념의 계승과 통하는 것이다.

 혜심 때의 수선사는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일반민의 후원으로 유지되었던 단계를 지나 점차 후원세력이 중앙정치권력으로 옮겨가면서 사원재정이 크게 확대되었다. 당시 재정규모는 고종 17년(1230)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修禪社寺院現況記>와0083) 이 고문서의 작성시기에 대해서 고종 8년(1221)부터 4∼5년 이내 설(任昌淳,<松廣寺의 高麗文書>,≪白山學報≫11, 1971)과 고종 8년부터 10년 사이의 어느 한때 설(朴宗基,<13세기 초엽의 村落과 部曲>,≪韓國史硏究≫33, 1981)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문서가 전국의 사원을 일시에 파악할 목적으로 국가에 의해 작성되어 그 1부가 수선사에 보관되어 온 것으로 일단 보고,≪삼국유사≫권 4, 義解 5, 寶壤梨木에서 언급된 내용, 즉 고종 17년 晋陽府에서 五道按察使에게 貼을 내려보내 각도 선교사원의 창건연월과 실태를 조사하여 成籍하도록 하였다는 자료에 주목하여, 이 때 작성된 문서의 일부일 것으로 생각한다. 고종 11년에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常住寶記>를0084) 韓基文,≪高麗時代 寺院의 運營基盤과 願堂의 存在樣相≫(慶北大 博士學位論文, 1994), 95쪽.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수선사사원현황기>에 의하면 수선사는 본래 전래하는 忌日(晨)寶와 雜寶의 租 4천 석이 있었다. 또 혜심의 사재와 단월의 시납으로 이루어진 祝聖寶·鎭兵寶·長年寶의 조 6천 석이 있었고, 고종 3년에 내시 文正이 鎭兵을 위해 국왕의 교지를 받들어 시납한 油香寶 100석이 있었다. 후일 유향보를 제외한 나머지 보의 10,000석은 상주보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전답으로 참지정사 최이가 祝聖油香寶·國大夫人宋氏忌日寶·同生妹氏忌日寶로 시납한 135결 159부(卜) 상장군 盧仁綬가 축성을 위해 시납한 51결 90부, 상장군 金仲龜가 父母忌晨寶로 시납한 17결, 檢校軍器監 徐敦敬이 부모기신보로 시납한 35결 63부 등 총 241결 12부가 있었다.0085) 수선사 寶의 총 곡식량은 조 10,100석으로 이를 운영하여 1년에 거두어 들이는 이자는 3,366.7석이 된다. 혜심은<상주보기>에서 정해진 규정에 의거해 이자를 거둔다고 했는데, 그 경우 이식은 년 1/3인 것이다. 보의 운영을 통한 이자 수입은 전답 241결 12부에서 1년에 징수하는 수입 1,900석 가량보다 훨씬 많은 양이다(李炳熙,<高麗武人執權期 修禪社의 農莊經營>,≪典農史論≫1, 서울市立大, 1995, 64∼65·73∼75쪽). 이상 전답 경영과 寶 운영으로 생기는 수입 총 5,270여 석은 승려생활비와 건물유지비로 지출되었고 이외에 주로 供佛·鎭兵·祝聖하는 비용에 쓰였다.<수선사사원현황기>에 의하면 당시 수선사는 상주하는 승려가 143명이었고, 건물은 지눌이 중창한 후 80여 칸이었다가 이후 혜심 때 강종의 명령으로 제2 중창을 하였으므로 100여 칸 전후였을 것이다. 이 밖에도 시납받은 柴地와 염전 13곳, 산전 3곳, 節席 4座 등이 있었고 노비 17명이 있었다.

 이같이 시납된 토지는 수선사의 소유지로 편입되었으며, 따라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중앙정치권력과의 깊은 유대로 보아 면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규모는 군현의 범위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군현에 소규모로 분산되어 있었다. 지역적으로 전남지역에 모여 있지만 수선사에 인접하여 분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거리를 두고 각각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수선사가 위의 토지를 경영하면서 거두어들이는 수입은 적지 않은 양이었다고 보인다.0086) 李炳熙, 위의 글, 61∼65쪽.<수선사사원현황기>에 기재되어 있는 이외의 토지가 더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상정할 때 그 양은 더 많았을 것이다.

