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2.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
  • 2) 주자성리학의 수용과 특징
  • (1) 주자성리학의 수용

(1) 주자성리학의 수용

 인종 8년(1130) 이래 여·송간의 정치적 교류 단절은 고려로 하여금 집대성기의 주자성리학과의 접촉을 어렵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종 24년(1170)의 무신란은 사상계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던 귀족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를 극복하려는 기회마저 앗아감으로써 유학사상의 발전에 왜곡을 초래하였다. 文人·儒者들 대부분이 무신들에 의한 숙청에 화를 입었으며 다행히 죽음을 모면하였다 할지라도 窮山에 도피하여 釋者로 전신하여 그 여생을 마치는 등, 문풍이 일반적으로 침체된 가운데 章句나 익히고 문장이나 다듬어 무인들 밑에서라도 어떻게든 정치적 생명을 지키려는 풍조가 곧 그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려 중기 이래의 신유학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령 구양수에 이르러 그 성세를 떨치기 시작한 고문운동의「文以載道」·「文以致道」라는 사상0264) 黃公偉, 앞의 책, 35쪽.이 무신집권기의 일부 문사들에게 이어지면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니, 다음 崔滋의 말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文이란 道를 밟고 나가는 문이니 不經한 말은 건너지 않는다. … 그 氣는 壯하고 그 意는 깊으며 그 辭는 밝게 되어 인심을 感悟케하고 微旨를 발양시켜 마침내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剽竊刻畵하고 誇耀靑紅하는 일 같은 것은 儒者가 본래 하지 않는 것이다 (崔滋,≪補閑集≫, 補閑集序).

