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5) 원의 정치간섭과 불교
  • (2) 불교계의 동향

(2) 불교계의 동향

 앞에서 13세기에 접어든 이후 고려와 몽고와의 국제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시기에 불교계는 새로운 경향의 신앙결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원에 복속되어 가면서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편은 원의 간섭이라는 현실에 안주하던 지배층의 이익을 반영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불교계는 대체로 원의 간섭이라는 현실 속에 타협하고 온존하려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 신앙결사를 계승하면서 당시의 보수적 성격을 비판하는 경향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0170) 蔡尙植,≪高麗後期佛敎史硏究≫(一潮閣, 1991), 232∼233쪽.

 그렇지만 양자의 경향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점은 신앙적 측면이 강조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더욱이 원의 영향에 의해 신비적이면서 말폐적 성격을 띤 점이라든가, 화려하면서도 사치한 귀족적 신앙형태, 사원을 願堂化함으로써 사회경제적 모순을 더욱 배가시켜 나가는 경향 등은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서서히 퇴조하고 있는 모습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먼저 전자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수선사의 계승을 표방하며 부각된 迦智山門, 백련사의 성격을 변질시키면서 그 계승을 표방한 妙蓮寺계통, 또 주로 원에 寫經僧을 파견함으로써 부각된 法相宗(瑜伽業)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최씨집정기에 수선사·백련사계통의 인물들이 대부분 국사·왕사로 책봉 또는 추증된 것에 비해 충렬왕대 이후는 대체로 가지산문·묘련사·법상종 출신들이 국사·왕사로 책봉된 사실과 관련된다.0171) 許興植,<高麗時代의 國師·王師制度와 그 機能>(≪歷史學報≫ 67, 1975 ;≪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무신란 이후 최씨집정기까지 거의 미미한 존재였던 가지산문이 원의 간섭기로 접어들면서 수선사를 대신하여 불교계의 중심교단으로 부각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0172) 一然과 迦智山門에 관련되는 내용은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蔡尙植,<一然의 생애와 檀越의 성격>(앞의 책, 1991).
이는 정치적으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몽고와의 강화가 일단 맺어지는 고종 말부터 원종연간의 과도기에 불교계의 중추적 인물로 부각된 一然(1206∼1289)과 관련된다. 이는 고종 45년 왕정복고에 참여하여 衛社功臣이 된 朴松庇(?∼1278)가 일연의 대표적 단월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이 때 일연이 지눌의 법맥을 계승했다고 표방할 정도로 그 내부에 마련된 사상적 기반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송비의 정치적 배려에 힘입어 일연계통이 속한 가지산문이 부각되고, 뒤에 충렬왕대에 이르면 일연이 國尊에 봉해질 정도로 가지산문은 이 시기의 중추적인 교단으로 급성장하였다.

 이와 같이 부각된 가지산문은 원 간섭기에 보수세력의 지원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일시적으로는 천태종의 묘련사계통과 교권장악을 위해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고려 말에는 太古普愚가 출현하여 중국으로부터 臨濟宗을 수입하기도 하고 한때 불교계의 통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0173) 崔柄憲,<太古普愚의 佛敎史的 位置>(≪韓國文化≫7, 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86). 어떻든 불교계의 중추세력이 당시의 정치·사회구조 속에서 대두한 보수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것은 고려사회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일연의 사상적 경향은0174) 蔡尙植,<一然의 사상적 경향>(앞의 책, 1991). 수선사가 표방하던 看話禪에 입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曹洞五位≫를 중편한다든가(고종 43년 ; 1256), 또 당시 선종계통에서 널리 읽히고 있던 戒環이 要解한≪楞嚴經≫에 대해 普幻이 그 미비점을 보완한 것을 교감해 준다든가(충렬왕 5년 ; 1279), 또한 선종계통의 저술인≪人天寶鑑≫을 간행토록 하는(충렬왕 15년) 등의 행적과 운문종의 善卿이 찬한 것으로써 선에 대한 일종의 사전이라 할 수 있는≪祖庭事苑≫을 편수한 예를 보면, 일연은 당시 풍미했던 간화선을 기본으로 하고 다른 계통의 선사상까지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탄력성을 지닌 인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선사상을 기본으로 하면서 일연은 교학과 유학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일연은 