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3. 풍수·도참사상 및 민속종교
  • 1) 풍수·도참사상
  • (1) 풍수·도참사상의 변모

(1) 풍수·도참사상의 변모

 고려는 풍수지리설을 지배이념으로 하여 개국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국 뒤에 통합이념으로서도 그것을 도입하여 신봉하였다. 고려 초기까지의 풍수지리사상은 대체로 긍정적인 조류가 풍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차원에서 볼 때 태조 왕건의 통일은 대립되는 정권의 소멸을 뜻할 뿐이었다. 여전히 지방의 성주들은 후삼국의 혼란시대나 별로 다름없는 반독립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조는 이들과의 타협과 연합 속에서 그의 정권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많은 호족들과 혼인을 통하여 연합하였고, 또 때로는 그들에게 王氏姓을 주어 가족과도 같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 연합을 굳게 다졌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들의 존재는 태조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이 과정 중에<訓要十條>가 풍수사상을 암암리에 저변에 깔고 반포되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王規의 亂과 같은 소요가 계속됨으로써 왕권은 불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한 定宗은 연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西京에 천도하려 하였다. 여기에는 태조가<훈요10조>에서 강조한 바 있는 풍수사상에 대한 신앙심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개경을 중심으로 세력을 뻗고 있는 개국공신들의 포위망 속에서 탈출하려는 의도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하튼 고려왕권의 안정은 광종의 개혁을 기다려서 비로소 새로운 전망이 서게 되는 것이지만,0324) 李基白,≪韓國史新論≫(一潮閣, 1985), 126∼127쪽. 풍수사상은 이 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즉 고려 개국 당시의 신분타파나 국토재편성과 같은 바람직한 경향성을 잃은 채 왕실과 귀족의 가문 번성을 위한 터잡기 잡술로 변질되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반복적으로 나타난 서경으로의 천도운동이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이미 고려 초기의 풍수·도참사상편에서 언급한 바가 있으나, 우리 나라 수도의 이전에 풍수지리가 어떤 식으로 간여해 왔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다시 한번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서경으로의 천도운동은 고려 초기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인종 때의 妙淸에 의한 반란 당시에 서경천도가 기도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경인 平壤은 한반도의 서북부 요충으로 枕山帶水 혹은 負江臨水의 自然形勝을 이루고 있어 關西 유일의 重鎭이라든가 조선 제일의 강산이라는 칭호를 듣는 곳이다. 동쪽과 남쪽은 大同江에 임하고 북쪽은 錦繡山의 수려한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이것을 주산으로 하여 좌우에 지맥이 분파하고 있다. 그 白虎는 乙密臺로부터 서남에 뻗어 七星門을 지나 萬壽臺에 이르고, 거기서 더 작은 지맥으로 나뉜 가운데 長樂宮址와 같은 명당 터를 안고 다시 남으로 달려 瑞氣山·蒼光山을 동서로 가로 일으키고 있으며, 그 靑龍은 을밀대 아래에서 좀 곧게 남쪽으로 달려 그것과 백호와의 사이에 龍堰宮址·觀風殿址와 같은 명당 터를 품으면서 겨우 長慶門址에 이르러 그치었다. 평양은 청룡이 짧고 백호가 우회하여 右旋局으로 대동강에 역향하고, 따라서 명당에서부터 시작하는 모든 물흐름도 다 오른쪽으로 돌아 대동강에 흘러 들어간다.0325) 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특히 地理圖讖思想의 發展을 中心으로-≫(乙酉文化社, 1954), 104∼106쪽.