 그러나≪역≫과≪중용≫에 의한 심성화의 방향은 이제 유가의 손에서 벗어나 당시 불교계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켰던 선종계통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보조국사 知訥(1158∼1210)에 의해 심성에 대한 관심이 선의 존재론적 근원이 되는 진심과 결부되어 나타났거니와,0265) 吉熙星,<知訥의 心性論>(≪歷史學報≫ 93, 1982) 참조. 그 후 유학자 출신 선종계통의 승려 수선사의 慧諶에 의해 儒·佛一致說이 제기되는 등0266) 蔡尙植,<高麗後期 天台宗의 白蓮社結社>(≪韓國史論≫ 5, 서울大, 1979), 141∼142쪽. 심성화에 따른 유·불의 융합과 조화가 무신란 이후 고려 사상계의 새로운 조류로 나타나게 되었다. 혜심뿐만 아니라 天因·天頙 등 본래 유학자로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이 대거 불문에 뛰어든 것과 이들이 계속 기존의 유학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0267) 蔡尙植, 위의 글. 이러한 사상계의 조류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고려의 유학계는 당시 완성단계에 있던 주자성리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서도, 고려 사상계의 자체 성숙과정을 거침으로써 이미 주자성리학과 평행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朱子를 볼 때 주자가 絶對善일 수는 없었다. 초기 주자성리학의 전래기에 閔漬가 주자의 昭穆說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도0268)≪高麗史節要≫ 권 24. 충숙왕 4년. 실상 이러한 고려 후기 사상계의 조류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 쪽에서의 심성화에 의한 유·불간의 조화는 그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는 원 간섭기를 거치는 동안의 불교계의 타락으로 인해 점차 유자들에게 절실히 인식되었지만, 당시의 이러한 유불관계는 무신정권을 위한 행정적 실무나 혹은 외향적 문장수식에만 정열을 쏟던 변태적 유학계로 하여금 완성된 주자성리학을 수용하게 하는 데 있어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만은 인정해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고려 사상계에 주자성리학이 소개되는 단서가 安珦(1243∼1306)의 원으로부터의 주자서 도입이며, 그것이 白頤正·權溥·禹倬 등의 연구와 보급에 의해 李齊賢(1278∼1367) → 李穀(1298∼1351) → 李穡(1328∼1396) 등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수용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일반화된 견해이다.0269) 이러한 견해는 朱子學 완성기의 麗宋관계의 단절이라는 사실로 인해 설득력을 지니면서 尹瑢均,<朱子學の傳來とその影響に就ぃて>(≪尹文學士遺稿≫, 朝鮮印刷株式會社, 1933) 이래 거의 통설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현의 다음과 같은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일찍이 神孝寺 堂頭인 正文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 그는 나이 80으로≪論語≫·≪孟子≫·≪詩經≫·≪書經≫을 잘 강설하였다. 그는 스스로 그것을 유자인 安杜俊에게서 배웠다고 했는데, 전에 한 선비가 송에 들어가 王安石이 은퇴하여 金陵에 거처하고 있음을 듣고 찾아가≪毛詩≫를 배워 7대를 전하여 두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두준의 說이≪詩經≫은 오로지 王氏의 뜻을 사용하고≪논어≫·≪맹자≫및≪서경≫의 說은 모두 朱子章句나 蔡沈의 傳과 부합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二書가 아직 우리 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두준이 어디서 그 뜻을 터득했는지 모르겠다(李齊賢,≪櫟翁稗說≫전집 1, 嘗見神孝寺堂頭 正文).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현의 말을 통하여 성리학 수용에 관한 또 하나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원으로부터의 성리학 전래 이전에 남송으로부터 직접 전래된 성리학이 재야의 학자나 승려들에 의해서 연구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개연성이 바로 그런 점이다. 무신란 이후 여·송간의 교류 단절에도 불구하고 송상의 왕래는 끊이지 않았고, 더욱이 고려 중기 이래 신유학에 의해 자극을 받던 문사들이 무신란을 피해 초야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여전히 남송의 주자성리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당시 불교계 쪽에서의 심성화 경향에 따른 유·불융합의 기운은 주자의 성리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안석이 금릉에 퇴거(1076∼?)한 이후에 찾아간 고려학자로부터 7傳이 안두준인 것도 이제현의 생몰연대에 비춰보아 어긋나지 않으며, 80세의 正文이 안두준에게 그 學을 배운 것도 주자의≪四書集註≫와 채침의≪書集傳≫의 완성연대로 보아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야사상계 일각에서의 움직임은 당시의 이제현조차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중앙의 사상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안향에 의해 전래된 원의 주자성리학이 사상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원래 남송의 주자학을 원에 전파한 장본인은 趙復이다. 그는 元 太宗이 남송을 정벌할 때 포로로 잡혔다가 원에 귀의하여 그 주자학을 姚樞(1213∼1280)에게 전했고,0270)≪元史≫ 권 189, 列傳 76, 趙復.
萬卷堂을 중심으로 하여 李齊賢과 교유했던 원의 性理學者들의 動向에 대하여는 鄭玉子,<麗末 朱子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震檀學報≫51, 1981) 참조.
그것을 원의 관학으로 굳힌 사람이 魯齋 許衡(1209∼1281)이다.0271) 이하 魯齋에 관한 기술은 黃宗羲,≪宋元學案≫ 魯齋學案 및≪元史≫ 권 158, 列傳 45, 許衡 참조. 그는 蘇門山에 퇴거하여 있던 요추를 만나 주자서를 얻어 본 후 “今始得進學之序”라 하였고 그 중에서도≪小學≫을 존숭하였다. 조복이 國子祭酒兼集賢大學士로 있을 때 그의 제자인 王梓·呂端善·姚燧·劉安中 등을 불러 各齋의 齋長을 맡김으로써 우주론적인 이기론보다 持敬을 위주로 한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학풍이 원의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원의 학풍은 당시 불교의 폐단에 대해 심각히 반성해야 했던 고려 유자들의 배불론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성리학의 실천윤리 측면이 우선적으로 수용되게 되었으니,0272) 고려 후기 주자성리학의 수용과정중에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조선조 사변적인 도학자들 사이에서 고려 후기라는 시기는 철학사적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의 철학사연구에도 지속되고 있다. 고려 후기에 주자학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는 학설 역시 수용과정상의 이러한 특징을 간과한 데서 나온 것이다. 실상 주자학은 居敬이라는 실천적 측면과 窮理라는 사변적 측면을 학문의 요체로 삼는 양면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주자학자로 알려진 안향은 국자감의 젊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유하였다.

聖人의 道는 日用倫理에 지나지 않으니, 아들이 되어 효도해야 되고 신하가 되어 충성해야 하며 禮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信으로써 벗과 사귀며 자기를 닦는 데는 敬으로써 하고 일을 실천하는 데는 반드시 誠으로써 할 뿐이다. 저 佛者들은 부모를 버리고 出家하여 倫理를 업신여기고 義理를 어그러뜨리니 곧 夷狄의 무리이다(安珦,≪晦軒集≫, 諭國子諸生文).

 여기서 孝·忠·禮·信·誠 등의 실천적 덕목은 모두 일상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으로 주자가≪소학≫에서 특히 강조한 것이며, 이러한 실천덕목에 비춰 불자들의 비윤리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동방이학의 조’라 불린 鄭夢周도 다음과 같이 상통하는 견해를 보여준다.