몽고와 강화를 맺은 이후에는 현실적 구원사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사상적 전환을 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실천적·현세적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이민족의 침략으로 가장 많은 피해와 고통을 받았던 민중들로 하여금 구원과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한 신앙적 노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실천적·현실적 신앙의 표방은 결국≪三國遺事≫의 찬술과도 연결되는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曹洞禪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초기의 성리학적 분위기를 불교계의 내적 바탕을 토대로 하여 더욱 심도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특히 仁興社에 주석한 이후 현실구원을 강조하는 신앙을 강조한 경향은 당시의 시대적 산물이지만 결국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서서히 퇴조해 가는 단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충렬왕 9년에 왕과 齊國大長公主의 원찰인 묘련사가 건립되었다. 충렬왕 이후 권문귀족 등에 의해 건립된 원찰이 급증한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볼 때,0175) 秦星圭,<高麗後期 願刹에 대하여>(≪歷史敎育≫ 36, 1984). 묘련사는 비록 왕실이 건립의 주체였다고 하지만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라기보다 개인의 기복을 위해서 건립된 귀족불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묘련사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백련사 출신의 승려라는 점에서 백련사 결사의 해체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은 景宜와 丁午·義璇으로 연결되는데 경의와 정오는 본래 백련사 출신으로서 충렬왕의 부름에 의해 묘련사에 등장하기 이전까지 백련사계통에서 활약하였다. 충렬왕 10년경에 경의가 묘련사의 1세 주법으로 등장하고, 그 이후 18년이 지나 정오가 묘련사의 주법으로 가게 됨에 따라 백련사계통의 승려들이 묘련사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당연한 추이였다. 또한 이들은 왕실의 원찰인 묘련사에 초청된 이후에 당시 교권의 중심이었던 國淸寺·瑩原寺 등을 중심으로 왕실의 지원 아래 화려한 승계를 가지면서 교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사상적 경향도 法華敎說과 天台疏만을 중시하여, 주로 일반대중에게 기반을 두고 法華三昧懺과 淨土求生을 추구하던 백련사의 신앙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원 간섭기의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부각된 趙仁規가문에서 무려 4대에 걸쳐 의선을 비롯한 4명의 천태종 승려가 출현하여 묘련사를 장악하였다.0176) 閔賢九,<趙仁規와 그의 家門(中)>(≪震檀學報≫ 43, 1977). 특히 의선은 조인규의 아들로서 그의 부가 원 황실과 가진 유대를 배경으로 하여 원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원의 황제로부터「三藏法師」의 賜號를 받기도 하고 원의 수도인 연경의 大天源延聖寺와 大報恩光敎寺의 주지직을 맡기도 하였는데, 이는 승려로서 그의 정치적 역량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대천원연성사가 라마교의 대찰이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여기서 주석하면서 고려 천태종과 라마교가 접촉한 계기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승려인 의선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귀족과 같은 존재였고, 그렇기 때문에 四恩을 언급하면서 國王·師長·父母의 은혜만 말하고 시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0177) 李 穀,≪稼亭先生文集≫ 권 4, 記 虛淨堂記. 것은 그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조씨가에서 묘련사뿐만 아니라 차츰 경기 일원의 萬義寺·淸溪寺 등의 원찰까지도 확보하여 경제력을 축적하고 나아가 천태종 교권을 장악하였다는 사실은 원 간섭기의 정치·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유가업 즉 법상종은 무신란 이전에는 현종의 원찰인 玄化寺가 개창된 이후 화엄종과 함께 양대세력이었으며, 특히 仁州 李氏와 연결되어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뒤 최씨집정기에는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가 원 간섭기에는 당시 널리 성행한 사경을0178) 13세기 불교신앙의 한 형태로서 寫經이 널리 유행하였는데 원에 사경기술을 전수해 줄 정도였다. 그러나 호화로운 사경의 유행은 국가재정의 궁핍과 신앙의 세속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사경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책이 참고된다.