 수선사의 재정은 寶의 운영을 통해서도 확보되었다.<상주보기>에 의하면수선사는 창립 이래 사원재정이 확보되지 못해서 탁발에 의지하여야 했기 때문에 승려들은 수행에 정진할 수 없었고 단월들도 부담을 느껴, 결국 안정된 재정이 필요하여 보를 설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주보의 목적은 供佛·養僧·鎭兵·祝聖의 경비로 사용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보의 기금은 앞에서 언급한 正租 10,000석이었다. 보의 운영은 수선사 인근지역에 있는 퇴락한 7개의 작은 절을 국가의 승인을 받아 보수하여 有道者에게 맡기고, 이전부터 수선사에 속해 있던 4개 사찰을 더하여 총 11개 사찰에 곡식을 나누어 출납의 장소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의 규모가 커 출납의 편의를 위해 말사에 분산시켜 관리하게 했던 것이지만, 새로운 사찰의 경영으로 수선사의 영향력이 그만큼 확대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선사의 보 운영에서 주목되는 것은 먼저 당시 보의 불법적 운영을 비판하면서 정해진 규정에 의거해 이식을 낮게 하고 子母停息의 법을 따르고 납부자가 量槩作業을 직접하도록 하는 원칙을 지킬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운영도 그러했을지 다소 회의적이지만, 수선사는 건전한 보의 운용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핍박받던 일반민에게 대한 구휼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 기능을 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 전시기에 걸쳐 탈법적으로 무수히 자행되었던 여타 사찰의 보 운영과는 극히 대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합법적 운영이 가능하였던 것은 결사가 성립할 때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일반민에 대한 배려, 그리고 초기 결사가 지향했던 이타행을 중시하는 대사회적 인식 때문이었다고 본다.

 수선사가 토지경영과 보의 운영에서 얻는 상당한 양의 수입은 일차적으로 사원재정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 수선사에 시납된 토지를 경작하여 지대를 납부하고 보에서 곡식을 빌려간 일반민들은 일단 수선사와 긴밀한 관련을 맺으면서 삶을 영위해 나갔을 것이다. 따라서 수선사는 천민·농민항쟁과 뒤이은 여원전쟁으로 피폐해진 지방민에게 긍정적 차원에서 일정한 신앙공동체 나아가 경제공동체의 구심점 역할도 하였다고 본다. 그 영역은<수선사사원현황기>에 언급된 토지 분포지역과<상주보기>에 보이는 상주보 운영지역으로 보아 수선사를 중심으로 대개 서로 羅州郡, 서북으로 高敞郡, 남으로 長興郡, 북으로 谷城郡, 동으로 順天 이내의 지역이었다.0087) 崔柄憲, 앞의 글(1993), 199쪽.

 혜심의 사상은 그가 간화선 선양을 위해 노력하였고 유학자 관리를 중심으로 유불일치사상을 주장했다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의 간화선은 지눌이 돈오점수·정혜쌍수의 토대 위에서 말년에≪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말미에서 주장하고≪看話決疑論≫에서 체계화시킨 선사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혜심은 이러한 돈오점수·정혜쌍수와 간화선에 대한 철학적 기초에 근거하여 간화선의 실천적 선양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0088) 김호성,<慧諶 禪思想에 있어서 敎學이 차지하는 의미-普照知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普照思想≫7, 1993) 참조.

