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3. 문학
  • 2) 속악가사

2) 속악가사

 삼국시대에도 이미 그랬지만,≪고려사≫ 樂志에 소개되어 있는 고려의 악은 두 가지 점에서 예사 음악과 다르다. 국가에서 관장하며 궁중에서 전승하는 것만 포함되어 있다. “무릇 樂은 풍속의 교화를 이룩하고, 공덕을 나타낸다”고 한 데서 기능에 따라 그 범위를 한정한 취지가 잘 나타나 있다. 악은 음악 자체만이 아니고, 춤·놀이·말로 된 노래 등을 두루 포괄하는 복합체이다. 중세의 지배체제를 장식하는 국가적인 음악문화 복합체가 면면하게 전승되는 과정에서 高麗樂이 일정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성격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고려의 악은 雅樂·唐樂·俗樂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노랫말이 우리 문학인 속악에는<風入松>·<夜深詞>·<紫霞洞>처럼 노랫말이 한문으로 된 것도 있는데, 앞의 둘은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고≪고려사≫에 주석이 달려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풍입송>은 “海東天子는 지금의 帝佛이며, 하늘을 도와서 세상을 다스리려고 오셨다”고 서두에서부터 고려의 자주적인 기상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 자부심은 고려 전기의 한창 시절, 어쩌면 광종 때쯤에 어울리는 것이다.<야심사>는 임금과 신하가 화락하게 어울리는 즐거움을 다루었으니 이것은 또한 안정을 구가하는 태평성대의 모습이다. 맨 끝에 소개해 놓은<자하동>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기간 동안 부귀를 독점한 권문세족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잘 나타내는 노래로서 蔡洪哲이 지은 것이다. 시대변화의 추이에 따라 속악의 구성이 달라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고려사≫ 악지에 소개되어 있거나≪樂章歌詞≫·≪時用鄕樂譜≫ 등에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국문으로 된 속악가사, 그 가운데서도 조선조에 들어와서 이른바 男女相悅之詞라 하여 배격된 것들이 언제, 어떤 이유에서 채택되었으며, 그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데 있다. 이런 작품군을 속요 또는 高麗俗謠라고 해도 무방하겠으나, 그런 명칭은 예전에 쓰지 않던 것이고, 성격을 미리 규정짓는 결함이 있다고 지적되므로, 오랜 관습에 따라서 俗樂歌詞라고 일컬으며 논의를 계속해 보자.0447) 고려의 속악가사에 대한 주석은 梁柱東,≪麗謠箋注≫(乙酉文化社, 1947) 및 朴炳采,≪高麗歌謠釋 硏究≫(宣明文化社, 1968)에서, 연구는 국어국문학회,≪高麗歌謠硏究≫(正音社, 1979) 및 金烈圭 外 編,≪高麗時代의 歌謠文學≫(새문사, 1981) 등에서 다루었다.
조규익,≪高麗俗樂歌詞·景幾體歌·鮮初樂章≫(한샘출판, 1993)은 근래 연구사와 작품이해를 재정리한 글이다.
삼국에서 물려받은 것과 한문으로 된 것은 편의상 함께 거론하지 않으면서 고려 속악가사의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 속악가사는 궁중의 악곡이고 잔치를 벌인다든가 하는 기회에 唐樂呈才와 대칭되는 속악정재를 공연하면서 불렀다. 당악정재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기품은 버리다시피 했고, 남녀의 사랑을 숨김없이 다룬 것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그 가운데는 창작된 것도 있으리라고 생각되며,<雙花店>을 한 예로 들 수 있으나, 이런 작품마저도 왕조의 위엄이나 상층문화로서의 품격을 지니지 않고 있으며, 음란한 내용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임금의 안녕을 송축한다고 하는 노래라도 그런 명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지니고 있어서 주목된다. 궁중의 속악 또는 향악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고려 속악가사는 앞뒤의 어느 시기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노래는 고려 후기에 채택되었을 것 같다. 고려 전기에 애써 이룩한 왕조의 위엄이나 이념적 질서가 무신란과 몽고란을 겪고 나서 무너지자, 속악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일어났을 것 같다. 