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2.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
  • 1) 신유학의 전래와 고려 사상계의 동향
  • (3) 신진관료의 대두와 새로운 사풍의 전개

(3) 신진관료의 대두와 새로운 사풍의 전개

 慶源 李氏 출신의 李資義가 헌종 원년(1095)년 왕권에 도전한 이래, 왕실에서는 경원 이씨를 비롯한 여러 문벌세력을 억제하여 국왕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그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하였다. 숙종은 이같은 정책을 처음으로 실천에 옮겼다. 그는 貞州 庾氏 출신의 왕비를 맞아들여 경원 이씨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의 아들인 예종도 이 정책을 지속하였는데, 비록 그가 어리고 경원 이씨의 모든 요구에 대항할 힘이 없어서 李資謙의 딸과 결혼하였지만 그도 계속 왕권의 독립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예종대에 보이는 여러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들 가운데 이자겸세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노선을 추구하려는 국왕의 의도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예종은 경원 이씨 일파가 아니면서 그를 위해 충성을 다할 인물들을 적극 후원하고 끌어올렸다. 한안인과 같은 인물들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은 바로 이런 연유였다.0257) E. J. Shultz,<韓安仁派의 登場과 그 役割>(≪歷史學報≫ 99·100, 1983), 149쪽. 예종대 신진세력 중에서도 핵심인물 한안인은 예종 즉위 전에 侍學한 연고로 측근으로 기용되자 자신을 중심축으로 하여 왕권을 보위할 수 있는 신진관료를 결집해 나갔다.

 예종대 관학의 부흥을 통한 새로운 사풍의 창출 또한 이러한 배경과 맥을 같이하였다. 왕권강화를 위하여 문벌귀족이나 외척세력 등 대신들의 전횡을 유교적 정치이념으로써 견제할 수 있는 신진관료의 양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다. 요컨대 유교적 합리주의로 재무장함으로써 조정의 귀족적 정실주의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관료체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예종이 즉위하고 나서 “학교를 설치하여 현명한 인재의 양성화야말로 삼대 이래로 다스림을 이룰 수 있는 근본이다”고 하여 관학부흥의 의지를 강력하게 나타냈을 때, 士類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기뻐하였지만 반면에 대신들은 이러한 왕명을 어느 한 사람도 받들려 하지 않아서 당시 이를 애석하게 여기는 논의가 일었던 상황은,0258)≪高麗史≫ 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예종 2년 춘정월. 예종대 왕권강화의 지향과 함께 하였던 관학부흥의 성격과 이를 둘러싼 신진사류와 대신과의 대립되는 입장을 잘 말해주고 있다.

