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4) 백련사의 성립과 전개
  • (1) 백련사 결사운동의 성립과 불교관

(1) 백련사 결사운동의 성립과 불교관

 12세기 후반의 무신란을 기점으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변동 속에서 기존의 보수적 경향이 강화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으로 修禪社·白蓮社 등의 신앙결사가 결성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왕실과 귀족에 의해 지원되던 결사라는 형식의 신앙활동과 지방사회의 토호층에 의해 주도되던 향도조직에 의한 신앙활동이 서로 괴리된 채 공존하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 신라 하대에 성행하던 화엄계통의 결사라든가,0108) 曺庚時,<新羅 下代 華嚴宗의 構造와 傾向>(≪釜大史學≫ 13, 1989). 고려 인종대에 지리산에서 행해진 법상종계통의 津億이 주도한 水精社0109)≪東文選≫ 권 64, 記 智異山水精社記(權適). 등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8∼9세기 이래로 지방사회에서 소규모의 사원을 중심한 造塔·鑄鐘·불사의 건립 등의 신앙활동이 광범위하게 행해진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경우 대체로 미륵신앙과 미타신앙이 주요한 신앙형태였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평가될 수 있는 신앙결사는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변동과 함께 다양하게 전개된 예를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知訥(1158∼1210)이 개창한 것으로 후에 수선사로 사액되었던 定慧結社와 了世(1163∼1245)가 개창한 白蓮結社라 할 수 있다.

 이들 양대 결사는 기존의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운동이라는 점에서 공동의 과제를 갖고 출발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서 지방불교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이들의 성격을 불교개혁운동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러면 백련결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백련결사는 천태종 승려인 요세에 의해 개창된 신앙결사인데,0110)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蔡尙植,<高麗後期 天台宗의 白蓮社 結社>(≪韓國史論≫ 5, 서울大 國史學科, 1979 ;≪高麗後期佛敎史硏究≫, 一潮閣, 1991).
高翊晉,<圓妙國師 了世의 白蓮結社>(東國大 佛敎文化硏究所 編,≪韓國天台思想硏究≫, 1983).
요세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풍부하다.0111) 대표적인 것만 들면≪東文選≫권 117, 碑銘 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幷書(崔滋)(이하 了世碑銘으로 약칭함) 및 권 27, 制誥 萬德山白蓮社主了世贈諡圓妙國師敎書(閔仁鈞)이다. 그의 속성은 徐氏로 字는 安貧이며 의종 17년(1163)에 新繁縣0112)≪高麗史≫ 권 57, 志 11, 地理 2, 江陽郡 屬縣.에서 戶長인 必中과 동향인으로서 同姓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요세는 그의 부가 호장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합천지역의 토호출신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명종 4년(1174)에 천태종 승려로 입문하였으며 그 다음해 僧選에 합격하고 신종 원년(1198)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高峯寺의 법회에 참석하여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을 계기로 신앙결사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 해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靈洞山 長淵寺에서 법석을 열었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지눌이 公山의 會佛岬에 있으면서 修禪을 권하므로 그와 함께 수선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희종 4년(1208) 봄에 靈巖의 月出山 藥師蘭若에서 거주할 때였다. 이 때 홀연히 생각하기를 “만약 天台妙解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永明延壽가 지적한 120病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0113)≪東文選≫ 권 117, 碑銘 了世碑銘. 하여 延壽가≪禪宗唯心訣≫에서 지적한 120가지의 수행상의 제약을 극복하려면 천태의 묘해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요세는 수선으로부터 天台敎觀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어<妙宗>을 즐겨 강의하였으며 실천행으로 修懺을 강조하였다. 이후 요세는 맹렬한 참회행을 닦아 날마다 53佛을 12번이나 돌았으며 비록 극심한 추위와 더위에도 쉬는 일이 없어 수선하는 무리들이 이를 비꼬아서 ‘徐懺悔’라고 불렀다는0114) 위와 같음. 것이다.