 혜심에게서 간화선은 선수행의 방법이요 이러한 수행을 통한 궁극적인 도달점은 無心이었다. 이 무심사상은 지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혜심은 먼저 해탈하는 길은 오직 마음(心)을 깨치는데 있는데, 이 마음은 중생의 本源으로 부처와 다름없음을 경론에 의거하여 증명해 보이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마음은 망상으로 스스로 막혀 있다. 따라서 이 망상을 떠나면 마음이 자연히 現前하여 깨달음에 이른다 하고 이를 無心·眞心이라 하였으니 바로 부처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만약 경론에 의해 이론적·논리적 추구로 망상을 떠나려 한다면 오히려 망상에 망상을 더할 뿐이라 하고, 오직 그 방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논리적 사고를 허용치 않으면서 곧바로 무심에 나아가게 하는 가장 오묘하고 은밀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혜심은 상대에 맞는 다양한 화두를 상황에 맞게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최우는 글씨에 능하므로「붓」이라는 화두를 내려주어 참구할 것을 권하고 있다. 결국 혜심에게 화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혜심의 화두에 대한 관심은≪禪門拈頌集≫ 30권과<狗子無佛性話揀病論> 1편의 저술로 나타났다. 전자는 송대≪景德傳燈錄≫의 燈史體制와≪碧巖錄≫의 염송체제를 빌어서 선가의 古話(화두) 1,125칙과 이에 대한 여러 선사의 徵·拈·化·別·頌·歌 등의 要語를 채집하여 편찬한 방대한 화두염송집이다. 후자는 조주의「無字(狗子無佛性話)」라는 화두를 참구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오해의 예를 들어 그 잘못을 간별해 주기 위해 쓰여진 논이다. 두 저술은 지눌의 이론적 간화선에서 혜심의 실천적 간화선에로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준 禪書이다. 특히≪선문염송집≫은 조선 초기의 權近이≪陽村集≫ 曹溪拈頌跋에서 “우리 나라에서 조계(선종)를 배우는 자로 이 글에 마음을 쏟지 않는 자가 없었다”할 정도로 중시되었다.

 혜심의 간화선은 지눌과 마찬가지로 상근기인을 위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혜심은 일반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金剛經≫공덕신앙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金剛般若波羅蜜經贊>·<小字金剛經贊>·<金剛般若波羅蜜經跋文>등은≪금강경≫을 수지하여 얻게 되는 이적과 영험을 설명하고 있다.≪금강경≫은 중국선종사에서 육조 혜능이 이전의 난해한≪楞伽經≫을 대신하여 중시한 경전이다. 혜능은 알기 쉬운≪금강경≫을 선종의 중심경전으로 채택하면서 大衆禪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지눌도 이 경전을 매우 중시하여 읽기를 권하였고, 혜심은 공덕신앙의 차원에서 일반민에게 수지와 독송을 권하고 있다. 혜심의≪금강경≫공덕신앙에 대한 관심은 보다 많은 사람이 수선사에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하겠다.

 혜심의 유불일치사상은 그가 유학을 공부한 향리학식층의 자제로서, 그 역시 어려서부터 유학을 수업하고 사마시에 합격한 경력을 바탕으로 한 유학자 관리와의 교류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즉 혜심은 최홍윤의 서신에 대한 답서에서 유불일치사상, 한걸음 더 나아가 불교우위론을 내세우고 있다.0089) 慧諶,<答崔參政洪胤>(≪曹溪眞覺國師語錄≫;≪韓國佛敎全書≫6).그는 대전제로 유·불이 이름만을 생각하면 매우 다르지만 진실을 알면 다르지 않다고 하고 두 가지 점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먼저 공자가 끊었던 네 가지, 즉 “恣意가 없고(毋意), 獨尊이 없고(毋我), 固執이 없고(毋固), 期必이 없음(毋必)”(≪論語≫ 子罕)을 儒佛道의 조화를 주장한 북송대 無盡居士 張商英이 眞意·眞我·眞固·眞必이라 하고, 이를 불교적 관점에서 일일이 해석하여 공자의 四毋와 일치시킨 예를 제시하고 있다. 혜심은 장상영의 해석에 동감하고 이 四毋와 四眞을 無念心體라 하고 이는 비었으면서 신령하고 고요하면서 비추고, 만법을 꿰뚫고 十方에 두루 사무치며 고금을 통해 끊어지거나 멸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무념심체는 바로 혜심이 지향하는 무심·진심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혜심은≪起世界經≫의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두 성인을 震旦(중국)에 보내어 교화를 행하리라’ 하셨는데, 한 사람은 노자로서 迦葉菩薩이고 또 한사람은 공자로서 儒童菩薩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유교와 도교가 불법에서 기원한 것이니 방편은 다르나 진실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증명으로 공자가 말한 “參아, 내 道는 하나로 꿰었다”, “아침에 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論語≫ 里仁)에서의 도를 역시 불교적으로 해석하여 “도란 萬法을 관통하여 끊어지거나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끊어지거나 멸하는 것이 아닌 줄을 알았기 때문에, 공자는 도에 맡겨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같이 혜심은 유불일치를 두 가지 점에서 증명하고, 결론적으로 당대 선승 馬祖道一의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卽心卽佛, 非心非佛)”라는 화두를 때때로 참구하여 철저히 깨치는 것을 법칙으로 삼도록 권고하는 것으로서 답신을 마치고 있었다. 또 혜심은 어느 書生에게 주는 글에서도 동진 때 慧遠의≪沙門不敬王者論≫과 양나라 沈約의<內典序>(道宣撰,≪廣弘明集≫ 권 19)를 인용하면서 역시 유불일치를 말하고 있으며, 당대 韓愈의 배불론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0090) 慧諶,<贈書生詩>(≪無衣子詩集≫권 하 ;≪韓國佛敎全書≫6).