특히 원이 간섭하던 기간 동안에는 국왕이 부귀에 탐닉하는 무리인 권문세족과 어울려 오랜 관례와 어긋나는 흥미거리를 찾았다. 그것을 위해 원나라 놀이도 가져오고 창작도 했지만, 궁중과 민간 양쪽을 왕래하는 악공·기녀 등을 매개로 해서 민간전승인 놀이나 노래 중에서 필요한 것을 받아들여 개조하는 것이 새로운 소재를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채택된 속악가사는 지배체제의 이념적 긴장이 와해된 모습을 너무나도 잘 나타내주기에 조선이 건국되자 비판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속악가사는 그 원천을 따진다면 하층문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민요의 모습을 적지 않게 지니고 있지만, 일단 그 시대 특유의 상층문화로 변모되고 속악정재의 공연방식에 따라서 개편되었으므로,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작품의 편차나 표현에서부터 그 점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가령<動動>이나<鄭石歌>는 임금에게 아뢰며 축복하는 사설로 만들기 위해 처음 한 章이 덧보태졌을 듯하다.<滿殿春別詞>에서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노래의 구성에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사설들을 모아 노래 한 편을 만든 것처럼 보이는 작품도 있다. 그런가 하면,<靑山別曲> 같은 것은 원래 일정한 餘音을 되풀이하며 사설은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었을 터인데, 여덟 장으로 고정시켰다. 음란한 놀이에 어울리는 말이 많은 것도 민요의 실상을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그 점은 이제현의<小樂府>와 비교해 보더라도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속악가사에 민요계통의 노래가 대폭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은 국왕이나 권문세족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랬던 간에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차례와 표현을 고치는 데 한계가 있었고, 남녀상열지사로 음란한 놀이를 벌이고자 했어도 향락추구와는 무관한 생활 자체의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노래를 아주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으며, 민중의 어려운 처지를 하소연한 사연을 다 제거할 수도 없었다. 형식만 하더라도, 章 또는 聯이 나누어져 있고 그 사이에 여음이 끼어들며, 대체로 보아 세 토막씩으로 짜여져 있는 노래는 민간전승의 저류에 머무르고 있다가 그 때 비로소 표면으로 부상해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장 또는 연이 나누어져 있고, 여음이 개재하는 형식은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이며, 한 사람이 사설을 맡고 다른 사람 여럿이 또는 혼자 여음을 되풀이하거나 사설을 여럿이서 돌림노래로 부르는 데 소용되는 것이다. 향가시대에는 그 존재마저 확인되지 않던 이런 형식은 당악정재에 자극을 받아 만들어진 속악정재의 음악적 구성에 적합하기에 대거 채택되었을 것이다. 景幾體歌에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형식이 보이는 것은 음악적 요건이 서로 상통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處容歌>는≪고려사≫ 악지에 신라 때 생긴 것이라고 밝혔으면서도 삼국 속악에다 넣지 않고 고려속악이라고 했다. 오래 전승하는 동안에 원래의 모습과는 달라졌기에 그렇게 취급하지 않았나 싶다. 신라 때의 원형도 노래만이 아니며 춤과 놀이까지 갖춘 복합체이고, 연극적인 요소도 적지 않게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려에 이르러서는 다면적 성격이 속악정재라는 것으로 일단 정리가 된 다음, 시대와 상황에 따른 변이를 보였다. 속악정재는 재래의 전승을 당악정재와 대응될 수 있게 다듬은 놀이이며, 궁중에서 요구하는 기풍에 맞는 짜임새를 갖추게 한 것이라고 다시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은 처용놀이가 민간연극의 발전과정과는 맞지 않게 격식화되도록 하는 구실을 했으리라고 보아 마땅하다.

