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2. 문자와 언어
  • 2) 언어

2) 언어

 고려 후기는 고려가 몽고(원)와 힘을 겨루면서 민족적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 시대에 해당한다. 고려는 13세기에 접어들면서 강성해진 몽고로부터 노골적인 압박을 받아 오다가 마침내는 그 침입으로 말미암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는 등 피어린 항쟁을 벌였다. 결국 몽고에 져서 80여 년간 몽고의 간섭을 견뎌야 하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따라서 고려사회 전반에 미친 몽고의 영향은 크나큰 것이었다.

 원의 전성기에는 고려의 태자는 원의 서울인 북경에 머물러 있었고 임금이 승하하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그 원나라 부인을 데리고 새로이 임금이 되어 개경으로 부임하는 것이 관례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 무렵 고려의 임금은 모두 忠자로 시작되는 원의 諡號를 받았는데 25대 충렬왕으로부터 30대 충정왕, 그리고 31대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7명에 이르는 임금이 모두 원나라 서울에 인질로 잡혀가 살다가 몽고말에 능숙한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들 가운데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공민왕 다섯 왕은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13·4세기에 고려의 언어가 몽고어를 새로운 외래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어사의 관점에서 보면 국어어휘가 고유어와 한자어라는 이중체계를 유지하다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몽고어를 외래어로 받아들임으로써 드디어 국어어휘가 고유어·한자어·외래어의 삼중체계를 확립한 시기가 되는 것이다.

 임금이나 태자가 원나라 왕실에 머물러 살았다는 것은 왕족 한두 사람의 몽고어 습득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딸려 있는 많은 수행인이 함께 생활하였을 것이요, 거기에 호종하는 귀족 및 지식인의 활동도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람으로는 元卿과 李齊賢을 손꼽을 수 있다.≪高麗史≫列傳에 의하면 원경은 성품이 호쾌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어려서부터 몽고어를 배워 여러 번 충렬왕 및 공주를 따라 원에 가서 살면서 원 世祖의 총애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세조는 항상 그를 ‘나린 가라(narin gara, 納麟哈剌)’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며 귀여워하였는데 사람을 대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상하고 민첩하기 때문에 ‘나린’이라 하였고 검은 수염이 윤기있고 아름다워 ‘가라’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0444)≪高麗史≫권 124, 列傳 37, 元卿. 이 ‘나린 가라’를 우리말로 바꾸면 ‘민첩하고 귀여운 검은 수염쯤’ 되겠는데 직역하면 ‘민첩한 까망’이다. 이러한 낱말이≪고려사≫에 기록될 정도라면 고려사회에 몽고어가 얼마나 큰 세력으로 유행하였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이제현(1287∼1367)은 고려 말의 문인학자로 그의 저서≪益齋亂藁≫·≪益齋集≫·≪櫟翁稗說≫등은 고려 말의 문학과 제반 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책들이다. 그가 원나라 서울에서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한 것은 그의 몽고어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는 충숙왕 원년(1314)에 원에 머물러 있던 충선왕이 萬卷堂을 세우고 그를 부르자, 그 곳 燕京(지금의 북경)에 가서 원의 姚燧閻·趙孟頫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 후기의 사회·문화적 제반 분위기로 보아 상당량의 몽고어가 유행어의 성격을 띠고 통용되었을 것이나, 그것들이 그 당시의 문헌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편찬된≪高麗史≫·≪龍飛御天歌≫·≪飜譯朴通事≫·≪訓蒙字會≫등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을 뿐이다. 이들 몽고어로부터 들어온 외래어들은 흥미롭게도 특정한 어휘영역에 몰려 있다. 그것들은 주로 말·매 및 군사에 관련된 용어들이다. 전통적인 문화사회의 용어들은 몽고사회에서도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였을 것이므로, 몽고어로서 고려사회에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유목민족 특유의 물질문화 요소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것은 말·매를 중심으로 한 군사용어에 집중되었다. 물론 이들 어휘는 현대국어에서는 실용성을 상실하고 대부분 死語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고려 후기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증거어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 시기 몽고외래어로 확인된 어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0445) 이 분야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성과는 李基文,≪國語 語彙史 硏究≫(東亞出版社, 1991) 제9장에서 제13장에 집중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첫째 말(馬)과 관계되는 어휘

① 가라()

검은 색 말을 뜻하는 낱말이다.≪譯語類解≫에 ‘黑馬 가라’(下 28)이라 되어 있고≪飜譯朴通事≫에 五明馬를 ‘가라간져죡앳’(上 27)이라 되어 있다. 몽고어 gara가 일반적으로 黑을 뜻하나 국어에서는 오직 말종류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이 몽고어로부터의 차용임을 증명한다.

