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3. 풍수·도참사상 및 민속종교
  • 1) 풍수·도참사상
  • (3) 남경천도설

(3) 남경천도설

 신라 경덕왕 14년(755)에 한양으로, 고려 초기에는 楊州로 개칭되었던 현재의 서울은 고려 문종 21년(1067)에 비로소 남경으로 설치되었다. 문종 때에 남경이 세워진 동기는 순전히 地理圖讖說에 의한 것이었는데, 후에 좋은 효험이 없다는 이유로 남경은 다시 양주로 지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숙종 원년(1095)에 당시의 음양관인 衛尉丞同正 金謂磾는≪道詵記≫·≪道詵踏山歌≫·≪三角山明堂記≫·≪神誌秘詞≫등의 풍수도참서를 근거로 하여 남경건도를 주장하였는데, 특히≪삼각산명당기≫와≪신지비사≫에 남경의 풍수지리를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삼각산명당기≫의 내용은, 삼각산이라는 곳은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한 仙境으로서 거기서 시작한 花脈(산맥)은 세 겹 내지 네 겹으로 갈려 나와(三角山·文殊峰·普賢峰·白岳 등) 산이 산을 등지고 명당(서울)을 지키고 있으며, 案前의 朝山은 다섯 겹 또는 여섯 겹을 이루고(冠岳·牛眠·狐峴·淸溪·鶴峴·葛山 등), 방계·직계의 姑山·叔山·父山·母山은 모두 솟아나서 이를 옹호하고, 內水口·外水口에는 각각 충실히 주인을 지키는 세 개의 犬山이 있고(내수구 즉 내문은 往十里·馬場里, 沙斤里 부근을 말한 듯하고, 외문 즉 외수구는 한강 하류방면을 지칭한 듯함), 좌우의 청룡·백호는 세력이 비슷하니 전체의 균형이 잡혀 있으며, 내부의 商客과 寶貨가 이 곳으로 모여들어 국왕을 돕고, 임자년중에 이 땅을 개척하면 정사년에는 聖子를 낳을 것이고 또 삼각산에 의지하여 帝京을 세운다면 9년 만에 4海로부터 조공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다.0328)≪高麗史≫ 권 122, 列傳 35, 金謂磾.

 한편≪신지비사≫의 내용은, 3京을 저울에 비유하여 개경을 저울대로 하고, 五德丘(지금의 서울)를 저울의 추로 삼고, 서경을 저울의 증판으로 삼아서 머리와 꼬리가 균형을 유지하면 국가가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만일에 이들 3개소가 폐지된다면 왕업이 쇠퇴하여 기울어지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위제의 오덕구에 관한 해석을 살펴보면, 오덕구는 삼각산 남측의 현재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5방의 5行山을 의미한다. 중앙에 面岳(白岳), 즉 현재의 北岳山이 있으니 그 모양이 원형이어서 土德에 속하고, 남에 冠岳(과천)이 있으니 그 모양이 첨예하여 火德에 속하고, 동에 南行山(양주)이 있으니 그 모양이 곧은 모양이어서 木德에 속하고, 서에 北嶽(富平)이 있으니 그 모양이 네모형이서 金德에 속한 것이라 한다. 이것은 오행사상에 의하여 金木水火土의 5덕을 동서남북 및 중앙의 5산에 배정하여,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의 相生無窮의 좋은 터라는 것이다. 이것을 풍수지리가는 五氣朝元格이라 한다. 즉 5행이 환원한다는 것이다. 김위제의 주장은 이 오덕구의 중앙인 토덕 즉 면악의 터에 남경을 건치하고 때에 따라 국왕이 순주하면 국가사직이 크게 융성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김위제의 이 주장에 의하여 숙종 6년에는 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고 상지관이 양주에 파견되어 남경의 후보지를 물색한 결과를 그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蘆原·海村·龍山 등의 산수는 도읍으로 삼을 만한 땅이 못되고 오직 삼각산 면악의 남방이 산세와 수세 면에 고금의 문서에 부합하오니, 청컨대 主幹이 되는 中心大脈에 壬坐丙向으로 형세를 따라 도읍을 세우소서’하니, 이 말에 따라 뒤에 임좌병향으로 된 언덕에 龍鳳帳을 묻었다고 한다(≪高麗史≫ 권 11, 世家 11, 숙종 6년 10월 을미).

 여기에서 고려된 남경건도의 범위는 동으로는 大峰(駱山), 서로는 岐山(鞍山), 북은 北岳, 남은 新龍山의 남쪽 끝에 이르는 비교적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 밖에도 한양에 대한 풍수지리설로서는 고려 중엽에 “尹瓘으로 하여금 백악산 남쪽에 터를 정하여 오얏나무를 심고 무성하게 되면 곧 베어버려서 道詵의≪留記≫에 나오는 白岳山下의 李氏(오얏)王朝 도읍의 地氣를 눌렀다”0329) 李重煥,≪擇里志≫ 八道總論, 京畿道.는 속설이 있으며, 공민왕 6년(1356)에는≪道詵記≫의 계통을 밟았던 普愚가 “漢陽에 도읍하면 36국이 來朝할 것이다”0330)≪高麗史≫ 권 106, 列傳 19, 尹諧.라는 지리도참설을 내세웠고, 또한 우왕 8년(1381)에는 白州守 洪順이 “南京의 鎭山인 三角山은 그 형세가 五行 중 火體의 산인 까닭에 木姓(동방)의 國으로 여기에 도읍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0331)≪高麗史≫ 권 134, 列傳 47, 신우.고 하는 풍수지리적 견지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반대한 적이 있었다.

<崔昌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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