 처용놀이는 예사 속악정재와는 다르게 굿으로서의 기능을 줄곧 지녀왔으며, <처용가>는 굿노래이다. 李穡이 재앙을 물리치는 놀이를 읊은 시<驅儺行>의 소재로 삼은 근거가 거기에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처용놀이를 섣달 그믐날 궁중에서 거행하는 儺禮의 한 절차로 제도화한 데서도 오랜 전통이 확인된다.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굿은 망국의 불안한 조짐을 재앙 또는 질병이라고 여기며 공연했었는데, 고려에 들어와서는 거기 상응하는 어떤 주제가 부각될 수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강화도로 피난을 간 조정에서 처용놀이를 하면서 몽고침략의 격퇴를 기원했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일단 주목하게 된다.

 ≪악장가사≫에 수록된 것을 보면, 노래의 형식은 장 또는 연의 구분이 보이지 않고 대체로 보아 한 줄이 네 토막인 것 같지만 줄을 나누기도 어려워 산만한 편이다. 무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민요에서도 기본형식의 하나일 수 있는 것이 일찍 표면화한 예라 하겠으며, 후대의 가사와 상통하는 데가 있다. 내용에 따라서 단락을 나눌 때는, 설명인가 대화인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첫 단락은 설명이다. 처용을 소개하고, 처용의 모습을 머리에서 발까지 차례로 묘사한 다음에, 감탄하고 찬양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발은 “界面 도샤” 넓어졌다고 했는데, 이 말은 단골들이 거주하는 자기 영역을 순회했다는 뜻이다. 둘째 단락은 처용이 하는 말이다. 누구누구를 불러서 신코를 빨리 매라고 했으니, 집으로 급히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다는 뜻으로 짐작되지만 확실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돌아갔을 때 벌어진 광경이 세째 단락에서 처용의 독백으로 나타나 있는데, 신라<처용가>에서도 볼 수 있던 것이다. 처용이 주저하고 있을 때, 넷째 단락에서는 “熱病神이 膾人가시로다” 하며 부추기는 말이 나온다. 처용이 열병신을 물리치는 巫神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렸다. 고민하는 모습이 아니고, 후덕하지도 않다. 그러나 처용 자신이 처음부터 능동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으며, 계속 찬양하고 부추긴 결과일 따름이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산이며 들이며, 천리 밖으로 처용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열병신의 발원이라고 해서, 재앙을 물리치는 일이 뜻하는 대로 성취된다고 선언했으나, 거기 이르기까지 서술자의 개입이 너무 많다.

 ≪고려사≫ 악지에는 속악을 기술하면서, 악기를 소개한 다음에<舞鼓>라는 것을 먼저 들었다.<무고>는 舞隊라는 무리가 춤을 추고, 악공이 악기를 연주하는 동안에 기녀들이<井邑詞>를 노래하는 놀이이다.<무고>는 놀이하는 절차를 보아 속악정재의 표준이 될 만하기에 먼저 소개한 듯한데, 놀이 이름과 노래 이름이 다른 점이 주목된다.<정읍사>는 백제에서 유래한 노래라고 했지만,<무고>라는 이름의 놀이는 원래부터 노래와 함께 전승되지 않았고, 고려 때에 생겼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래와 놀이의 관계를 두루 살피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두번째로 소개한 것이<동동>이다. 이 경우<동동>이 노래이자 놀이여서 둘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는 노래는<動動詞>라고 했고, 놀이는<動動之戱>라고 했다. 놀이를 하는 절차는<무고>의 경우와 대체로 같다고 하고서 설명을 덧붙였다.≪樂學軌範≫에는 더 자세한 해설과 함께 노래 본문까지 실어 놓았으므로, 그 쪽을 참고하면 세부적인 사항까지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나서서 춤을 추는 기녀 둘이<동동사> 起句를 선창하면, 다른 기녀 여럿이 나머지 대목을 받아 부른다고 한 점이 주목된다. 기구는 제1장으로 제2장 이하 12장까지와 부르는 방식이 달랐다.