② 간쟈(), 간져()

흰줄박이 말(玉面馬)을 뜻하는 낱말이다.≪老乞大諺解≫에는 破臉馬를 간쟈(下 8)이라 하였고,≪譯語類解≫에는 線臉馬(뺨에 흰줄이 있는 말)(補編 48)라 하였다.≪飜譯朴通事≫에는 ‘가라간져죡앳’이라 하여 ‘간져’로 표기되었다. 몽고어 galǰan은 ‘말 앞머리의 흰줄무늬’를 가리키는데 이 낱말의 차용으로 생각된다.

③ 고라()

누른색 말을 뜻하는 낱말이다.≪譯語類解≫에 ‘黃馬 고라’(下 28)이라 하였고≪飜譯朴通事≫에는 土黃馬를 ‘고라’이라 하였다. 몽고어 gula ‘누른 색’에서 차용된 것이다.

④ 구렁()

밤색 말을 뜻하는 낱말이다.≪老乞大諺解≫에는 ‘구렁 栗色馬’(下 8)라 하였고,≪飜譯朴通事≫에는 栗色白臉馬를 ‘구렁쟘불’(上 63)이라 하였다. 몽고어 küreng은 짙은 갈색을 가리킨다.

⑤ 아질게()

애기 말(兒馬)을 뜻하는 낱말이다.≪訓蒙字會≫ 馬字註에 ‘兒馬 아질게’(上 19)이라 되어 있고,≪蒙語類解≫에는 ‘兒馬 수, 아질가 모리’(下 30)라는 기록이 보인다. 몽고문어 ảjirγ-a(兒馬)에서 차용하였을 것이다.

⑥ 졀다()

붉은 색 말을 가리키는 낱말이다.≪飜譯朴通事≫에는 ‘赤馬 졀다(上 42·63)’이라 하였고≪老乞大諺解≫에도 ‘赤馬 졀다’(下 8)이라 되었다. 중세 몽고어 jẻerde(赤馬)에서 차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⑦ 공골()

누른 색 말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17세기 이후의 문헌인≪老乞大諺解≫(下 8),≪漢淸文鑑≫(14·22)≪譯語類解≫(下 28) 등에 ‘黃馬 공골’ 또는 ‘土黃馬 공골’로 표기되었고 16세기 문헌으로는≪飜譯老乞大≫(下 8)에만 보인다. 고라()과의 색깔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문헌에 구별하여 설명된 것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몽고문어에는 gongγor로 나타나고≪元朝秘史≫에는 gongqor로 나타난다.

⑧ 셜아()

은갈색이 도는 흰 말을 가리키는 낱말이다.≪老乞大諺解≫(下 8),≪譯語類解≫(下 28),≪飜譯老乞大≫(下 9)에 모두 “셜아”이라 적혀 있다. 중세몽고어 sirγa에서 온 단어라 생각된다.≪飜譯老乞大≫(下 9)에는 ‘白馬’를 ‘셜아’이라 하였으나 순수한 백마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譯語類解≫(下 28)에 銀褐馬를 ‘셜아’이라 했고 백마는 ‘셜아’이라 하였음을 보아 그것들이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⑨ 가리운()

말갈기 색깔이 검은 말을 가리키는 낱말이다.≪老乞大諺解≫(下 8)와≪譯語類解≫(下 28)에는 ‘가리운 ’이라 되어 있고≪漢淸文鑑≫(14·22)에는 ‘가리온춍이’(黑鬃靑馬)이라 되어 있어 17, 18세기에 ‘가리온’과 ‘가리운’의 두 형태가 있었음을 보인다. 몽고문어의 qaliγun, 중세몽고어의 qali’un에서 차용한 것이라 믿어진다.

