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6) 임제종의 수입과 불교계의 동향
  • (2) 임제선풍의 전개

가. 보우의 선풍과 현실참여

 태고보우는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충목왕 4년에 귀국하였다. 유학중에는 임제종의 18대 석옥청공에게서 心契를 얻었다. 그는 왕사와 국사로 책봉되기도 했으며, 불법홍포와 국가정책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상적 특색과 활동은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으니, 첫째는 看話禪의 새로운 체계수립이요, 둘째는 선·교의 통합과 교단쇄신운동의 전개이다.

 보우의 선사상에서 나타나는 전반적 흐름은 간화선의 주창이며, 특히「無字公案」에 의한 후학지도가 두드러지고「空寂靈知」의 선사상을 주장했다. 이「공적영지」는 일찍이 지눌이 원용한 荷澤神會의「空寂知」와 일치하나 그 관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지눌이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本來面目)은 공정한 것이지만 그 속에는 신령스러운 인지작용이 있으니, 이것을 頓悟하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보우는 이「공적영지」를 돈오하라는 것이 아니라, 간화선을 수행함에 있어서 공적영지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0184) 普愚,<答方山居士>(≪太古和尙語錄≫권 상;≪韓國佛敎全書≫6, 東國大 出版部, 1984, 678쪽). 공적영지의 상태란 공적한 가운데서 반드시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간화선의 강조이다. 실제로 지눌의 선사상에는 간화가 강조되고 있지 않다.「無字話頭」의 경우에도 지눌과 혜심은 有無의 無와 眞無의 無가 아니므로 잘 채택해야 한다고 十種病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보우는 “有無의 無와 眞無의 無가 아니면, 결국은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형식으로 공안참구의 방법을 변형시켰다. 이것은 간화의 본래 의미인 의문을 가중시키는 방법으로 이끈 것이다. 이러한 보우의 선사상은 같은 간화선의 주장이라 하더라도 발전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0185) 權奇悰,≪高麗後期의 禪思想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86), 169∼171쪽.

 그는 선교의 통합과 현실참여적인 교단쇄신운동을 펴나갔다. 그는 공민왕의 불교신앙이 지나치다고 간하는가 하면, 신돈의 그릇된 정사에 대하여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0186) 維昌,<太古行狀>(≪太古和尙語錄≫권 상;≪韓國佛敎全書≫6, 699쪽).

 우선 그의 교단내의 선·교의 대립을 지양하려는 실천적 사상을 살펴보자. 그는 임제선으로 당시 九山禪門을 통일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9산선문의 분열과 대립은 불교내의 문제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국가적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었다. 이같은 분열을 통일코자 하는 건의가 받아들여져 공민왕 5년(1356)에 圓融府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원융부의 설치에 즈음하여 보우는 9산이 여러 종파로 나뉘어 대립과 투쟁을 일삼는다면 어떻게 석가세존의 平等無我의 도리에 맞는다 하겠는가라고 문제점을 지적했을 뿐 아니라 선왕들이 불법을 보호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려는 뜻에 충실하다 하겠는가라며 개탄했다.0187) 維昌,<太古行狀>(≪太古和尙語錄≫권 상;≪韓國佛敎全書≫6, 698쪽). 그러므로 선·교의 일치는 물론 선에 있어서도 9산의 대립과 상쟁을 종식시켜 조화와 원융을 도모코자 한 것이 원융부 설치의 취지였다.

 외적인 9산통합과 함께 교단의 문란한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百丈의≪禪苑淸規≫로써 일상의 威儀를 엄정케 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이리하여 왕명에 의하여≪백장청규≫가 간행되었으며,≪緇門警行≫도 간행되었다. 이≪선원청규≫나≪치문경행≫은 승가의 규율과 행의의 규범을 가르친 책으로 이 두 책 모두가 임제종에 속한 문헌들이다.0188) 高翊晉,<高麗佛敎思想의 護國的 展開>(≪佛敎學報≫14, 1977), 55쪽.

 보우는 왕사로 16년, 국사로 12년을 봉직하면서 국정의 여러 문제들을 자문하였는데 특히 공민왕 5년에는 漢陽遷都를 주장하였다. 당시의 개경은 李資謙의 亂, 武臣의 亂 등을 여러 차례 겪는 동안 인심이 흉흉하였다. 또 원의 지배가 계속되면서 사회적으로도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으므로 이같은 시대상황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왕도의 지세나 인심을 감안할 때 한양으로 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천도설의 주장은 음양비보설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 목적은 민심의 순화와 정치의 혁신이라는 우국심에서 비롯되었다. 더 나아가 보우는 신돈을 邪僧이라고 비판하게 되었고 그에게 정사를 맡기지 말도록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민왕은 오히려 보우를 속리산으로 유배보냈다. 그 후 결국 신돈은 유배 도중 죽임을 당하게 되고, 공민왕은 보우를 찾아 예를 갖추고 국사로 맞았다.

 이같은 보우의 임제선 도입과 선양은 고려 말의 타락한 불교와 국가의 정치를 쇄신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렇지만 큰 결실은 거두지 못했으며 공민왕은 살해되고 유학자들의 거센 배불론에 불교도 침체를 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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