德으란 곰예 받고  福으란 림예 받고

德이여 福이라 호   나라 오소이다

 아으 動動다리

 이런 말로 되어 있는 기구 또는 제1악장은 복이며 덕을 바친다면서 받는 이를 찬양한다.≪고려사≫ 악지에서는 설명이 일단 끝난 다음에 다시 주를 달아 “동동지희는 그 가사에 頌禱하는 말이 많으며, 대체로 仙語를 본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仙은 國仙이며, 화랑일 터이다. 무속과도 관련된 신라 화랑의 전통을 이은 국선이 팔관회 등을 거행할 때 임금의 덕과 복을 송축하는 관습이 이어졌다 하겠다. ‘곰’, ‘림’는 뒤와 앞을 뜻한다고도 하지만, 신령님과 임금님으로 보는 편이 더 적합하다. 신령님과 임금님께 덕이며 복을 바치러 나온다는 사연이 아닌가 싶다. 당악정재에서는 중국판 신선이 임금의 수명을 축수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령은 나라의 수호신이어서 먼저 일컬어지며 임금과 함께 숭앙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그 다음 제2장 이하는 정월에서 섣달까지 계절의 변화나 명절의 도래를 들고서, 그 때마다 님이 생각난다는 사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달이 바뀌는 데 따라서 장이 구분되는 달거리 형식을 택했다.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여음이 삽입되는 것도 후대의 달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이다. 서술자는 여성이며, 님은 남성이다. 임금을 님으로 삼고 사랑을 하소연한다고 보아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4월 대목에서는 님을「錄事님」이라고 했다. 녹사라면 서리이니 궁중에서 부르는 노래에서 내세우기는 적합하지 않다. 오늘날까지도 민요로 전승되고 있는 것과 같은 달거리 사랑노래를 가져다가 궁중의 정재에서 부르는 속악가사로 삼았다고 보아야 녹사의 등장을 이해할 수 있다.

正月人 나릿 므른 아으  어져 녹져 논

누릿 가온 나곤     몸하 올로 녈셔

 정월 노래는 이처럼 절창이어서 계속 새로운 풀이를 해도 다 설명되지 않는다. 정월이라 겨울과 봄이 엇갈리기에 얼다가도 녹고, 녹다가도 어는 ‘나리’ 물과 이별만 당하고 있는 자기 신세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자, ‘누리’ 가운데 나서 홀로 살아간다고 한탄하게 되었다. 그렇게 말하는 뜻이 커서 비극적 감회가 깊고 넓은 메아리를 얻는 데 이르렀다고 하겠다. 궁중정재를 위한 수식에서 얻은 구절이라 하기는 어려울 터이고, 민요의 진수가 보여주는 절실한 표현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2월 이하의 노래에서는 달마다의 명절이나 행사를 열거했는데 2월·6월·7월 및 8월의 경우에 명절이 보름이다. 7월 보름은 백중이고, 8월 보름은 가배라 해서 특별히 일컬었다. 이 밖의 다른 명절은 5월 5일의 수릿날과 9월 9일이다. 계절의 순환이 정서변화와 밀착되고, 특히 보름을 숭상하는 관습에 따라서 노래 사연을 마련하는 특징은 농경문화의 저층에 논거를 두고 민요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자연을 노래하면서 인생살이를 문제삼는다. 자연의 순환에서는 예정된 순서에 따라 기쁨이 어김없이 다가오는데, 인생살이는 그렇지 못해서 명절을 맞이할수록 이별의 슬픔이 더욱 절감된다는 것은 자연과 인생을 견주어 나타내는 민요의 기본 주제이다. 한 줄이 세 토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마지막 토막을 이루는 음절수는 최소한으로 한정되어, 변화가 있고 활달한 느낌을 주는 율격도 민요의 기본형식 중의 하나이다.