 그 뒤 요세는 약사암에서 萬德山으로 주거를 옮겨 고종 3년(1216)에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성하였다. 이는 耽津(현 강진)의 토호로 추정되는 崔彪·崔弘·李仁闡 등의 지원에 의해 결성된 것이다.0115) 위와 같음. 그러다가 고종 8년 봄에는 당시 帶方(현 남원)太守 卜章漢의 요청에 의해 남원 관내의 백련사에다 제2의 백련사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후 백련사에서는 고종 19년 4월 8일 공식적으로 普賢道場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같은 해 6월에 최씨무신정권이 강화도 천도를 단행한 것과 어떤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다가 고종 23년 제자인 天頙으로 하여금<白蓮結社文>을 찬술토록 하여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백련사 결사를 표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백련사의 움직임에 대해서 강화도정부는 백련사가 보현도량을 설치하고<백련결사문>을 공포한 이후에 와서야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이와 같이 백련사(보현도량)와 최씨정권간에 서로 유대를 갖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몽고침입과 관련된 것으로만 추측할 뿐이다.

 요세가 개창한 백련사는 고종 3년 전후에 개창되었으나 고종 19년 보현도량을 개설함으로써 그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면 요세의 불교관과 보현도량의 사상적 기반을 살펴보기로 하자.

 보현도량의 사상적 기반은≪妙法蓮華經≫ 28품<普賢菩薩勸發品>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권발품은 석가와 보현보살과의 문답형식을 빌어≪法華經≫을 護持함으로써 얻어지는 공덕을 설한 것이다. 따라서 보현도량은 이 권발품에 의한 일종의 실천문으로써 신앙면을 강조한 성격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법화경≫에 입각하여 설치한 보현도량은 백련사가 표방하는 불교관을 더욱 실천적으로 강화하는 것이지만, 요세가 표방한 불교관은 「法華三昧」·「求生淨土」·「法華懺法」을 골격으로 하고 있었다.0116) 위와 같음.

 이러한 요세의 사상적 특징은 수나라 때에 천태종을 개창한 天台智者와 이후 그를 계승한 북송의 四明知禮(960∼1028)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요세가 지례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그의 저술인<묘종>을 즐겨 강설했다는 점과 그가 개창한 염불결사의<淸規>를 본떠 수행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0117)≪萬德寺志≫ 권 1, 壬辰年普賢道場起始疏.<묘종>은 지례가 그의 만년에 智者의≪觀無量壽經疏≫에 주석을 붙인≪妙宗鈔≫ 6권을 가리키는데, 이는 지자의 天台止觀을 바탕으로 한 정토관을 계승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요세는 사상적으로 지례의 영향을 받아 보현도량을 개창하면서도 이미 존속하고 있던 고려 천태종에서 그 정통성을 찾으려 하지 않았으며,0118)≪東文選≫ 권 117, 碑銘 了世碑銘. 오히려 자신을 ‘智者의 嫡孫’이라 부를 정도로 지자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던 것 같다.0119) 위와 같음. 이는 요세가 지자의≪摩訶止觀≫(20권),≪法華玄義≫(20권),≪法華文句≫(20권)에서 강요만 뽑아≪三大部節要≫라 이름하고 인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0120) 위와 같음.

 이상과 같이 요세는 지자를 정통으로 삼고 지례의 염불정토적 경향을 계승한 인물임을 알 수 있는데, 그는 한편으로 이를 토대로 하여 천태종의 전통적 懺法을 실천문으로 중시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요세 이전에 이미 천태종에서 禮懺法을 설치한 기록이 보이지만0121)≪高麗史≫ 권 10, 世家 10, 선종 9년 6월 임신.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면 요세가 오랜 기간에 걸쳐 수행했다는 「法華懺法」은 어떤 내용일까. 그 내용은 南嶽慧思(515∼577)를 계승한 지자가 더욱 체계화시켜 찬술한≪法華三昧懺儀≫(1권)에 의거한 참법이 아닌가 한다.0122) 高翊晋, 앞의 글, 5∼6쪽 참조. 최근에 이에 관련된 자료가 발굴된 바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요세는 이러한 법화참법에 바탕하여 지자의 止觀修禪法인 천태선관을 하고 이와 아울러≪법화경≫을 염송하였으며, 그 여가에는 지자의 법화 3부 중 일부를 독송하고 准提神呪를 천번, 미타불을 만번 소리내어 불렀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이는 「준제신주」는 당대와 송대 초에 법화·천태계통에서 陀羅尼를 염송하는 것이 유행이었던0123) 徐閏吉,<了世의 修行과 准提呪誦>(≪韓國佛敎學≫ 3, 1977), 72쪽. 사실로 미루어 이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또 「53體佛」을 열두 번씩 돌기도 한 사실은 송대 초의 法眼宗의 경향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0124) 閔泳珪,<高麗雲黙和尙無寄輯佚>(≪韓國佛敎思想史≫, 圓光大 出版局, 1974), 3쪽.

