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3. 풍수·도참사상 및 민속종교
  • 2) 민속종교
  • (3) 무격에 대한 열광적 신앙

(3) 무격에 대한 열광적 신앙

 고대에는 왕이 곧 무격이기도 했던 데 반해, 고려시대에는 무격의 사회적 지위는 대체로 낮은 편에 속했다. 충렬왕 때 환관이었던 李淑(李福壽)의 어머니는 太白山 무녀였고,0380)≪高麗史≫권 128, 列傳 35, 李淑. 충선왕의 측근세력인 姜融은 僉議左政丞 判三司事까지 올라갔지만 그 할아버지가 진주관노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기도 했는데, 그의 누이가 바로 송악산 신당무였다고 한다.0381)≪高麗史≫권 124, 列傳 37, 鄭方吉 附 姜融.
李能和,<朝鮮巫俗考>(≪啓明≫19, 1927), 8쪽의 姜融 누이의 경우를 들어 고려 때는 상류층도 巫覡이 되었다 했으나, 강융이 官奴집안임을 간과한 것이다.
또 우왕 때 문하찬성사로서 권력을 휘두르다가 처형된 池奫은 병졸에서 입신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무녀였다고 한다.0382)≪高麗史≫권 125, 列傳 38, 池奫.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고려시대에는 무격이 천업의 일종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무격들은 고대에서와는 달리 국가조직의 일원에서 배제되었으며, 국정을 보좌하는 기능도 상실했다.

 그렇지만 무격은 신령의 세계와 교류하면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지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로 여겨져, 폭넓은 계층에 걸쳐 신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위로는 왕실에까지 미쳤는데, 별기은이나 인종과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의 치병에 무격을 동원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충숙왕비 明德太后 洪氏도 한때 무녀를 자신의 후궁에 출입시키면서 믿고 따랐으며,0383)≪高麗史≫권 89, 列傳 2, 明德太后 洪氏. 공양왕도 즉위 이래 무교의례를 자주 베풀었다.0384)≪高麗史≫권 119, 列傳 32, 鄭道傳에 수록된 정도전의 상소.

 뿐만 아니라 지배층에서도 무격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무신집권세력이었던 李義旼이나 金俊도 무격을 혹신했는데, 이의민은 집안에 신당을 둘 정도였으며,0385)≪高麗史≫권 128, 列傳 41, 李義旼. 김준은 鷂房이란 무녀의 점괘에 따라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다고 한다.0386)≪高麗史≫권 130, 列傳 43, 金俊. 이의민과 김준은 무신정권의 한 시기를 대표하던 집정무인이었지만, 권력기반이 확고하지 못했던 편이다. 따라서 이들의 무격신앙은 자기의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데서 오는 심리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격에 대한 믿음은 무신들뿐만 아니라 문신들 사이에서도 퍼져 있었으니, 충렬왕 때 鄭可臣은 과거출신 관료임에도 불구하고, 무격의 말을 믿고 왕을 권하여 나주 금성산신을 정령공에 봉하게 하고, 매년 나주의 祿米 5석을 금성산 신당에 바치게 했다.0387)≪高麗史≫권 105, 列傳 18, 鄭可臣.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이 이러하였으니, 피지배층에서는 巫敎가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규보가<노무편>에서 이웃 노무의 집에는 “남녀가 구름같이 몰려들어 문 앞에는 신발이 가득하고, 어깨를 비비며 문을 나오고 머리를 맞대고 들어가는구나”라고 한 것은 당시 巫風이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조상의 혼령을 무격의 집에 모셔 놓고 재물과 紙錢으로 제사를 지내는 풍습까지 있었으니, 이것이 조선 초기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衛護라는 풍습이다.0388) 衛護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金 鐸,<朝鮮前期의 傳統信仰-衛護와 忌晨祭를 중심으로->(≪宗敎硏究≫6, 韓國宗敎學會, 1990), 46∼55쪽.

 여기에다 영험있는 강신무가 출현했다 하면 무교에 대한 신앙은 더욱 증폭되었다. 예컨대 충렬왕 때에는 空唱巫女 세 사람이 복화술 등 신이한 행적을 보이면서 陜州를 비롯한 여러 군현을 다니자, 사람들이 다투어 나아가 제를 올렸고 지방수령들까지 동참했다고 한다.0389)≪高麗史≫권 105, 列傳 18, 安珦. 역시 충렬왕 때 금성산 신당 무녀가 신령의 말이라 하면서 공윤구라는 사람과 원나라로 간다고 하니, 나주에서는 역마를 내주었고, 조정에서는 무녀 일행을 영접할 일을 논의했으며, 그들이 지나가는 주현의 수령들은 공복을 입고 교외까지 나와 맞이하는 일도 있었다.0390)≪高麗史≫권 106, 列傳 19, 沈言昜. 또 공민왕 때에는 提州에서 온 무당이 스스로를 天帝釋이라 하면서 사람들의 화복을 예언하니, 원근의 사람들이 서로 뒤질 새라 받드는 바람에 재물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天壽寺에 이르러서는 “내가 서울로 들어가면 풍년이 들고 전쟁이 멈추어 나라가 태평할 것이다. 만약 임금이 나와서 나를 맞이하지 않으면 하늘로 올라가 버리겠다”고 하니 개경사람들이 모두 혹하여 귀의함이 시장과 같았던 일도 있었다0391)≪高麗史≫권 114, 列傳 27, 李承老 附 云牧.

 이렇듯 고려 후기에는 한 지역에 머물면서 무업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험을 앞세워 여러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무격들이 출현했고, 이들은 광범위한 계층으로부터 대중적 지지와 열광적 신앙을 수렴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고려는 안으로는 권문세가의 발호로 말미암아 사회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고, 밖으로는 원의 압제에다가 거듭되는 외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그 결과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지만, 정상적 방법으로는 헤어날 길이 없었다. 따라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초월적인 힘에 기대는 방법이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로부터 현세구복적 무교에 대한 열광적인 신앙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