 <동동> 다음 순서로는<無㝵>를 소개하고, 그 놀이를 하면서<無㝵詞>를 부른다고 했다.<무애>라면 일찍이 元曉가 불렀다고 한 노래인데, 노랫말이 어디에도 전하지 않는다. 설명 끝에 주를 단 데서는, 놀이가 서역으로부터 유래하고, 가사는 불가의 말이 많이 들어있다고 했다. 서역에서 유래한 놀이라고 했으면서도 당악정재로 분류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오래 전에 토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악지에서 정재의 절차를 설명한 것은<무고>에서<무애>까지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西京>부터는 노래가 생긴 유래를 알려준다든가 노래에서 다른 한역시를 통해서 보여주는 데 그쳤을 뿐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방식에 관해서는 말이 없다. 놀이를 하는 절차가 앞에서 든 것들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노래를 노래로만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어는 쪽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놀이노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놀이노래로 다룰 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三藏>과<蛇龍>이라고 한 것은 사정이 다르다. 이 두 노래는 한역해 놓은 사설을 보건대≪악장가사≫에 전하는<쌍화점>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는데, 어떤 놀이를 하면서 불렀던가를 설명을 해놓았고,≪고려사≫에서 찾아서 보충할 수 있는 자료도 적지 않다. 여러 가지 기록을 종합해서 간추려 보면, 충렬왕 때의 倖臣 吳潛(처음 이름은 吳祈)·金元祥 등이 내시 石天補·石天卿 따위와 함께, 놀이에 탐닉하는 성미인 왕을 기쁘게 하느라고 온갖 음란한 놀이를 할 때<쌍화점>을 지어냈음을 알 수 있다. 기생·관비·무당을 선발해 男粧別隊라는 놀이패를 따로 모으고, 놀이를 공연하기 위한 제반 시설을 마련했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쌍화점>이 창작한 노래임을 입증해 준다. 그 몇 사람의 합작이거나 오잠의 작품일 것이다. 이에 따라서 속악가사를 속요라고 하며, 그 모두가 민요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선입견은 마땅히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그뿐만 아니라<쌍화점>놀이는 예사 속악정재로 볼 것이 아니라, 가극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대두되었다. 노랫말을 두고서 한쪽에서는 수준높은 상징을 갖춘 풍자시라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음란하고 퇴폐적인 가극의 대사라고 했다.

 <비두로기>또는<維鳩曲>·<相杵歌>·<엇노래>또는<思母曲>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정재를 하면서 불렀다는 증거는 없으며, 장이 나누어져 있지 않은 짧은 형식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정재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라면 여음을 경계로 해서 여러 장이 연속되어 있어야 한참 지속되는 절차를 감당하기 알맞다. 반드시 장이 나누어져 있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길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요건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노래 세 편은 모두 긴 노래의 한 장에 해당하는 길이밖에 안된다. 속악가사는 분명히 짧은 노래와 긴 노래 두 가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履霜曲>은 어떤 부류에 속한다고 해야 할지 다소 막연한 노래이다. 장이 나누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상저가>·<엇노래> 따위와 같으나, 길이가 훨씬 길다. 어찌 보면 사뇌가 형식과 상통하는 바 있는 듯하고, “아소 님하”라는 감탄구를 여음이 아닌 본문에 내놓은 다음에 결말을 마련하는 수법도 그런 각도에서 관심을 가질 만하다. 줄을 나누고 토막을 분간하는 일정한 규칙이 보이지 않은 채 말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에서는<처용가>와 같은 부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은 서술자인 여자가 오지 않는 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님과의 기약을 따라야지 다른 길을 택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 각오가 애처롭고 섬세한 느낌과 함께 나타나 있다.

