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5) 원의 정치간섭과 불교
  • (1) 고려와 원과의 관계

(1) 고려와 원과의 관계

 13세기에 들어와 고려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대외적 요인은 동아시아에 유목민족인 몽고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함으로써 그에 따른 고려와 몽고간의 약 30여 년에 걸친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종래 고려·송·금을 중심축으로 비교적 안정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유지하였던 체제를 무너뜨린 몽고족이 힘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야기된 것이었다.

 희종 2년(1206) 칭기즈칸[成吉思汗]은 몽고족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원을 건국한 뒤 점차 세력을 강화하여 동서의 주변국가를 차례로 정복하였다. 동아시아에 대한 원의 정복전쟁은 희종 7년 금에 대한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몽고에 쫓기던 거란족은 고종 3년(1216) 고려에 침입하였다가, 고종 6년에 고려와 몽고·東眞國의 연합군에 의해 江東城에서 소탕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려와 몽고는 형제맹약을 맺는 등 최초의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0162) 高柄翊,<蒙古·高麗의 兄弟盟約의 性格>(≪白山學報≫ 6, 1969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 出版部, 1970). 이후 몽고는 고려에 지배층 자제의 入質, 호구조사의 보고, 몽고군 원정 때의 助軍, 원에 대한 식량·租賦의 수납, 다루가치[達魯花赤] 주재, 驛站설치, (혹은 군왕의 친조) 등 이른바 六事를 중심으로0163) 高柄翊, 위의 책, 178∼183쪽. 고려에 과도한 요구를 해왔고 고려로서는 이에 쉽게 응할 리가 없었다.

 고종 12년 몽고사신 著古與의 피살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원과의 관계는 긴장관계로 접어들었으며, 이후 고종 18년 제1차 침입을 시발로 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6차에 걸친 30여 년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우정권은 고종 19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전국 각지의 농민들에게 산성과 해도에 入保케 하여 항몽태세를 수립하였다. 강화가 맺어지기까지 몽고는 여러 차례 고려를 침입하였으나 농민을 주축으로 한 대몽항전은 전국 각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최씨정권이 붕괴되면서 고종 46년 태자의 입조와 개경환도를 조건으로 원과 강화를 맺게 되었다. 이러한 강화는, 고려 내부의 사정으로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결집된 문신세력의 의도와 몽고의 이민족 지배방식이 유목봉건제적 체질을 청산하고 황제의 일원적 지배체제로 크게 전환된 점이0164) 주채혁,<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애산학보≫ 8, 1989)에는 전쟁의 종식을 유목계인 本地派에서 農耕系 漢地派로 권력구조가 바뀐 몽고 내부의 사정을 언급하고 있다. 서로 합치점을 이룬 산물이었다. 더욱이 고려와 몽고의 전쟁이 마무리되던 고종 47년 쿠빌라이(세조)의 즉위를 계기로 원의 이민족 지배방식은 전환되어 해당지역의 풍속과 제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간접적인 통치방식으로 바뀌었다. 원 세조가 고려의 문물제도에 대하여 ‘土風은 고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0165) 박종기,<고려시대의 대외관계>(≪한국사≫ 6, 한길사, 1994), 244∼245쪽.

 이후 강화를 둘러싼 국내정치세력간의 알력과 반목 등으로 강화조건이 지연되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원종 11년(1270) 개경환도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반발한 三別抄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가 남부 해안지역 일대를 지배하에 넣었다. 당시 남도 연안의 각 지방이 급속도로 삼별초에 호응한 것은 이전부터 이 지역이 가혹한 수탈지역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데 일차적 요인이 있었다. 또 삼별초군으로서는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물자보급 및 일본·남송으로 연결되는 해상거점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삼별초가 원종 12년 고려와 몽고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金通精의 지휘하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다가 원종 14년에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당시 삼별초군은 중앙으로 가는 漕船을 붙잡아 歲米와 공물을 탈취하고 남부 연안지역을 점령하여 몽고군과 대결하였으며 한때 일본과 연합을 시도하여 외교문서를 보내기도0166) 柳永哲,<‘高麗牒狀不審條條’의 재검토>(≪한국중세사연구≫ 창간호, 한국중세사연구회, 1994). 하였으나 몽고군과 정부군의 합동공격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대몽항쟁이 종식되면서 고려는 몽고의 간섭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일본정벌에 동원되기도 하였다(1274·1281년).

 어떻든 양국간 전쟁의 종결은 새로이 등장한 고려의 지배층이 원과의 정치적인 의존관계를 긴밀하게 하면서 이후 정치구조의 왜곡과 파행현상을 초래하는 등 민족모순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고려와 원과의 관계는 농민항쟁기 이래 제기된 고려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0167) 박종기, 앞의 글, 245∼248쪽. 이러한 이중적 모순은 대몽항전 이래의 과제로 남겨둔 채, 일부 지배계층은 그들의 이익만을 온존시키는 방향에서 원의 간섭하에 재편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원의 정치간섭과 영향력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원 세조의 간접적인 이민족 지배방식은 고려에도 적용되었는데, 예컨대 고려 국왕의 親朝와 원 공주와의 혼인, 征東行省의 설치, 관제의 개편 등은 그러한 지배방식의 산물이었다. 이 가운데 고려와 원의 관계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실은 정동행성의 설치다.0168) 征東行省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高柄翊,<麗代 征東行省의 硏究>(앞의 책).
張東翼,<征東行省의 置廢와 그 運營 實態>(≪高麗後期外交史硏究≫, 一潮閣, 1994).
본래 원의 행성(行中書省 혹은 行尙書省)은 중서성의 출장소격인 지방행정기구이지만, 정동행성은 충렬왕 6년(1280) 원이 고려와 연합하여 일본을 원정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전방사령부로서 임시적 군사기구였다. 충렬왕 13년 이후 정동행성은 군사적 성격에서 고려 내정을 간섭·통제하기 위한 지배기구의 성격으로 바뀌었다.0169) 張東翼, 위의 책, 49∼52쪽. 행성은 관리의 치폐를 거듭하면서 통제를 강화하기도 하고 이에 고려정부는 자구책을 강구하여 반발하기도 했지만, 이 기구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시도되기까지 존속되었다.

 이러한 정동행성을 중심으로 한 원의 고려지배는 정치적 개편을 위주로 한 것으로 주로 국왕과 그 측근세력 등의 지배층을 통한 것이었다. 14세기에 거듭되는 왕위의 重祚, 瀋陽王과 고려왕의 분리·이간책 등 지배층 내부의 복잡다단한 이합집산 현상은 바로 그러한 지배방식의 산물이었다. 특히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 정동행성에 대신하여 원의 內地 행성같은 것을 두어 고려를 통치하자는 이른바 여러 차례의 立省論議(충선왕 원년 ; 1308, 충숙왕 10년 ; 1323, 충혜왕 즉위년 ; 1330, 충혜왕 후4년 ; 1343)는 以夷制夷策을 이용한 원의 복속정책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어떻든 고려는 원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들은 정치체제와 관제의 개편, 왕위계승에 대한 개입 등, 고려의 지배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간여하여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을 뿐 고려사회 전체를 해체시킬 정도의 지배는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고려의 지배층은 사회 내부의 이중적 모순을 담보한 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원의 간섭 아래 온존하였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