 왕권강화와 함께 새로운 정치개혁을 행한 첫 단계로서의 이러한 ‘置學養賢’의 입장 천명에 따라, 대학 崔敏庸 등 70명, 武學 韓自純 등 8명을 시험으로 뽑아서 七齋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7재란 곧≪주역≫을 麗澤,≪상서≫를 待聘,≪모시≫를 經德,≪주례≫를 求仁,≪대례≫를 服膺,≪춘추≫를 養正,≪무학≫을 講藝라 한 것이니,0259)≪高麗史≫ 권 7, 世家 7, 예종 4년 7월. 기존의 학풍을 경학적 학풍으로 전환시키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이것은 곧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의 안정에 대응하는 고려유학의 자기 심화과정인 동시에 보수화과정의 산물인 문종대 최충의 사학에서 비롯된 경학적 학풍을 관학으로 흡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종은 학제개혁을 통하여 전대의 이러한 특정 문벌에의 경학화 경향을 국가가 장악하여 관리함으로써 왕권 중심의 유교적 관료정치를 전국적 차원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예종 11년 4월) 制하기를, 문무양학이야말로 국가교화의 근본이다. 어서 빨리 지휘를 내려서 양학을 세우고 여러 학생들을 양육하여 장래의 장군이나 재상들을 선발하는 데 대비하고자 한다(≪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위와 같은 교시에서 보듯이 새로운 학풍을 통하여 장차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 능력있는 인재(將來將相)를 양성하기 위한 體制敎學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종실·외척 등에 의한 조정의 귀족적 정실주의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유교적 정치이념으로써 견제할 수 있는, 유교주의적으로 자각된 士人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신진관료의 대두는 인종대에 오면 외척의 귀족적 정실주의에 대항하는 유교적 합리주의로 자신을 수양하면서 도교와 불교에 대항하는 의식을 체질화해 나가는 새로운 관인형의 결집을 낳게 된다. 이러한 예종·인종대 새로운 학제개혁을 통한 유교주의적 신진관료의 대두는 곧 정치개혁으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인종 5년(1127) 서경에서 포고한 ‘維新之敎 15개조’는 새롭게 제시한 정치방향이었다. 유신지교 15개조는 언뜻 음양연기사상에 입각하여 졸속하게 반포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고려사회에 드러난 정치·사회적 문제를 깊이 통찰한 끝에 국정 전반에 걸쳐서 일대 정치쇄신을 이루고자 천명한 국가적 의지였다고 볼 수 있다.0260) 朴性鳳,<高麗 仁宗期의 兩亂과 貴族社會의 推移>(≪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173쪽. 요컨대 유교주의에 입각한 정치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다. 유신지교에 보여지는 인종의 이와 같은 정치기강의 쇄신, 민생안정, 그리고 풍속개혁의 적극추진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유교적 仁政 내지 합리주의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0261)≪高麗史節要≫ 권 9, 인종 5년 3월.

 이러한 정치개혁의 지향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발전되기 위해서는 유교주의로 재무장한 새로운 관인들이 계속적으로 창출·공급되는 것이다. 학제개혁을 통한 정치개혁의 지향과 병행하여, 관리충원제도인 과거제 개혁 또한 그러한 신교육에 입각하여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신교육에 맞추어 병행된 과거제는 종래의 詩·賦 중심에서 벗어난 경세제민의 실용적인 策·論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인종 17년 10월) 예부 貢院에서 아뢰기를, “범중엄이 이르기를,‘먼저 策·論으로써 사람의 大要를 보고 다음에 詩賦로써 그 재질의 전부를 보아, 대요(책론)로써 그 합격여부를 정하고 전재(시부)로써 그 등급을 올리고 내린다면 이는 인재선발의 근본이고 다스림을 이루는 기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製述業은 결장인 제3장에서 운을 짝맞추어 偶對할 수 없는 策과 論을 번갈아 시험보고 있으니, 이로 인하여 詩賦의 學이 점차 쇠폐하여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초장에서는 經義로, 2장에서는 論과 策을 서로 번갈아 보고, 3장에서는 詩賦로 시험하는 것을 영원한 격식으로 삼도록 합시다(≪高麗史≫ 권 73, 志 27, 選擧 1).

 위의 상소에서 보듯, 인종대 과거제의 개혁은 북송대 범중엄의 과거제 개혁방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원래 당의 진사과 시험과목은 帖經·잡문(뒤의 시부)·시무책으로 이것은 송의 초기까지 계승되었다. 그러다가 범중엄·구양수 등에 의하여 새로운 관학의 부흥을 통한 유교개혁운동과 그에 따른 정치개혁운동인 신유학운동을 통하여 경력 4년(고려 靖宗 10년 ; 1044)에 과거제가 策·論 중심으로 개혁되어 왕안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0262) 申採湜,<宋 范仲淹의 文敎改革策>(≪歷史敎育≫ 13, 1970) 참조. 이 때의 試法은 3장으로 나누어 먼저 策詩로써 일차 선발하고, 다음에 論을 시험하여 2차 선발하면 절반은 낙제된다. 그리고 나서 제3장에 가서 시부로 시험을 보이면 응시한 자들은 모두 책론에 통과한 우수한 인물들인 까닭에 종래와 같은 시부의 병폐는 없게 된다는 이른바 ‘逐場去留之法’이고 帖經黑義는 없앤다는 것이었다. 북송대 유교개혁운동의 차원에서 실시되었던 이러한 ‘축장거류지법’의 취지가 이미 인종대에는 반영되어 시행하였고, 나아가 이러한 방향이 영원한 격식으로 자리잡아 가게 된 것이다.

