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6) 임제종의 수입과 불교계의 동향
  • (1) 임제종 수입과 그 배경

가. 사상적 배경

 臨濟宗이 도입되던 고려 말, 특히 공민왕대의 시대적 배경은 크게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 격동기였다는 사회적 측면이고, 둘째는 禪宗을 비롯한 불교계의 타락이 노골화되는 사상적 측면이다.

 이 중에서 특히 후자의 관점에서 촛점을 맞추어 임제선 도입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사회는 지나친 숭불의 영향으로 八關會·飯僧 등 각종 佛事가 빈번하게 열렸다. 거의 모든 불사는 祈福的 행사였으며, 공민왕 때 이르러 그 사회적 폐해가 극도에 이르렀다.

 공민왕 4년(1355) 禪近은 內願堂 승려의 신분으로 간통죄를 범하였으므로 그를 치죄하려 하였으나, 왕은 그를 석방하였다. 또 慈恩宗의 英旭은 그의 邪婬罪를 다스리려 할 때, 만약 나를 죄주고자 하면 모름지기 宗門을 파해야 할 것이며, 오늘날 종문의 승려들이 나와 같지 않은 이가 누가 있는가라고 항변하였다.0181)≪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4년 6월 을축.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승단의 기강이 얼마나 문란했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불교계에 대한 비판도 주로 이와 같은 승단의 타락과 불교의 사회적 폐해에 대한 공격으로 집약되고 있다. 고려 말의 李齊賢·李穡·鄭夢周·李崇仁·鄭道傳 등에 의해서 체계를 굳힌 性理學은 노골적으로 불교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적 근거는 바로 불교교단의 타락상에 국한된 것이었고, 불교의 교리 자체를 문제삼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신앙으로서 불교를 택했던 유학자 이색의 다음과 같은 상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五敎兩宗은 모두가 이익집단이며, 사원은 없는 곳이 없고, 비루하지 않은 승려는 찾아볼 수가 없으므로 승려에게는 度牒을 주고, 도첩이 없는 자는 군사로 충원하며, 새로 지은 사원은 철거하고 만약 철거하지 않는 자는 죄를 주어 승려가 더 늘지 않도록 하자(≪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이러한 상소가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5교양종 모두가 불교의 본분을 잃고 이익추구에만 몰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 공민왕의 신불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太古普愚는 강설을 통해서 공민왕의 잘못된 신앙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의 도리는 덕을 닦아 사람을 교화하는데 있으며 반드시 信佛은 필요치 않습니다.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으면 아무리 부처를 부지런히 섬긴들 무슨 공덕이 있으리오…군왕이 邪를 버리고 正을 쓴다면 나라를 다스리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5월 기축).

 이러한 태고의 강설은 공민왕이 바른 불교신앙을 하지 못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신앙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이 시기는 원과 명이 교체하던 시기로서 외교정책은 불확실하였고, 국내적으로도 辛旽 이후에 야기된 불신풍조가 만연하였다. 당시 유학은 이미 수용단계를 벗어나 종교는 불교, 학문과 치세는 유교라는 절충적 태도를 거쳐 고도의 형이상학적 교리체계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특히 송대의 유학이 배불사상을 배경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그 풍조가 고려사회에도 미쳐 봉불의 폐단이나 승도의 타락이 그들 유학자의 공격대상이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0182) 李鍾益,<鄭道傳의 闢佛論 批判>(≪佛敎學報≫8, 1971 ;≪東方思想論叢≫, 1975, 寶蓮閣, 308∼310쪽).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불교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무너진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고 청정승단을 이룩하려는 내면적 노력이며, 둘째는 새로운 禪法의 도입을 통한 禪風의 혁신이라는 측면이다.

 전자의 실례로서는 고려 중·후반기에 일어난 각종 신행결사를 들 수 있을 것이며, 후자의 대응으로서는 임제선의 새로운 도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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