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4) 백련사의 성립과 전개
  • (2) 백련사 결사의 사회적 기반

(2) 백련사 결사의 사회적 기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련결사는 기존의 불교계에 대해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면서 등장한 신앙운동이다. 이를 주도하고 지원한 사회계층의 전모를 규명하기는 어려우나 전반적인 흐름은 파악할 수 있다. 현존하는 자료를 검토하여 보면 백련사를 결성한 사회계층은 요세를 위시하여 그의 문도들의 경우 지방의 토호이거나 독서층0130) 독서층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인 개념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크게 보아 지배계층의 범주에 드는 신분층으로서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에 의해 入仕를 하지 아니한 계층과 입사 이전의 예비관료군을 의미하는 선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련사와 관련된 인물들은 대체로 보현도량을 개창한 전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는 지방토호와 독서층 및 지방수령, 후자는 최씨집정자와 이들과 밀착된 관료들로 대별된다.

 우선 백련결사를 경제적으로 지원한 檀越들에 대해 살펴보고 백련결사를 주도한 승려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백련사가 지금의 강진에서 개창할 때 이를 지원한 단월들은 이 지역의 지방토호인 최표·최홍·이인천 등인데, 이들은 요세에게 월출산 약사암에서 만덕산으로 옮기도록 청하여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성하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특히 최씨가는 탐진을 배경으로 한 지방토호층으로 추측된다. 또 최표에 대해서는 원의 制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參知政事에까지 이르렀다고 한 기록이 있으나,0131)≪東國輿地勝覽≫ 권 37, 康津郡 人物 高麗. 백련사 개창연대가 고종 3년(1216)으로 몽고침입 이전인 점으로 미루어 원의 제과에 급제했다는 기록은 재고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어떻든 백련사는 탐진의 최씨가를 중심으로 한 단월들의 지원에 힘입어 개창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백련사를 개창할 때 강진을 중심으로 한 가까운 지방수령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가령 帶方太守인 卜章漢이 남원관내에 제2의 백련사를 개창토록 주선한다든가, 崔璘의 경우 나주목사로 부임하면서 나주의 雲谷寺에서 요세를 夏安居하도록 청한 사례는0132) 了圓,≪法華靈驗傳≫ 권 하, 堪歌崔牧伯之慶會. 좋은 예가 된다. 또 요세와 교류가 깊었던 趙文拔의 경우도 요세가 개경 땅을 밟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강진 부근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깊은 유대를 맺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은 보현도량의 개창을 계기로 하여 연결된 집단은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지 살펴보자.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보현도량이 개설된 시기가 최씨정권에 의해 강화도 천도가 단행된 고종 19년이라는 점과, 고종 24년 여름에 고종이 75세의 고령인 요세에게 그렇게 높은 승계는 아니지만 禪師의 직함과 함께 歲饌을 내린 조처 등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추측컨대 보현도량의 설치는 분명히 몽고침입에 대한 백련사측의 대응조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최씨정권이 백련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닌가 한다. 물론 이는 당시 수선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최씨정권과 백련사의 유대를 알려주는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강종의 서녀이며 최충헌의 부인인 靜和宅主는 요세가 백련사를 개창했다는 소문을 듣고 백련사에다 無量壽佛을 조성하여 主殿에 봉안케 하고 또 金字蓮經을 베껴 쓰게 하였다.0133) 了圓,≪法華靈驗傳≫ 권 상, 天帝邀經而入藏. 또한 고종 27년 8월에는 戒環解의≪妙法蓮華經≫을 보현도량에서 채택하여 조판토록 하고 崔怡(瑀)가 직접 발문을 쓴다든가,0134) 趙明基 소장본으로 남아 있는≪妙法蓮華經≫ 跋文(≪高麗佛書展觀目錄≫, 東國大 出版部, 1963) 참조. 특히 요세가 입적한 후 천인이 백련사 제2세로 주법하면서 강화도정부에 올린 疏에서0135)≪東文選≫ 권 111, 疏 初入院祝令壽齋疏文(天因). 최이를 축원하고 있는 점은 보현도량과 최씨정권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최씨정권 아래에서 무인으로 활약하다가 뒤에 몽고와 강화할 때 주로 李藏用과 함께 활약한 인물인 李世材의 경우 고종 23년 백련사에 입사하고≪법화경≫1,000여 부를 조판하여 널리 유포하기도0136) 天頙,≪湖山錄≫ 권 하, 答靈岩守金郞中㥠書. 하였다.

 이와 같이 고종 17년 이후에 백련사의 단월들의 출신 성격이 변한 것은 어떤 역사적 계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계기는 고종 19년 4월 8일에 백련사에서 「普賢道場」을 설치한다든가, 그 후 고종 23년에는 요세가 그의 제자인 천책으로 하여금<백련결사문>을 짓게 하여 반포하는 등의 일련의 조처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조처는 1230년대 초의 몽고군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며, 단순히 신앙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현도량을 설치한 해는 몽고군의 침입이 시작된 다음해이며, 또 강화도 천도가 활발하게 논의된 시기라는 점, 그리고 현전하지는 않지만<백련결사문>이 반포된 해에 대장경의 조판이 논의되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몽고의 침입에 대하여 백련사가 강력한 항전의 의지를 표방한 것은 아닌가 한다. 특히<백련결사문>은 대장경 조판을 착수할 때 반포된 李奎報의<大藏刻板君臣祈告文>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과 같이 法華敎觀에 바탕하여 참회행과 미타정토신앙을 실천방향으로 강조한 요세의 불교사상은 13세기 전후의 혼란상에 처해 있던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것일 뿐 아니라 정토신앙이 민중 속에 깊이 정착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 희종 6년(1210)부터 고종 7년(1220) 사이에는 주로 강진의 토호세력, 부근 지방관들의 지원에 힘입어 백련사를 결성할 수 있었으며, 그 뒤 1230∼1240년대의 대몽항전기에는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 대처하여 강력한 대몽항전 의지를 표방하자, 집권자인 최이와 밀착된 중앙관직자, 그리고 많은 문신관료층이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수선사와는 달리 백련사와 최씨정권이 관련되는 자료가 1230년대 이후에 집중되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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