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 과학과 기술
  • 1) 천문학
  • (2) 관측활동과 그 기록들

(2) 관측활동과 그 기록들

 서운관의 가장 주요한 업무 중의 하나는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일이다. 天象 즉 하늘의 현상은 천체의 운행과 천체의 변화, 기상의 변화 등에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해와 달의 운행과 그 변화, 5행성의 운행 및 혜성과 신성의 출현은 특히 중요시되었다.≪高麗史≫天文志와 五行志에는 그 관측결과가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들은 당시의 천문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점성술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근거가 되는 천문현상과 관측결과의 기록은 과학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서운관의 관측활동은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했으며, 정해진 제도에 따라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관측활동은 잘 훈련된 전문직 관리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규정에 따라 관측일지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나타나는 수준 높은 관측제도와 활동은 고려 후기 서운관에서 그 틀이 잡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기록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항성의 위치에 대한 관측이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몇 번이나 관측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고려사≫에 伍允孚가 천문도를 작성했다는0413)≪高麗史≫권 122, 列傳 35, 伍允孚.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항성에 대한 관측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천문도는 고려 후기에도 활용되고 있었던 고구려 천문도의 인본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조선 초기 태조 때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천문도는 1,400여 개의 별의 상대적 위치가 정확히 나타나 있다. 오윤부는 이 천문도를 참고했을 것이 확실하므로, 그의 천문도는 이보다 못한 것이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 천문도가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지만, 기록에는 그것을 알 수 있을 만한 설명이 없다. 그런데 오윤부는 충렬왕 때의 학자이다. 그의 천문도 제작은 서운관의 창설과 함께 활발해졌던 관측활동과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천문지에는 132회에 이르는 일식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고려시대의 일식관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중 13회는 날씨가 흐려서 관측하지 못했다는 기사도 있다. 일식의 추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기사인 것이다. 그러나 그 추산은 완벽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일식 추산을 잘못해서 처벌되거나, 혼란이 있었다는 기사가 6회나 눈에 뜨인다. 이것은 역법계산이 완벽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착오이다. 이러한 역법계산의 약점은 후기에 이르면서 현저히 개선되고 추산도 정확해지고 있다. 아무튼 고려의 관측기록은 중세 과학사상 이슬람천문학의 관측기록에 필적할 만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월식도 일식과 마찬가지로 활발하고 정확하게 관측되었다.

 혜성과 客星도 열심히 관측되었다. 고려 천문학자들과 관측자들은 고려 말까지 객성 20회, 혜성(彗·孛星) 67회 합계 87회의 관측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원종 5년(1264) 7월 2일(갑술)에 나타나서 9월 14일(을유)에 소멸되기까지 72일간에 걸친 관측기록이 있다. 이 혜성은 길이가 7∼8척이나 되는 것이었다. 또 공민왕 23년(1374) 2월 26일(무술)에 동쪽에 나타났다가 45일 만에 소멸된 길이 1丈이 넘는 대혜성에 대한 기록도 있다.0414)≪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5년 7월 갑술 및 권 44, 世家 44, 공민왕 23년 2월 무술.

 태양 흑점의 관측기록은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끈다. 日中黑子로 표현된 이 기록들은≪고려사≫천문지에 “의종 5년(1151) 3월 2일 태양에 흑자가 있는데 그 크기는 계란만 하다”는 기록을 비롯한 34회의 관측기록들이 현종 15년(1024)부터 우왕 9년(1383)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관측은 관측활동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시기에는 8년에서 20년을 주기로 해서 그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의종 5년에서 충렬왕 4년(1278) 8월 사이에 나타나는 주기성이 그 좋은 보기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주기의 평균치인 7.3년∼17.1년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태양 흑점의 관측기록에서, 신종 3년(1200)부터 7년 사이의 4년 동안 매년 보고되고 있는 것은 특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것은 고려의 천문관측관리들이 면밀한 관측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좋은 보기가 된다. 또 이렇게 흑점이 계속 크게 나타나는 동안 기상이 매우 고르지 못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고 고려 천문관측자들이 태양 흑점의 출현과 자연현상을 연결시켜 이론적인 설명을 한 흔적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 현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한 災異觀과 자연관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기록들은 태양 흑점과 이상기후 현상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좋은 자료임에 틀림없다.

 행성의 운동을 관측한 기록들도 많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5행성과 태양과 달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5행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 그리고 행성과 항성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두드러진 것으로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이 있다.

 이러한 천체관측과 함께 기상관측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것들은 주로 자연현상에서 비정상으로 관측되는 것들을 이변으로 기록하였다. 햇무리와 달무리를 그 상태에 따라서 종류별로 분류하여 기록하였다. 강우현상과 강설현상, 폭풍과 태풍, 기온의 급격한 변화와 이상기온 등이 주의 깊게 관측되었다. 지진도 관측기록되었는데, 보통 것을 지진이라고 했고 강한 것을 大震이라고 구분했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기상현상도 모두 천문현상으로 천문관서에서 관측하였고, 함께 기록하였다.

 기상관측에서 강수현상의 관측은 고려 후기의 기록에서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수량적인 측정치가 나타나고 있다. 신라시대의 기록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서 그 시작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평지에서의 물의 깊이라는 방식의 측정치가 그것이다. 이것은 겨울에 적설량을 눈이 쌓인 높이를 재서 나타내는 것과 같은 식이다. ≪고려사≫오행지에 기록된 고종 12년(1225) 5월 정축일의 강우량에 관한 기사는 그 한 보기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큰 비가 이틀 동안이나 왔는데 평지에서의 물의 깊이가 7∼8자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편적인 기록이기는 하지만, 강우량을 자를 써서 수량적으로 측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기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것은 고려의 천문관서에서 농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강수량을 수량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천문·기상관측은 후기에 내려오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기록도 충실해지고 있다. 관측천문학의 발달은 고려 후기 천문학의 주요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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