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7) 대장도감과 고려대장경판
  • (4) 대장경판의 해인사 전래와 유통

가. 해인사에의 전래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판은 판각이 완료된 후 고종 38년부터 강화성 서문 밖에 있던 대장경판당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그 후 언제 어떤 경로로 해인사로 전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많이 있는데, 대체로 고려 말기, 조선 태조의 印經跋文과 관련한 태조 원년설, 태조 6년(정축년)설, 조선 초기설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 말 移安說은 李崇仁(1349∼1392)의<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와<睡庵長老印藏經于海印寺獻呈詩>에 근거를 두고 있다. 먼저 신륵사대장각기를 보면 李穡이 망부 李穀의 뜻에 따라 懶翁(1320∼1376)의 제자 도움으로 우왕 7년(1381)에 대장경을 인출하여 신륵사에 봉안하였다는 내용인데, 어디서 인출한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같은 이숭인의 시의 제목에는 수암장로가 해인사에서 장경을 인출했다는 것이므로 대장각기와 결부시켜 이 당시에 해인사에서 인출하여 신륵사에 봉안했다고 보는 것이다.0207) 高橋亨,<海印寺大藏經板について>(≪哲學雜誌≫ 327, 1914). 그런데 수암장로가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으며, 심지어 대장경 인출에 참여한 나옹의 제자들이 나오는 대장각기에조차 그 이름이 들어 있지 않다. 당시 해인사에는 고려 초기에 판각된 續藏·三本華嚴經 등 많은 경판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시에 보이는 장경이란 말은 이들 경판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장경을 고려대장경이라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조선 태조의 인경발문은 태조 2년(洪武 26 ; 1393)에 발원하여 인경했다는 기록을 새긴 목판인데 현재도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 함께 발원한 사람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왕비·왕세자·대군 이하 96인을 열거하고 있다. 이 가운데 30인이 지방관료로 대부분 해인사 부근의 지방관료이며 해인사 주지가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때의 印經은 해인사에서 한 것이라는 것이다.0208) 朴泳洙,<高麗大藏經板의 硏究>(≪白性郁博士頌壽記念佛敎學論文集≫, 東國文化社, 1959), 436쪽. 그러나 이 발원문을 보면 전라·양광도의 안찰사와 경기좌도 朴子安이란 이름도 보이고 있어 특정지역을 알려주는 기록이 아니고 더구나 대장경판이 해인사에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정축년설은<釋華嚴敎分記圓通鈔>권 10의 10장에 “丁丑年出陸時 此閪失 與知識道元同願 開板入上 乙酉十月日 首座沖玄”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정축년을 조선 태조 6년으로 보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0209) 朴泳洙, 위의 글, 437쪽.

 대장경판을 강화에서 해인사로 옮긴 것은≪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① 태조 7년 5월 10일 임금이 龍山江에 행차하였다. 대장경판을 강화 선원사에서 운반하였다.

② 태조 7년 5월 11일 비가 내렸다.

③ 태조 7년 5월 12일 비가 내렸다. 隊長과 隊副 2,000명으로 대장경판을 支天寺로 운반하게 하였다. 檢校參贊門下府事 兪光祐에게 명하여 향로를 잡고 따라오게 하고 五敎兩宗의 승려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며,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임금이 西江에 행차하여 전라도에서 온 漕船을 시찰하였다.

④ 태조 7년 5월 13일 비가 내렸다.

⑤ 정종 원년(1399) 정월 9일 경상감사에게 해인사에서 印經僧을 공양하게 하였다.
太上王(태조)이 私財로 대장경을 인출하여 완성하고자 하여 東北面에 비축한 콩과 좁쌀 540석을 端州와 吉州의 창고에 납입하고 대신 해인사 근처 여러 고을의 쌀과 콩으로 교환하게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태조 7년 5월 10일에 대장경판의 운반이 시작되었고 연일 내리는 비로 인하여 항해를 계속할 수 없어 이틀 후에는 용산강 근처에 있는 지천사로 대장경판을 옮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인사에 운반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⑤의 기록에서는 정종 원년 정월에 대장경판을 찍고 있으므로 이미 해인사에 운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운반시기는 태조 7년 5월 13일 이후 비가 끝나자 바로였을 것이다. ③의 기록 가운데 태조가 5월 12일에 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기도록 하면서 운반에 따른 장엄한 의식을 거행하게 한 것과 서강에 행차하여 전라도에서 올라온 선박을 시찰하였다는 내용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록은 바로 대장경판 운송을 위해 사전에 주도면밀히 준비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화의 대장경판당에 있던 대장경판은 선원사를 거쳐 용산부두로 옮겨져 임금이 친견하고 전라도에서 가져온 배에 바꿔 싣고 바로 수송하려고 했다. 그러나 비 때문에 지천사에 잠시 대피했다가 날씨가 좋아지자 바로 전라도에서 올라온 선박을 이용하여 해로를 경유하여 해인사까지 운반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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