⑩ 부루()

은회색 말을 가리키는 낱말이다.≪譯語類解≫(下 28)·≪同文類解≫(下 37)에 ‘江紗馬 부루’이라 보인다. 몽고문어의 buγural∼buγurul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⑪ 녹대

이 낱말은 현대 제주도 방언으로 굴레(마소의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어 매는 줄)를 가리킨다.≪蒙語類解≫(下 15)에는 ‘籠頭 바구레 ○녹토 一云 두룹치’라 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몽고문어의 noγto와 dörübči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 낱말 ‘녹대’는 바로 몽고문어 noγto의 차용이라 생각된다.

⑫ 가달

이것 역시 현대 제주도 방언에서 재갈[鐵銜]을 뜻하는 낱말인데 단독으로는 쓰이지 않고 ‘가달석’(가운데로 꼬부려 접고 양끝을 馬銜에 접어 매고서 말 위에 타 앉을 때에 말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는 데 쓰는 고삐줄)이라는 낱말 속에 남아 있다.≪元朝秘史≫와≪華夷譯語≫에 qada’ar(轡頭)이 있으므로 이 낱말의 차용이라 생각된다.

 이상으로 말(馬)과 관련된 낱말 12개가 국어의 어휘자산으로 고려 후기 이래 오늘날까지 그 잔영을 남기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들 낱말은 거의 전부 현대국어에서는 생명을 잃었으나 고려 후기에서 조선왕조에 걸쳐서는 중요한 낱말로 활용되었다.

 둘째 매(鷹鶻)와 관계되는 어휘

⑬ 갈지게

누른 색 매를 가리키는 낱말이다.≪訓蒙字會≫에 ‘黃鷹 갈지게’(上 15)라 되어 있고≪譯語類解≫에도 ‘黃鷹 갈지게’(下 25)라 되어 있다. 중세몽고어 qarčiγai에서 온 것이다.

⑭ 나친

‘나친이’라는 낱말로 큰 매의 일종이다.≪訓蒙字會≫에는 ‘나친曰鴉鶻’(上 15)이라 되어 있고≪譯語類解≫에는 ‘鴉鶻 나친이’(下 25)라 되어 있다. 몽고문어에 način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 이 낱말은 터키어의 lačin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⑮ 도롱태

새매의 한 가지를 가리킨다.≪金剛經三家解≫에 ‘愮字 도롱태라’(4, 34)라는 구절이 있고≪南明集諺解≫에 ‘도롱태(愮子)(上 6)가 나오며≪訓蒙字會≫에도 愮 도롱태숑’(上 15)이라 적혀 있다.≪元朝秘史≫와≪華夷譯語≫에 모두 turimtai로 되어 있고 몽고문어에는 turimtai, turumtai, durimtai의 세 가지로 나타난다.

(16) 보라(매)

가슴털이 보라색을 띤 매의 일종이다.≪訓蒙字會≫에 ‘秋鷹 보라매’(上 15)가 있고≪譯語類解≫(下 25),≪同文類解≫(下 24)≪漢淸文鑑≫(13, 50) 등에도 모두 ‘秋鷹 보라매’라 되어 있다. 여기의 ‘보라’는 중세몽고어 boro에서 온 것이다. 현대국어에서 ‘보라 색’의 ‘보라’는 바로 이 낱말이다. 아마도 몽고외래어에서 현대에까지 살아 남아 있는 낱말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17) 숑골

흔히 우리 時調에 ‘숑골매’로 나타나는 매의 일종이다.≪訓蒙字會≫에는 ‘海靑숑골’(下 15)이라 되어 있고≪新增類合≫에는 ‘鶻 숑고리 골’(上 12)이라 적혀 있다. 몽고문어에는 šingqor와 šongqor의 두 가지가 나오고≪元朝秘史≫에는 šinŋqor이라 보인다.

(18) 익더귀

토기사냥을 잘하는 매라하여 兎鶻이라고도 하는 매의 일종이다.≪訓蒙字會≫(上 15)·≪譯語類解≫(下 25)·≪漢淸文鑑≫(13, 50)에 모두 ‘兎鶻 익더귀’라 되어 있다. 몽고문어의 itelgü에서 온 것일 터인데 형태상의 변형이 일어났음을 보인다.

(19) 튀곤

누른 빛 도는 흰빛 매를 가리키는 낱말이다.≪訓蒙字會≫(上 15)와≪譯語類解≫(下 25) 에 모두 ‘白黃鷹 튀곤’으로 나타난다. 몽고문어의 tuiγun에 대응하는 것이다.

