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 과학과 기술
  • 5) 그 밖의 산업기술
  • (3) 금속공예기술

(3) 금속공예기술

 고려의 금속공예기술은 신라 금속기술의 전통을 이어 높은 수준에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여러 불상과 범종, 그리고 향로들을 들 수 있다. 고려 초기의 청동주조기술은 天興寺 종과 曹溪寺 동종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높이 1.55m의 금동대탑(호암미술관 소장)은 고려 초기 청동주조기술의 높은 수준을 말해주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에서는 훌륭한 청동향로를 많이 만들어 냈다. 그 가운데 현존하는 유물로 명종 7년(1177)에 부어만든 表忠寺 靑銅含銀香垸(높이 27.5㎝, 구경 26.1㎝), 그 다음해에 제작되어 일본에 건너가 法隆寺에 수장된 金山寺香爐 등은 그 간결하고 균형있는 모양과 은상감의 우아한 문양으로 특히 유명하다. 또한 고종 원년에 만들어져 乾鳳寺에 있던 청동제은상감향로(높이 30㎝, 지름 30㎝), 충혜왕 후5년(1344)에 만든 奉恩寺소장 청동제縷銀향로(높이 33.9㎝, 지름 31.8㎝)와 충목왕 2년(1346)에 만든 청동제은입사향완(이병직 소장, 높이 28.8㎝) 등은 고려청동향로의 대표적 작품들로서 그 주조기술과 공예기술은 매우 우수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수없이 많이 만들어져 지금 남아 있는 유물도 상당한 수에 달하는 고려청동거울의 주조기술은 그렇게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청동거울은 그 뒷면의 문양디자인에서 고려장인의 소박하면서 아름다운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청동의 재질이 좋지 못하고 부어만들어 낸 디자인의 섬세함에서 처지는 것은, 고려청동거울의 대량생산에서 오는 제품의 질적 저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청동거울이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발전이었다.

 이것은 청동식기류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서민들에게도 크게 보급되어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과도 이어진다.≪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 6년 9월에 청동으로 만든 식기류를 민간에서 많이 사용하기를 장려하는데 왕이 동의한 기사가 보인다. 이것은 금속제 식기가 크게 보급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인이 놋그릇을 즐겨 쓰게 된 것은 이 무렵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식기와 수저로 놋그릇을 많이 쓰는 민족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인뿐이다. 그러한 한국인의 전통은 고려의 금속기술과 이어지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몇 가지 청동식기류를 분석해 보면 구리와 주석만으로 된 동합금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합금의 비율은 구리와 주석이 75:25와 80:20의 비율로 나타나는 담황동이다. 이런 동합금을 한국인은 흔히 놋 또는 놋쇠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이런 동합금을 高麗銅이라고 해서 질이 좋은 청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고려사≫에 의하면 원종 3년(1262) 9월에 몽고에서 사신이 와서 好銅을 구한 일이 있었는데, 赤銅을 뜻하는 것인지 물었더니 鍮石이라고 대답하기에 적동 6백여 근을 주고 유석은 고려에서 산출되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한다.

 고려시대에는 동합금을 만드는 기술직으로 鍮器匠·赤銅匠·銅器匠·白銅匠 등이 있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일하고 있었던 이들 전문장인들은 동합금의 성분과 조성을 적절히 맞춰서 질이 좋은 금속기를 만들어 냈다. 구리와 주석에 납과 아연을 적절하게 합금했을 때 이루어지는 동합금의 금속조직의 특성을 잘 살려 전문기술직으로 분업화한 것은 특히 돋보이는 것이다.≪고려사≫에 의하면 인종 2년(1124)에 고려사신이 송나라에 바친 물건 중에 白銅器가 끼어 있다. 백통은 구리와 니켈의 합금인데, 때로는 구리와 비소를 섞어서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분석된 고려의 청동기 중에는 비소 대신에 안티몬을 섞은 것도 있다. 유기·적동·백통 등의 동합금이≪고려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전문장인의 명칭과 함께 고려에서 실제로 만들어지고 있던 동합금제품의 다양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려 금속기술의 높은 수준과도 이어지는 것이다.0429) 全相運,<韓國 古代金屬技術의 科學史的 硏究>(≪傳統科學≫ 1-1, 1979) 참조.

 고려의 금속기술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유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몇 개의 거대한 철제불상을 꼽을 수 있다. 이 무쇠불상들은 모두 높이가 1.5m 이상이고 2.5m가 넘는 것도 있다. 이런 철제불상이 지금 국내에 50구 가량 남아 있다. 거의가 다 고려 때 부어만들어진 것이다. 고려 때 이렇게 많은 철제불상을 만들게 된 것은 구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철제불상은 철을 부어내는(鑄造) 높은 금속기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이것은 철의 주조기술의 발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고려 때에는 제철기술의 혁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오랜 금속기술의 전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철제불상은 청동불상만큼 섬세하게 부어만들 수는 없었으나, 무쇠가 가지는 독특한 질감과 소박함이 또 다른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나타낸다. 그러한 금속기술은 중국 이외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가지지 못했던 고도의 주조기술이었다. 성종 15년(996)에 철전을 주조하여 사용하게 되었다는≪고려사≫의 기사는, 고려의 철을 부어만드는 기술을 말하는 좋은 보기가 된다. 고려기술자들은 거푸집으로 쇠를 부어 규격화된 작은 무쇠제품인 철전을 만들어 내는 높은 기술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금속기술의 수준은 고려 후기의 청동활자의 주조와 화포의 주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사업은 높은 금속주조기술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4세기 후반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화포를 부어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은, 금속기술과 관련된 산업기술에 있어서도 그만한 기반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려 후기의 금속기술은 이러한 측면에서도 재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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