 이같은 유불일치사상은 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중국에서 전개된 유불논쟁에 대한 흐름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전의 유불론이 역할분담론적 논리였던 것과는 달리, 혜심은 유교와 불교를 철학적으로 일치시키고 있으며, 결국은 불교가 주체가 된 일치를 모색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장학풍적 유학에 대하여 지눌 불교철학의 자신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교측의 유불론은 유자층에 영향을 주어 유불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으며, 지눌의 정치한 심성론과 함께 주자성리학 도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혜심 불교사상의 핵심은 간화선이고 그 선양을 위한 노력은 수선사 제2세 夢如에게로 계승되었다. 몽여(?∼1252)0091) 호가 小融이고 시호는 淸眞國師이다. 그는≪禪門拈頌集≫을 重刊한 이외에 다른 저술을 남기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의 비문은 현존하지 않고 그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자료만이 눈에 뜨일 뿐이다. 한편 1986년 경주 祇林寺의 大寂光殿 毗盧舍那佛像에서 龜庵老禪이 편집한≪禪門雪竇天童圜悟三家拈頌集≫이 나왔는데, 蔡尙植은<修禪社刊 『禪門三家拈頌集』의 사상적 경향>(≪釜山直轄市立博物館年報≫11, 1988 ; 앞의 책)에서 귀암노선을 夢如로 추정하고 있다.는 혜심이 입적하자 사주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년간을 수선사에 머물렀다. 그는 간화선을 따르는 臨濟宗계통의 선승이면서 潙仰宗이나 曹洞宗계통의 선사상에도 안목이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혜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수선사의 계승자가 되었다.

 몽여가 주목되는 것은 그가≪선문염송집≫을 중간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혜심이≪선문염송집≫ 서문에서 “다만 유감스런 일은 諸家의 語錄을 다 보지 못하여 빠뜨려진 것이 있을까 염려되는 것이다. 미진하게 된 것은 다시 뒷날의 어진이를 기다리기로 한다”는 유촉을 이어받아 중간을 의도하였다. 또≪선문염송집≫ 초판이 개경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강화천도(1232) 와중에서 유실되었기 때문에 다시 간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혜심이 미쳐 이용하지 못한 여러 어록에서 새로 古話 347칙을 뽑아 이를 초판본에 더하고 단속사 주지 만종의 도움을 받아 고종 31년(1244)에서 고종 35년 사이에 晉州의 南海分司大藏都監에서 중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지눌과 혜심으로 이어지는 간화선의 선풍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와 다양한 선사상에 대한 깊은 안목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몽여의 선사상은 그대로 혼원·천영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규보(1168∼1241)를 대표로 하는 유학자 관료와의 교류를 통해서 사대부층에 선사상을 이해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몽여 때 수선사는 최씨무신정권과 새로운 관계를 갖는다.≪東國李相國集≫에 의하면 이규보는 몽여에게 東堂(과거 본고시)의 경비를 요청하였고 몽여는 이에 응하였다. 요청 명목은 빈번한 과거시험의 경비 때문이었다고 한다.0092) 李奎報,≪東國李相國集≫후집 권 12, 書 寄松廣寺主禪師夢如手書.
―――,≪東國李相國集≫후집 권 12, 書 答松廣寺主手書.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대몽항쟁으로 인한 재정궁핍과 강화천도 이후 江都의 경영 등 국가운영에 많은 재정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씨무신정권은 이규보를 통해서 수선사에 재정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는 수선사의 사원재정이 혜심 이후 그만큼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수선사에 대해 재정적 기부를 강요하는 것은 정치권력이 수선사를 정권유지 차원에서 왜곡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수선사는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결사이념의 실천과는 먼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여 때를 지나 混元·天英 때에 이르면 더욱 심화된다.