權喜耕,≪高麗寫經의 硏究≫(미진사, 1986).
박상국,≪사경≫(대원사, 1990).
주로 담당함으로써 충렬왕이 현화사를 중수할 정도로 크게 부각된 교단이다. 당시 惠永이 출현하여 충렬왕 16년에 사경승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원에 들어가 金字法華經을 베꼈는데, 이를 계기로 차츰 부원세력과 밀착되었으며 그 뒤 彌授의 단계에 이르면 충렬왕 34년에는 五敎都僧統, 충숙왕 즉위년에는 兩街都僧統으로 祐世君에 봉군되고 따로 일품의 녹봉을 받게 되었으며, 충숙왕 2년에는 懺悔府가 설치되자 승정을 장악하고 五敎兩宗의 교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원 간섭기로 재편됨에 따라 보수적 경향의 세력에 의해 불교계가 장악되고 있을 때, 이들과는 달리 불교계의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일련의 인물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서 백련사의 사상적 경향을 계승한 雲黙無寄를 들 수 있다. 운묵은 14세기 초반에 활약한 것으로만 알려졌을 뿐 그의 뚜렷한 행적은 알 길이 없으나, 단지 그가 남긴≪釋迦如來行蹟頌≫을 통해서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뿐이다.0179) 蔡尙植,<無寄와 釋迦如來行蹟頌>(앞의 책, 1991). 운묵은 이 저술에서 당시 사회를 末法時代로 인식하고서, 원 간섭기의 참담한 현실 속에 처해 있던 대다수의 민중에게 염불을 통한 공덕을 강조함으로써 실천신앙으로서의 정토신앙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원당이라는 명목하에 권문세족들과 정치적·경제적으로 결탁하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모순과 보수적 경향을 비판하고 이들의 민중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였다. 특히 그가 승려로서 시주의 은혜를 강조한 것은 이같은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수적인 불교계를 비판한 세력들의 노력은 참담한 현실 속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민중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름의 한계성이 없지 않았다. 이들이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모순을 철학면(세계관)의 본질적 측면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못하고 불교의 사회적 기능 중 실천신앙적인 측면과 공덕신앙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한계성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측면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여러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과 그 추진세력의 결집이 불교계 자체에서 구축되기는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불교계의 일반적 현상이었으며, 특히 화엄종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더욱이 신앙형태도 차츰 신비적 영험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화엄종 승려인 體元의 경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0180) 蔡尙植,<體元의 저술과 사상적 경향>(위의 책, 1991). 특히 체원이 간행을 주선하면서 스스로 발문을 지은 일종의 僞經인≪三十八分功德疏經≫의 성격을 검토하면 당시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경향은 천태종계통의 了圓이 찬술한≪法華靈驗傳≫이라든가, 또 당시 왕실과 권문세족들에 의해 제작된 많은 수의 사경과 불화류, 심지어 미륵하생신앙에 바탕한 埋香信仰이 해안이나 도서지역에서 유행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밀교계통으로서 신비적 성격이 강한 원의 라마불교의 말폐적 영향에 의해 더욱 상승되었음을 배제할 수 없으나, 바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원 간섭기의 불교사를 보수적 경향과 이를 비판하는 세력으로 대별해 보았다. 그렇지만 원의 간섭이라는 현실 속에서 불교계의 핵심적 교단세력은 보수적 경향으로 일관하였고, 단지 이에 대응하여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각에서 시도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향까지도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신앙적 측면만을 강조한 결과, 사회사상으로서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서 13세기 전후의 신앙결사 단계에 이룩하였던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까지 손을 대는 등의 사회경제적 모순까지도 가지고 있던 당시의 불교계가 사회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 감에 따라 신앙결사의 단계에서 구축한 사회적 기반, 즉 소수의 문벌귀족으로부터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이 획득한 사상계의 주도권을 주자성리학이 대신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주자성리학이 고려 말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사회적·사상적 기반은 이미 무신란 이후의 불교계에 의해서 그 토양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말의 불교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성리학을 기치로 내세운 신진사대부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 위치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蔡尙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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