 위에 논의한 7개의 매 이름 이외에도 한글문헌에는 찾아볼 수 없으나≪新增鷹鶻方≫ 및≪世宗實錄≫에는 ‘照骨, 結外’ 등이 더 나온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조에 걸쳐 매사냥이 얼마나 중요한 생활의 일부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셋째 군사용어에 속하는 어휘

(20) 고도리

화살촉을 가리키는 낱말이다.≪訓蒙字會≫(中 29)에 骨業·髇·骲의 새김말로 나타나는데≪蒙語類解≫(上 36)에 ‘撲頭 고도리 ○고도리’라 되어 있어 몽고차용어임을 알 수 있다. 몽고문어에 γodoli로 나오고≪元朝秘史≫에 qodoli가 보인다.

(21) 바오달

군대 幕舍, 軍營을 가리키는 낱말이다.≪訓蒙字會≫(中 8)에 ‘營 바오달영’이라 되어 있고 ‘바오달 티다(下營)’, ‘바오달 터 營盤’ 등의 예를 들고 있다. 몽고문어에 baγudal이 있고 중세몽고어 형태는 ba’udal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바톨

勇士라는 뜻의 낱말이다.≪龍飛御天歌≫에 아기바톨[阿其拔都]이란 사람이름이 나오고 그 註記에 ‘아기는 우리말의 어린 아이를 가리키고 바톨은 몽고어로 용감하여 맞설 자가 없는 이를 가리킨다’고 되어 있다.≪元朝秘史≫에 ba’atur,≪華夷譯語≫에 ba’atur이 보이는데 모두 勇士의 뜻이다.

(23) 오뇌·오

활가락지를 가리킨다.≪楞嚴經諺解≫(9, 20)에는 ‘括 삸오뇌라’라고 되어 있고≪訓蒙字會≫(中 28)에는 ‘彄 활오 구’라 되어 있다. 몽고문어에 onu, oni의 두 형태가 있다.

(24) 텰릭

武官의 군복을 가리킨다. 후대에 ‘天翼’으로도 적히고 중국어로 ‘帖裏’라 적히기도 하였으나 몽고문어 terlig에 소급하는 낱말임이 분명하다.

 이 밖에도 몽고외래어로 고려 후기 이래 우리 나라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낱말은 더 있다. 궁중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진지 즉 御膳을 ‘수라’라 하는데 이것은 중세몽고어 “šülen(湯)”에서 유래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각종 관직명 내지는 工匠人 명칭에 사용되었던 “-色”(茶色·馬色·書房色·世子吉禮色 등)은 몽고문어 bičigeči(書史)에 소급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제주도 방언에서 작은 산을 “오름”이라 하는 것도 분명히 몽고어에 유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들은 고려 후기의 언어가 얼마나 많이 몽고어를 새로운 외래어로 받아들였는가 하는 사회현상을 반영한다. 또한 이렇게 받아들인 외래어는 표면적으로는 사라져버렸지만 그 앙금이 얼마나 오래도록 남아 있는가 하는 것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일어났던 몽고어의 유입은 국어어휘사에서 이렇게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물론 이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몽고어학습의 열풍이 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 21년(1295) 정월에는 원에서 蒙古字敎授가 개경에 파견되어 몽고어학습에 임한다. 또 충숙왕 11년(1324)에는 고려의 학자 安軸이 원의 制科에 급제하여 遼陽路 蓋州判官이 되는 등 고려사회가 몽고문화와 몽고의 생활풍습에 깊이 빠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원의 멸망과 함께 몽고어의 유행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몽고외래어와≪鄕藥救急方≫의 자료들은 13세기 중엽의 고려어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언어형태를 보여주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고 15세기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훈민정음이 창제된 다음에 기록된 것은 14세기 동안에 상당한 音韻變化를 입은 것으로 짐작되지만 자료가 없어 자세히 언급할 수 없음이 유감이다. 여기에서는 단지 된소리계열의 등장, 반치음 △의 형성, 音節末 자음의 內破化, ㅅ(s)음 앞에서의 ㄹ(l)탈락 등이 발생하였음을 언급하는 데 그치려 한다.

<沈在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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