 이러한 몇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요세의 불교관은 대체로 전통적인 천태종에 바탕하고 있었으며 여기에다 실천적 수행방식은 다분히 송대 초의 신앙결사의 맥락을 계승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백련결사에서 그들 일상생활의 淸規로 송대 초의 지례의 염불결사를 따랐다는 사실에서도 짐작되는데, 백련사의 청규가 현전하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요세의 일상생활에서 그 내용을 짐작할 뿐이다. 가령 “方丈에서 오직 三衣와 一鉢로써 생활했다”든가,0125)≪東文選≫ 권 117, 碑銘 了世碑銘. “세상의 일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며 개경의 땅을 밟지도 않았고, 또 평소에 방석없이 좌정하면서 거처에는 등불도 밝히지 않았으며, 또한 형편이 닿는 대로 경전의 疏要를 찬술하여 대중에게 반포한다든가, 시주들이 가져온 보시를 빈궁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라고0126)≪東文選≫ 권 27, 制誥 官誥(閔仁鈞). 한 표현에서 결사를 이끌어 간 수행인으로서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요세가 입적할 때 불렀다는 元曉의 「澄(證)性歌」는 사상적으로 어떠한 맥락이 닿는지 검토하기로 하자.<요세비명>에는 징성가라 하여 4구가 소개되어 있으나 그 완형이 현전하지 않아 그 실제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지눌의≪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1권)에 ‘彌陀證性偈’라는 이름으로 8구가 남아 있어 이와 관련시켜 그 내용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징성가와 미타증성게가 비록 그 명칭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원효가 찬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징성가의 사상적 배경은≪無量壽經≫에서 찾을 수 있는데,≪무량수경≫은 淨土三部經의 하나로 상권에서는 법장보살의 서원과 수행을, 하권에서는 정토왕생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미타정토를 강조하는 원효의 저술이 지눌의 저술에 인용되었다든가, 특히 요세가 이를 입적하기 며칠 전부터 입적할 때까지 매일 앉거나 눕거나 거듭거듭 노래하면서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신앙결사에 원효의 淨土往生思想이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한편 요세는 선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던 인물인데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요세가 공산 회불갑에서 수행하던 지눌의 간곡한 권유를 받고 곧 그를 찾아가 定慧雙修의 실지를 체험한 사실과 요세의 제자인 天因이 慧諶에게서 曹溪要領을 체득했다는 사실로0127)≪東文選≫ 권 83, 序 萬德山白蓮社靜明國師詩集序(林桂一). 미루어 그 내용은 분명히 수선사의 독특한 禪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그렇다고 백련사계통의 선관이 수선사의 그것과 동일한 내용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요세가 밝힌 선에 대한 견해는 “枯木과 같이 앉아 있는 것을 선이라 하며, 空·假·中觀의 3觀을 질곡으로 보고 窮號를 지혜로 삼아 계율을 지키기를 粃糠과 같이 여기는 폐단을 지적한”0128)≪東文選≫ 권 27, 制誥 官誥(閔仁鈞). 점에서 잘 나타난다. 이는 바로 수선에 대한 그의 이해가 천태지관에 바탕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또한 선만을 고집하는 南宗禪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세의 면모는 마음(心)에서 정토를 찾으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요세가 임종할 때 그의 제자 천인과의 문답에서 “定에 들어 있는 마음이 바로 정토이며 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항상 드러나 있는 그대로가 정토”라고0129)≪東文選≫ 권 117, 碑銘 了世碑銘.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요세는 선의 궁극적 지향을 정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요세의 불교관을 중심으로 백련사와 보현도량에서 표방하던 불교관을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백련사를 개창한 요세의 불교관은 법화사상에서 찾을 수 있으며, 대체로 보현도량의 개창을 기준하여 이전에는 지눌을 통해 수선사가 표방하던 선사상에도 관심을 가진 바 있었으나 이후에는 정토관이 강조된 특징이 있다. 특히 요세는 그의 불교관의 이론적 배경을 지자에게서 찾았으며, 신앙면에서는 지례의 염불결사를 중심한 송대 초의 신앙결사를 본뜨고 한편으로는 원효의 정토왕생사상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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