 「서리 밟는 노래」라고 한 제목에서부터 주위의 풍경과 마음의 상태가 적절하게 호응하면서, 시각적인 표현효과도 아울러 잘 갖추고 있다. 음란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으며, 그래서 궁중속악으로 채택되었을지 모르나, 진실되고 절실한 사랑의 노래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滿殿春別詞>라고 한 노래는≪악장가사≫에 장을 나눈다는 표시를 하고 실어 놓았으나, 장과 장 사이에 여음이 삽입되지 않았다. 장을 나누는 표시만 없다면<이상곡>과 비슷하다고 하겠다.<이상곡>은 한 줄을 몇 토막으로 볼 것인가 하는데 일정한 규칙이 발견되지 않아서 특이하다고 했는데,<만전춘별사>의 율격 또한 그렇다. 제4장까지는 네 토막씩 석 줄로 되어 있어서, 광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제5장은 네 토막 석 줄이 두 번 되풀이되어 여섯 줄을 이룬다. “아소 님하 遠代平生애 여힐  모새”라는 말은 따로 구분되어 있어서, 그것까지 보태면 모두 여섯 장이다. 각 장을 이루는 사설은 어느 것이나 님과 이별하지 않고 사랑을 계속 누리고자 하는 소망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런 뜻이 마지막의 말로 총괄되었다 하겠다. 대체적인 내용이나 마무리를 하는 말이나<이상곡>의 경우와 적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鄭石歌>는 첫 장에서 “딩아 돌하 當今에 계샹이다”라고 한 “딩아 돌하”에서 따온 말을 노래 이름으로 삼았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선 의문이나, 아마도 鉦과 磬, 다시 말하면 징과 돌이라는 악기를 사람처럼 일컬은 것 같다. 정과 경을 울리며 노는 풍류는 임금님을 위한 것이니 당금에도 계신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先王聖代에 노니와 지이다”라고 해서, 옛적 훌륭한 제왕의 덕을 그대로 이은 시대에 놀고자 한다고 했다. 임금 앞에서 놀이를 벌이는 것을 그렇게 칭송했다고 보아 마땅하다. 그 점에서는<동동>의 서두와 상통하고, 향악정재를 하면서 부른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악장가사≫에서는<가시리>라고 하며 전문을 소개한 노래는≪시용향악보≫에서는<歸乎曲>이라고 일컫고 한 대목만 소개하였다. 이 노래는 길이를 본다면 짧은 노래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장을 나누는 표시가 분명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장과 장 사이에 여음이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서는<서경별곡>이나<청산별곡>과 다름이 없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   날러는 엇디 살라 고

리고 가시리잇고 나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大平盛大     위 증즐가 大平盛大

 

잡와 두어리마     설은 님 보내노니 나

선면 아니 올세라     가시  도셔 오쇼셔 나

 위 증즐가 大平盛大     위 증즐가 大平盛大

 전문이 이것뿐이다. 보내고 싶지 않은 님을 보내야 하는 심정을 소박하게 나타냈으니, 수준 높게 다듬은 표현이 없다고 해서 낮추어 볼 필요도 없다. 어느 대목이든 쉽게 이해되지만, 나타난 말이 얼마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숨은 사연을 짐작하게 한다. 서러운 님을 보내니 가는 듯이 돌아오라고 한 대목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래하는 여자를 서럽게 하는 님에게 하소연하는 말이기도 하고, 무언가 드러나 있지 않은 곡절 때문에 서럽게 떠나야 하는 님이기에 그렇게 당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西京別曲>은≪고려사≫ 악지에서<西京>이라고 하고<大同江>이라고 한 노래 두 편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역을 통해서 악지에 소개한 그 두 편의 내용은<서경별곡>과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서경별곡> 또한「西京」이라고 시작되는 대목과,「大同江」이라고 이어지는 대목으로 나누어도 어색해지는 것은 아니다. 민요에서는 사설이 달라지기도 하고, 바꿔지기도 하고, 끊어 부를 수도 있고, 이어 부를 수도 있었는데, 속악가사로 편입되면서 장편으로 연결된 것만≪악장가사≫에 전한다고 보아 마땅하다.

 제1장을 보면 “西京이 아즐가 西京이 셔울히 마르는 위 두어령셩 두어령셩 다링디리”라고 하고, 그 다음에 한 장이 끝났다는 동그라미 표시가 있다.첫 마디가 되풀이되고 그 사이에 “아즐가”가 있는 것은 민요를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악곡으로 개편할 때 음악적인 필요에 의해서 생긴 변화일 것이다. “위 두어령셩” 이하의 여음 또한 민요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악기의 구음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 사설 자체만 간추리면, “西京이 셔울히 마르는”이라고 하는 말뿐이다. 이것만으로는 노래 한 장이 끝났다고 할 수 없다. 말이 그 다음으로 이어져서 비로소 무엇을 말하는지 밝혀진다.