儒者의 道는 모두 日用平常의 일이니, 음식이나 남녀관계는 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바로서 지극한 理가 그 속에 있다. 堯舜의 道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으니 動靜語黙이 그 바름을 얻으면 곧 堯舜의 道인 것이지 처음부터 대단히 높아서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저 佛氏의 敎는 그렇지 않아서 친척관계를 떠나고 남녀관계를 끊어 홀로 바위굴에 앉아 草衣木食하면서 觀空寂滅을 宗으로 삼고 있으니 이 어찌 平常의 道이겠는가(≪高麗史≫ 권 117, 列傳 30, 鄭夢周).

 이렇게 당시 현실사회와 유리된 채 갖은 폐단을 낳고 있던 불교에 대한 반성 및 사회질서 회복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자연히 형이상학적이거나 사변적인 쪽보다 실천윤리 쪽에 관심이 더 투영되었던 것이니, 이 때 魯齋로 대표되는 원의 실천적인 주자학은 고려사상계에서 그 도통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안향 이후 崔瀣와 李穀 등이 원의 과거에 급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면서 고려 성리학의 방향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색이 원의 국자감에서 3년간 수학했던 데서 당시 원의 관학이었던 노재학풍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孔孟의 學을 講明하고 老莊과 佛敎를 배척하여 萬世를 깨우치는 데 이른 것은 周濂溪·程明道·程伊川의 공이요, 송이 이미 망함에 그 설이 북쪽으로 흘러들어가 魯齋 許先生이 그 學을 사용하여 元世祖를 도와 中統·至元의 정치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李穡,≪牧隱文藁≫권 9, 序 選粹集序).

 위에서 이색의 道統觀에 미친 노재의 비중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겠다. 따라서 그는 주자성리학에서의 인간의 본연적이고 선천적인 성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회복하는 수양법으로서의 戒愼에 주목하면서0273) 李 穡,≪牧隱文藁≫ 권 10, 說 伯中說贈李狀元別.「持敬」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道를 배우는 자는 敬에서부터 말미암아 誠正에 이르며 세상에 나아가 정치하는 이는 敬으로부터 말미암아 治國平天下에 이르는 것이다. 부부간에 서로 敬함을 사서에 기록하고 있으니 田野 사이에서도 또한 敬이 없어서는 안되거늘 하물며 朝廷과 鄕黨과 屋漏에서랴(李穡,≪牧隱文藁≫ 권 10, 說 韓氏四子名字說).

 그가 지닌 견해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修身을 통해 立命할 것을 주장했던 許魯齋의 노력과0274) 黃公偉, 앞의 책, 283쪽 참조. 서로 통하는 것으로서, 당시 사상계의 동향을 고려할 때 오히려 당연했던 것이다.

 물론 원에 의해 한 차례 걸러진 주자성리학, 즉 노재학풍이 일방적으로 고려 사상계에 이식되었던 것은 아니고, 당시 “아들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신하는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 의를 생각하는 것이 쇠퇴하고 경박스러워져서, 至親을 길가의 행인처럼 보고 至敬을 弁髦처럼 여기는”0275) 鄭道傳,≪佛氏雜辨≫, 佛氏慈悲之辨.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사회질서와 도덕적 윤리를 회복하려는 신진 사인들의 문제의식과 결부됨으로써 쉽게 접목될 수 있었고 결국 사상계의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몽주가 당시 풍속이 상제에 오로지 乘門法만을 숭상하는 것을 보고 士庶로 하여금≪朱子家禮≫에 따라 가묘를 세우고 先祀를 받들도록 한 것이라든가,0276)≪高麗史≫ 권 117, 列傳 30, 鄭夢周. 趙浚이 시무를 개진하는 上書에서 습속을 개탄하면서≪주자가례≫를 사용하여 습속을 바로잡도록 그 규정을 상세히 정하고 있는 것,0277)≪高麗史≫ 권 118, 列傳 31, 趙浚. 그리고 정도전이 “人家에서 능히 이러한 몇 가지 일을 잘 수행한다면 비록 幼者라도 그로 하여금 점차 禮義를 알게 할 수 있다”0278) 鄭道傳,≪朝鮮經國典≫上, 禮典 家廟.라는 취지에서 家廟條를, 더 나아가 “엄숙하지 않고서도 교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鄕飮酒가 그러한 것이다”0279) 鄭道傳,≪朝鮮經國典≫上, 禮典, 鄕飮酒.라는 사회교화에 대한 생각에서「향음주」조를 후일 그의≪朝鮮經國典≫ 중에 설정해 놓은 것 등은, 모두 당시 고려사회의 절박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의 반영인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통하여, 성리학 중에서도 노재학풍의 실천윤리적 측면이 우선적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당시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사대부들은 개인의 고락보다는 사회의 안녕을, 부처의 힘보다는 인간의 힘을 더욱 중시하면서, 그 인간의 힘에 의해 사회질서를 회복하려고 하는 성리학의 사회기능적 측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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