 수선사 제4세 혼원(1191∼1271)0093)王師冊號가 沖鏡이고 諡號는 眞明國師이다. 禪選 上上科에 합격한 경력이 있다. 아버지는 李師德인데, 黃海道 遂安縣(遂安郡)의 토성으로 京市署丞(정8품)을 지냈다. 어머니는 閤門祗候(정7품)를 지낸 金閱甫의 딸이다. 저술은 없으며, 金坵가 지은<臥龍山慈雲寺王師贈諡眞明國師碑銘>(원종 13년 ; 1272)이 현존한다.은 최우에 의해 定慧社 주지와 禪源社 법주가 되었으며 대선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崔沆의 영향력으로 고종 39년 수선사 사주가 되어 고종 43년까지 있었다. 선원사는 강도에 세워진 최우의 원찰이자 대몽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한 사원으로0094) 金光植,≪高麗 武人政權과 佛敎界≫(民族社, 1995), 262쪽. 수선사 다음으로 사세가 매우 컸다. 그 법주는 당대 불교계를 주도하던 수선사 사주의 제자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이 후일 최씨가의 후원으로 수선사 사주가 되었으니, 혼원과 천영이 그에 해당된다.

 혼원이 최우의 신임을 받아 선원사 제1세 법주로 임명된 것은 수선사와 최씨무신정권과의 관계가 몽여 때와는 또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혜심·몽여가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던 데 반하여, 혼원에 이르면 완전히 밀착단계로 바뀐다는 점이다. 이는 최씨무신정권의 후원이 확대되는 것과 함께 수선사가 최씨무신정권에 종속되어 정권유지에 직접적으로 포섭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혼원은 선원사에 주석하면서 항몽의식 고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는 당시 고려 국가의 최대과제였던 항몽투쟁에 동참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고 아니할 수 없겠으나, 일면 최씨가의 정권안보에 이용된 측면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혼원은 수선사에서 牧牛子 지눌의 가풍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고 그의 비문은 전하고 있다. 목우자의 가풍은 신앙결사를 통하여 돈오점수를 철학적 기반으로 한 정혜쌍수의 실천이다. 그리고 일반민을 위한 이타행의 실천이다. 하지만 현존 자료를 통해 볼 때 혼원에게는 이러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혜심과 몽여로부터 배운 간화선의 선풍이 보일 뿐이며, 그렇다고 이들의 사상을 진전시킨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천영에게로 이어진다.

 수선사 제5세 天英(1215∼1286)0095) 天英은 뒤에 휘를 安其·安且라 고쳤으며, 字는 乃老이고 自號를 晦堂老人·慈忍室老人이라 하였으며, 旦公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시호는 慈眞圓悟國師이다. 禪選 上上科 출신이다. 선조는 鷄林 金氏였는데 帶方郡(南原)으로 이사하고 梁氏로 개명하여 남원도호부의 土姓이 되었다. 아버지는 梁宅椿이요, 첫째 어머니는 隴西郡(黃海道 瑞興都護府)의 토성인 김씨의 딸이다. 둘째 어머니는 별장 배씨의 딸이다. 저술은 豪膽雄深하였다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다.<德異本六祖壇經跋文>과<禪門雪竇天童圜悟三家拈頌集>에 대한 跋文이 남아 있으며, 李益培가 지은<曹溪山第五世贈諡慈眞圓悟國師碑銘>(충렬왕 12년 ; 1286)이 현존한다. 일찍이 8세에 혜심에게 출가하였고 몽여와 혼원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지눌 이래의 선사상을 계승하였는데, 특히 혜심이 크게 선양한 간화선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은 최씨무신정권과의 관계에서 혼원 때와는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양자의 본격적인 관계는 고종 35년(1248) 최우에 의해 선사에 제수되고 단속사 주지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다음해 최우가 昌福寺를 창건하고 낙성법회를 주맹토록 하였으며, 고종 38년에는 최항이 보제사에 별원을 창건하고 구산문 선승을 모아 주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몽여가 입적하자 선원사 법주로 있던 혼원을 수선사 사주로 임명하고, 대신 천영을 선원사 제2세 법주로 삼았다. 선원사와 창복사는 최우가 세운 원찰인데 후일 최충헌과 최우의 眞殿寺院이 된 최씨가의 중요사원이다. 이들 사원은 모두 강화도 천도 후 최씨정권에 의해 세워져 대몽항쟁기에 최씨정권 유지를 위해 항몽의식 고취에 적극적이었던 사원이다.