 풍수상 開城은 주위가 산으로 조밀하게 둘러싸인 藏風의 국면인데 대하여, 평양은 대동강이라는 큰 강에 면한 得水의 국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평양을 풍수 형국상 行舟形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게 되는데, 이것은 큰강을 면한 得水局地의 일반적 경향이라 할 것이다. 즉 홍수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결점을 지니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려시대라는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평양은 아직 수도로서 적합치 못한 곳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사실 삼국의 수도들은 지역국가라는 특성상 한반도의 중앙적 위치를 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은 것이 백제의 초기 수도가 오늘날의 서울 주변으로 국토의 중앙이기는 했지만, 그 곳을 고수하며 버틸 수는 없었으리라는 점이다. 백제의 국력이나 당시의 전략·전술, 그리고 병기의 수준으로는 방어가 어려웠으리라는 예상이 들기 때문이다. 그 후의 신라는 알려져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수도인 慶州가 너무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국토 전체를 통치하는데 실패하고, 계속되는 반란과 지방호족의 발호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연히 그 다음의 왕조인 고려는 중부지방인 개성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이 수도 개성의 입지선정부터는 철저히 풍수사상에 기반을 두게 된다. 그 이론적 논의는 풍수였지만, 결정은 극히 현실적이었다는데 고려시대 풍수지리설의 묘미가 있는 것이지만, 개성은 전형적인 藏風局의 땅이다. 장풍국이란 주산과 좌우의 청룡·백호, 그리고 남쪽의 朱雀砂인 案山·朝山 등에 의하여 빈틈없이 둘러싸인 일종의 산간 분지지형에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에는 어느 정도 유리하지만 명당의 규모가 적고 물과 연료가 부족하며 더 이상의 발전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정치·경제·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러한 위치가 넓은 들판이나 해안에 비해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그 뒤로 여러 차례에 걸쳐 천도 논의가 이어진다. 평양·한양·연백·장단 등 여러 후보지가 거론되고, 어떤 곳은 구체적인 계획에 들어간 적도 있으나 실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수도의 이전이란 한 왕조의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천도의 성공은 결국 그 왕조의 멸망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풍수사상의 논의가 깔려 있음을 본다.

 이것이 고려 풍수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地德衰旺說로 정착이 되어진다. 지덕쇠왕설이란 땅의 地氣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그 기운이 쇠하고, 또 일정기간이 지나면 쇠했던 기운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개성의 지기가 쇠하였으니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논리의 허점이 있다. 즉 개성의 지기가 쇠하였다는 것은 결국 王氏들의 고려왕조가 쇠하였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므로 그것을 수도만 옮겨가지고 해소하려 한 것은 뿌리를 놓아 두고 줄기만 잘라 나무를 옮겨 심도록 하는 사고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천도 후보지로 가장 각광을 받은 서경 평양과 남경 한양은 得水局이라는 특징을 갖는 장소이다. 득수국이란 명당의 3면 혹은 2면은 산으로 보호를 받는 지세이나 반드시 한쪽 면에는 큰 강을 끼고 있는 형세의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개성의 藏風局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득수국으로 전환이 매우 바람직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던 당시의 대내외의 정세는 금나라가 요와 송을 토멸하고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李資謙·拓俊京 등 권신들의 발호와 천재지변의 빈발로 이른바 말세적 민심이 유포되고 있었다. 이에 점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그들은 왕조 자체의 한계를 인식하고 기층민들의 절실한 욕구를 수렴하는 혁명을 이끄는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오히려 풍수의 지기쇠왕설을 교묘히 윤색하여 천도를 진언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왕실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명분상의 일이었을 뿐 실제 왕실의 발언권은 거의 없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모든 피해는 백성들에게 돌아가고 진정한 반지배이념으로서의 풍수사상도 싹트게 된 것이다. 즉 임금이나 명문거족의 뼈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음덕을 쌓고 땅의 기운을 얻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철저한 풍수적 평등사상의 발로가 바로 그것이었다.

 고려 후기에 이르게 되면 풍수는 또 다른 의미에서 변질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풍수사상이 타락하는 현상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陰宅風水의 일반화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高麗史≫ 刑法 禁令條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경작지에 盜葬을 하면 笞 50이고, 墓田에 도장하면 杖 60이며, 里正에게 고하지 않고 이장을 하면 태 30이며, 타인의 묘전을 盜耕하면 장 100이라 하였으며, 또한 분묘를 훼손하면 徒 1년에 처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다른 사람 분묘의 나무를 함부로 자른 경우, 친속의 선영 안에서 같은 행위를 한 자에 대한 벌칙규정 등 음택풍수가 일반화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내용들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상당히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도 이자겸이 術師를 보내어 자리를 잡게 해준 일, 고종 4년(1216)에 거란군의 침입을 왕릉 옆에 묘를 써서 그렇게 되었다고 여기고, 그것을 다시 장사지내야 좋겠다고 말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일 등이0326)≪高麗史節要≫ 권 15, 고종 4년 3월. 그런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음택풍수에 관한 기록들이 오늘날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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