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2.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
  • 1) 신유학의 전래와 고려 사상계의 동향
  • (2) 고려 불교계의 변화와 새로운 유학사상

(2) 고려 불교계의 변화와 새로운 유학사상

 당과 5대의 시기 동안 일어난 禪宗과 士大夫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거치고 나서, 송대에 이르자 선승들은 이미 완전히 사대부화되었다. 이들은 명산대천을 유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과 친구가 되어 고아담백한 생활 속에 소탈한 풍류를 누렸다. 이와 함께 사대부들 사이에 禪悅의 기풍이 성행하였다. 예를 들면 북송의 楊億·張方平·周敦頤·張商英과 남송의 張九成·眞德秀 등은 모두 선종의 거사신도이거나 선종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학자들이다. 구양수 같은 사람도≪本論≫을 써서 불교와 노장을 반대하였지만, 여산 동림사의 조인선사와 한번 얘기를 나눈 후로는 숙연히 마음에 감복되어 날마다 斯文들과 교유하면서 호를 육일거사라 이름하기도 하였다. 전통적 유교문화를 굳게 지킨 북송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司馬光 역시≪해선게≫ 여섯 수를 써서 유교와 선의 같은 점을 지적하였으며, 당시 사대부사회의 영수로서 문단을 이끌었던 蘇軾은 일찍이≪단경을 읽고≫라는 글을 써서 慧能의≪六祖壇經≫의 삼신설에 대하여 해석과 보충을 하였다. 심지어 남송의 주희 또한 송대의 선승 大慧의≪語錄≫을 가장 즐겨 읽었으며, 또 “현재 선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가 그 깊은 곳에 가보지 못한 것 뿐이며, 그 깊은 곳에 도달하고 나면 반드시 선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였다.0245) 葛兆光,≪禪宗과 中國文化≫(東文選, 1991), 68∼69쪽. 이처럼 송대의 사대부들의 생활과 사상에 선불교의 기풍을 포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송대 선종의 흥기는 당시 사대부들에게 새로운 문화의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새로운 문화의 토양으로서의 선종사상을 흡수·소화함으로써 경력연간 이후에 일어났던 새로운 유학부흥운동인 신유학의 발흥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신유학의 형성과 전개에 병행하여, 그와의 교호작용 속에서 독자적인 자기발전을 보았던 고려 중기 새로운 유학부흥운동 또한 유학계 자체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교를 포함한 전대 사상의 기반 위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당시 최충이 매년 여름마다 歸法寺의 승방을 빌어서 夏課에 사용했다던지,0246)≪高麗史≫ 권 95, 列傳 8, 崔冲. 혹은 앞에서 지적했듯이≪논어신의≫의 저자인 김인존이 朴昇中 등과 더불어 음양지리 관계서적들을 산정하여≪海東祕錄≫을 편찬하고, 한편≪貞觀政要≫에다 주를 달았던 것,0247)≪高麗史≫ 권 96, 列傳 9, 金仁存. 그리고≪역해≫의 저자인 윤언이가 만년에 불법을 좋아하여 스스로 金剛居士라고 불렀다는 사실0248)≪高麗史≫ 권 96, 列傳 9, 尹瓘 附 彦頤. 등은, 고려 중기의 이러한 사상적 분위기를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북송대 및 고려 중기에 발흥하기 시작하였던 새로운 유학에의 모색이란 결국 전대 유·불·도 3교의 균형 발전의 소산일 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고려 중기 새로운 유학사상의 전개와 관련하여 당시 불교계에서 전개되었던 선종의 부흥과 看話禪의 전개 및 李資玄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居士佛敎의 유행이 주목된다. 고려 전기의 선종은 광종 대 전반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후반기에 화엄종이 부상하면서 법안종으로 유학한 계통의 선종만이 어느 정도 그 세력을 유지하였을 뿐이고, 선종계는 대체로 침체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였다. 특히 광종 이후 현종까지 두각을 나타냈던 법안종풍의 선승들이 새로이 형성되는 천태종에 흡수되었으므로 선종계로서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당시 義天이 천태종을 세울 때 선종 승려의 절반 이상이 천태종으로 개종하여, 선종은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중기 화엄종의 대표적 승려로서 당시 화엄종의 본거였던 興王寺에 주지하면서 그 교단을 영도하였던 의천이 均如의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화엄학을 배격하고 화엄학과 선종의 일치를 사상사적 과제로서 제기할 무렵, 위기에 처하여 있던 선종계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의천의 천태종 개창에 참여를 끝까지 거부한 선종승 圓應國師 學一은 유학하지 않고 불심에 대한 독자적 견해를 발전시켰고, 후에≪禪林僧寶傳≫에서 그의 견해가 증명됨으로써 그 동안 그의 주장에 의심을 가졌던 선승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0249) 許興植,<禪宗의 復興과 看話禪의 展開>(≪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468∼469쪽. 그리고 숙종·예종 때에 주로 활동했던 慧照(炤)國師曇眞은 이처럼 미약하게나마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고려 중기 선종계에서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 그는 大鑑國師 坦然·廣智大禪師 之印·大禪師 祖膺 등의 선승과 이자현·윤언이 등의 거사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침으로써 고려 초기 이래 미진하였던 선풍을 서서히 진작시키고 있었다. 특히 그의 제자인 탄연은 그로부터≪心要≫를 전수받은 데다 宋僧 育王介諶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臨濟禪風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선사 지인은 예종의 아들이었다는 점만으로도 당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 시기에 거사로서 활동했던 윤언이와 교유하던 貫乘 또한 혜조국사의 제자였다.0250) 許興植, 위의 글, 470쪽. 이자현은 선승은 아니었으나 거사로서 당시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고려 중기 거사불교의 중핵이자 선의 부흥에 중심적 역할을 한 이자현에 대하여 李仁老는 다음과 같이 보았다.