 고려 초기나 후기에는 주로 초장에서 시험보여지던 시부가 예종·인종연간을 중심으로 한 고려 중기에는 주로 제3장인 종장에서 부과되었다. 이러한 경향성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고려 중기에 문벌이 형성되면서 자제를 주관적인 시부로 평가하여 상위에 급진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중기 유학이 사장 중심이었다는 선입견에 의해 책론 부과의 의미를 경시한 것으로 그로 인하여 종장에서의 시부 부과의 의미도 오해되었다. 곧 사장 중심의 학풍은 인종 이후 문벌을 이룬 중앙의 품관자제가 급제를 독점하다시피 하게 하였고, 문벌의 형성에 발맞추어 과거는 능력위주의 사회적 기능을 폐쇄시켰다는 것이다.0263) 許興植,≪高麗科學制度史硏究≫(一潮閣, 1981), 98쪽.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북송대 범중엄이 당시 시부의 병폐를 없애기 위하여 책론을 먼저 시험 보이고 종장에서 시부를 시험보였던 이른바 ‘逐場去留之法’의 의미는 참고하지 않았던 데서 해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시부를 경시하고 경세제민의 실용적인 책론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과거제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부를 경시하고 경세제민의 실용적인 책론을 중시하는 방향으로의 과거제 개혁의 지향은 당대 士人들에게는 새로운 모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詞章의 학풍에서 존경의 학풍으로의 이행을 가속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사장의 학풍은 아이들의 잔재주와 같은 글장난으로 오히려 하늘이 내려준 순정한 성정을 파괴하는 일로 공격당한다. 요컨대 제왕이라면 마땅히 경술에 의지하여 정사를 베풀어 化民成俗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장의 학풍이 그야말로 경박한 것으로 치부되는 반면, 尊敬의 학풍을 통하여 3강5상의 가르침과 성명도덕의 이치를 탐구하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형상화되었다. 당대 선비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들을 살아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만큼 경술이 숭상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학제개혁의 방향에서 제시되었던 유학의 경학화·심성화 경향이 과거제 개혁 방향에서도 일관적으로 추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신교육에 따라 개혁된 과거제는 종래의 시부 중심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책론 중심으로 바뀌고 있었으며, 이와 함께 詞賦에서도 四六騈儷文에서 古文으로의 문체개혁 또한 필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作新一代」의 개혁은 요컨대 사장의 학풍에서 존경의 학풍으로 전개되던 고려 중기 유학의 새로운 동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예종·인종대의 이러한 존경의 학풍은 당시 진행되었던 경학 강론의 내용에서도 살필 수 있다. 당시 진행되었던 강경의 내용을 보면,≪서경≫ 14회,≪주역≫ 8회,≪중용≫ 14회,≪시경≫ 3회,≪月令≫ 3회,≪예기≫ 2회,≪노자≫ 1회,≪주례≫ 1회,≪唐鑑≫ 1회,≪宋朝忠義集≫ 1회 등의 순이다. 이러한 당시 강경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왕을 비롯한 새로운 문신관료들이 지향하는 뜻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여≪주역≫과≪중용≫ 등의 강의에서 지향하고 있는 경학의 심성화 경향, 그리고≪서경≫·≪예기≫·≪송조충의집≫·≪당감≫ 등의 강의에서 지향하고 있는 군주의 정치적·도덕적 자각, 도의·명절의 명분주의적 경향 및 이에 따른 군신 상하의 유교적 질서확립의 지향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뿐 아니라 합리적인 관료제에 의한 국가운영의 지향(周官 강의)이≪주례신의≫의 저자인 왕안석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이루어졌던 점도 주목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학제·과거제·문체의 개혁 및 정치개혁까지를 수반한 고려 중기의 새로운 사풍은, 송대 신유학의 형성과 전개에 평행하여 그와의 교호작용 속에서 독자적인 자기 발전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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