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 과학과 기술
  • 1) 천문학
  • (3) 역법의 정비

(3) 역법의 정비

 曆法은 고려 초부터 독자적으로 발달하였다. 고려의 역학자들은 중국의 역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역 계산을 하게 된 것이다. 몇 차례 틀려서 처벌되는 일도 있었지만, 일식과 월식의 예보가 가능해졌고, 독자적인 일진을 표시하게도 되었다.

 고종 5년에 金德明이 새로 편찬한≪高麗師星曜書≫와≪高麗日曆≫등은 그 역서의 이름이 나타내듯 고려의 독자적인 역 계산으로 이루어진 역서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역서는 전해지지 않고 그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충렬왕 6년 중국에서는 원의 郭守敬이 만든 授時曆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원의 세조는 충렬왕 7년 고려에 수시력을 보내어 채용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역법이며, 중국 천문학 최고의 성과라고 평가되는 훌륭한 역법이다. 고려의 역학자들이 수시력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당연했다. 당의 宣明曆 이후 중국에서의 여러 번 개력에도 불구하고 선명력을 몇 백년이나 그대로 이어서 역법을 세운 고려 역학자들에게 수시력의 출현은 커다란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그것을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고려의 독자적 역법이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에서는 崔誠之를 원에 보내어 수시력을 배워 오게 했다. 또 충렬왕 24년에는 세자(후에 충선왕)가 원에 가서 수시력법을 직접 보고, 그것을 전습케 하려고 書雲正으로 있던 천문학자 姜保에게 그 계산법을 배우게 했다. 강보는 수시력의 계산에 통달하게 되었고, 그 역법의 요약 또는 주석서라고 할 수 있는 계산표를 만들어≪授時曆捷法立成≫을 편찬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충선왕대(1309∼1313)에 수시력을 바탕으로 한 새 역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시행한 역법에서는 수시력법의 일부만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문헌들에 의하면, 고려의 천문관리들은 수시력의 開方術을 완전히 익히지 못해서 日月交食의 추산법을 몰라 어쩔 수 없이 선명력의 옛 방법에 의하여 그대로 추보하니 일월식의 추산에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강보의≪수시력첩법입성≫이 충목왕 2년(1346)에 간행되었지만, 그것으로 수시력의 모든 것이 고려 천문·역학자들에게 전수되지는 못한 것 같다.≪수시력첩법입성≫은 수시력에 의하여 역서를 만들 때 필요한 방대한 계산을 쉽고 빠르게 해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수표이다. 강보는 이 계산을 해내기 위해서 필요한 수치와, 계산공식과 계산방법을 제시하고, 수표를 나열하였다.≪수시력첩법입성≫의 편찬으로 고려에서 역서를 만드는 관리들은 그 복잡하고 방대한 계산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 계산법도 쉽게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명에서 太史院使 劉基가 만든 大統曆으로 개력하자, 공민왕 19년(1370) 명에 사신으로 갔던 成准得이 돌아올 때 명 태조가 내린 대통력을 가져와서0415)≪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5월 갑인. 고려도 그것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통력은 원의 至元을 曆元으로 하는 수시력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달력의 이름만 바꾼 것이다. 고려는 형식상 개력을 해서 대통력으로 역서를 만든다고 했을 뿐, 역법의 계산은 전에 하던 방식대로 하였다. 그래서 수시력 시행 이후 있었던 역법의 문제점은 사실상 그대로 이어져, 완전히 가셔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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