그는 더욱 선을 좋아하여 학자가 찾아오면 문득 그들과 함께 그윽한 방에 들어가 날이 다 가도록 단정히 앉아서 사색에 잠기었다가 때때로 옛 고승들의 종지를 들어 토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禪法이 우리 나라에 널리 퍼지니 혜조국사와 대감국사가 모두 그 문하에서 영향을 주고 받을 정도였다(李仁老,≪破閑集≫권 중).

 이처럼 이자현으로 말미암아 해동에 선법이 유포되었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당시 선종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그의 비중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 존재인 혜조국사와 대감국사 탄연이 그와 교유하면서 감화를 받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종에의 새로운 자각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그의 거사불교는 특히 출가자가 아닌 당대의 문인관료들에게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위기를 맞이한 선종계에≪楞嚴經≫으로써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한편, 예종에게≪심요≫를 지어 바치기도 하고, 또 전국의 학자들을 모아 능엄강회도 갖는 등, 왕을 포함하여 당대의 문인관료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가 실제로 禪理를 담론하거나 불경을 강론하고, 또한 시문을 교환한 사람들 가운데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문인관료이거나 혹은 선승임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0251) 崔柄憲,<高麗中期 李資玄의 禪과 居士佛敎의 性格>(≪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참조. 그리고 그가 선종의 부흥과 관련하여 중요시하고 있는≪능엄경≫ 10권 가운데 제3권은 周易의 太極說, 衆生起始와 業界起始는 성리학의 人性論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0252) 許興植, 앞의 글, 473쪽. 고려 중기 새로운 유학의 발흥과도 결코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고려 말 ‘동방이학의 祖’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鄭夢周조차도 이≪능엄경≫을 본다고 하여 구설수에 올랐던 점을 상기한다면,0253) 鄭道傳,≪三峯集≫ 권 3, 上鄭達可書. 이자현으로부터 비롯하였던≪능엄경≫을 중요시한 새로운 선풍은 고려 중기 문인관료들의 새로운 유학의 모색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새로운 선풍과 관련하여 전개되었던 고려 중기 문인관료들이 새로운 유학을 모색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당시 이자현과 교유하였던 權適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0254)<權適墓誌>(許興植 編,≪韓國金石全文≫, 亞細亞文化社, 1984), 668∼671쪽. 지방 鄕吏家에서 태어난 권적은 어렸을 때는 주로 마을 선생이나 덕있는 이들로부터 자연스럽게 글을 익혔다. 그렇게 형성된 기초적 학문 소양은 당시 유명한 절을 찾아다니면서 깊이를 더하였다. 여기에는 이자현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던 선종의 부흥이 큰 영향을 주었으며,≪大乘起信論≫에 느끼고 깨달은 바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불교는 그의 정신세계 형성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새롭게 일어났던 선종의 부흥을 비롯한 불교계의 변화 속에서 禪이나 空을 통하여 새로운 유학에의 모색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었다면, 이러한 분위기는 북송의 신유학적 토양 자체가 이미 생면부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고려 중기 불교계의 변화 속에서 형성되고 있던 새로운 유학에의 모색에 확신을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예종 10년(1115) 그가 송에 유학생으로 갔을 때, 그 곳에서도 이미 선종불교의 세례를 통한 새로운 유학의 정립을 향하여 목하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송과 평행하여 진행되고 있던 새로운 유학에의 모색은 관직을 거듭 역임하면서 그 범위를 넓히고 아울러 그러한 방향을 계승할 수 있는 다음 세대를 선발하여 그 과업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권적과 같은 예는 더 찾아질 수 있다. 권적과 함께 송에 가서 공부하였던 김단이나,<哭權學士適>이라는 시를 지어 친구를 잃은 슬픔을 표현하였던 金富軾, 또는 김부식과 대립하였던 윤언이 등이, 모두 크게 보면 고려 중기 이러한 풍토 속에서 새로운 유학을 모색하였던 터이다. 다만 김부식은 의천의 비문을 짓는 등 교종계의 새로운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면 윤언이의 경우에는 혜조국사의 문인인 貫乘禪士와 교유하면서 스스로 금강거사로 부르는 등 선종계의 새로운 변화와 좀더 밀접한 관련이 있을 따름이다.0255) 許興植, 앞의 글 참조. 특히 예종대 왕권강화 노력과 함께 새롭게 등장하는 관료집단인 韓安仁 일파가 주로 지방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또 그들의 다수가 당대 선종계의 새로운 움직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은,0256) 金相永,<高麗 睿宗代 禪宗의 復興과 佛敎界의 變化>(≪淸溪史學≫5, 1988), 60∼61쪽. 예종대 학제와 과거제개혁 그리고 정치개혁까지를 수반한 새로운 전개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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