 천영과 최씨정권의 관계는 속가의 아버지와 이복동생이 문음의 혜택을 입거나 노비를 하사받을 정도의 깊은 관계로 이어졌다.<圓悟國師父梁宅椿墓誌>(고종 4년)에 의하면 천영의 아버지 양택춘(1172∼1254)은 職事가 없는 散秩이었는데, 고종 18년 그의 나이 60세가 되어 비로소 溫水郡(溫陽)감무를 시작으로 실직을 받고 관리로 나아간 인물이다. 그런데 천영이 고종 33년 선원사에 가서 최우에게 三重大師를 제수받은 후부터, 양택춘은 최우와 최항에 의해 여러 관직을 받아 승진하여 마침내 朝請大夫 禮賓卿(종3품)으로 치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3명도 모두 어려서 각각 삼중대사와 道場庫判官 및 隊正이 되었는데 이 모두가 천영의 문음이었다. 고려시대 음서는 왕족의 후예와 공신의 후손 및 5품 이상 일반 고급관료의 자손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승려의 영달로 인하여 아버지와 심지어 동생에게까지 문음의 혜택이 돌아가고 있는 경우는 처음 있는 사례로서 천영과 최씨정권과의 관계가 특별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0096) 許興植,<高麗時代의 새로운 金石文資料>(≪大丘史學≫ 17, 1979 ; 앞의 책, 694쪽). 이 밖에<松廣寺圓悟國師奴婢寄進立案>(충렬왕 7년 ; 1281)에 의하면 양택춘은 최항에 의해 국가로부터 노비 3구를 하사받는 등 실질적으로 경제적 혜택을 받기도 하였다.

 천영 때의 수선사는 강력한 후원세력이었던 최씨정권이 몰락하고 왕정복고와 더불어 원의 간섭이 시작되면서 혜심·몽여·혼원 때와는 달리 불교계에서의 주도권을 점차 상실해 갔다. 천영이 수선사 사주가 된 것은 고종 43년이다. 혼원이 물러나기를 청하고 천영으로 대신하도록 하자, 고종이 천영에게 대선사를 제수하고 수선사 사주에 명하였던 것이다. 물론 천영이 수선사 사주가 되는 데는 그가 수선사 출신이었다는 점이 일차적으로 작용하였겠지만, 선원사 법주를 역임하면서 최항의 절대적 후원을 받아 가능하였던 것이다. 천영이 수선사에 사주로 머문 기간은 충렬왕 12년까지 30여 년이다. 그 사이 고종 44년에 최항이 죽고 다음해 崔竩가 살해됨으로써 최씨정권이 막을 내리고 그 다음해 고종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천영의 정치적 후원세력은 모두 사라졌다. 천영비문에는 원종의 보살핌이 날로 두터웠고 충렬왕과 왕비 元成公主의 은총이 컸다고 했으나 특별한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왕사책봉도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을 비문은 말하고 있다. 당시는 가지산문의 一然이 원종 2년(1261) 왕의 명을 받아 강화도 禪月社에 주석하고 충렬왕 9년에 國尊에 책봉되어 왕권과 밀착, 무신집권기 수선사를 대신하여 불교계의 중심에 있었다.0097) 蔡尙植,<普覺國尊 一然에 대한 硏究>(≪韓國史硏究≫ 26, 1979 ; 앞의 책).

 이상과 같이 혜심·몽여 때의 수선사는 당대 제일의 사원으로서 결사이념의 계승과 중앙정치권력과의 관계가 균형을 이루면서, 결사이념이 일면 계승된 측면이 보이면서도 일면 권력에 종속될 위험성이 상존하였다. 그러나 혼원·천영 때에는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변질되고 말았으나 禪風이 그나마 유지되었던 점은 지적해 둘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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