西京이 셔울히 마르는     닷곤 쇼셩경 고요ㅣ마른

여므론 질삼뵈 리시고   괴시란 우러곰 좃니노이다

 여기까지 가야 내용으로 보아 한 단락이 끝난다. 민요상태에서는 그 다음에 여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율격을 고려해서 띄어쓰기를 하니, 한 줄이 세 토막씩 된다. 대뜸 서경부터 들먹이는 것은 많은 사연을 암시한다. 서경은 자랑스러운 고장이고, 개경에 못지 않은 곳이나, 서경백성들은 거듭 고난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갖가지 억울한 사유로 자기 고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이어져서, 대동강가에서 부르는 이별의 노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鄭知常이 한시로 남긴 이별의 노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민요 가락에 얹어, 일반 백성 그 가운데서도 여인네가 겪은 이별의 고난을 바로 나타냈다. 노래하는 여인은 자랑스러운 고장 서경을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님이 떠나서 이별을 당한다면 길쌈하던 베를 버리고서라도, 계속 사랑해 준다면 울면서 따르겠다고 했다. 길쌈하는 여인의 일상생활을 송두리째 말해주는 것이다. 생활을 버리고 사랑을 따르겠다고 했으니 비극을 자초하는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다음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욱 절실한 표현을 얻었다.

구스리 바회예 디신     긴힛 그츠리잇가

즈믄  외오곰 녀신   信잇 그츠리잇가

 구슬이 바위에 떨어지면 깨지는 아픔이 얼마나 크고 조각조각 날카롭게 빛나는 모습이 얼마나 영롱할까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말에 구슬을 꿴 끈은 끊어지지 않고 서로의 믿음도 지속된다고 하면서 파탄을 거부하는 전환을 보여주었다. 천 년을 홀로 지내도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반전이 더욱더 큰 설득력을 갖는다. 이 대목은<정석가>에 삽입되어 있으며 이제현의<소악부>에는 한역되어 있다. 따로 부르는 노래이기도 했겠지만, <서경별곡>에 들어가 절정부분을 이루면서 한층 더 두드러진 표현효과를 가졌다.

 그리고는 대동강 장면이다. 그렇게까지 노래를 했어도 님은 떠나가기에 거듭되는 이별의 현장 대동강이 펼쳐진다. “大同江 너븐디 몰라서 내여 노다 샤공아”라고 한 첫마디는 쉽게 이해된다. 그 다음에 “네가시 럼난디 몰라셔 녈예 연즌다 샤공아”라고 한 대목은 뜻풀이를 두고 논란이 있다. “너는 여자가 음란한 줄 몰라서”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네까짓 것이 주제넘은 줄 몰라서”라고 풀이하는 편이 더욱 그럴 듯하다.0448) 서재극,<고려노래 되새김질>(≪白江徐首生博士回甲紀念論叢≫, 螢雪出版社, 1981) 참조. 님은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는데도, 그 다음 줄에서는 강 건너편의 꽃을 님이 꺾으리라는 데까지 상상이 미쳤다. 꽃은 여자를 가리킨다. 님이 다른 여자를 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까지 겹쳐 애꿎은 사공을 나무라기만 했다.

 <靑山別曲>은≪악장가사≫에 실려 있으며≪시용향악보≫에 앞머리가 보일 뿐이고, 다른 문헌에는 도무지 언급된 바 없어 그 위치나 성격을 밝히자면 노래 본문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풀이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논란은 많고 합의는 어렵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래랑 먹고    靑山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얄라

 제1장을 들면 이렇다. 넉 줄씩, 세 토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줄 수는 안정감을, 토막 수는 율동감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한 장이 끝나면 여음이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규칙은 제8장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세 토막 중에서 마지막 것은 앞의 둘보다 짧은 편이어서 한층 경쾌한 느낌을 주는 것도 거의 그대로 되풀이된다. 반복되는 말이 많아 같은 생각을 거듭 다짐하는 수법도 계속 사용된다. 여음은 힘차고, 밝고, 유려하다.≪시용향악보≫에 실린<大國>에서도 거의 같은 모습으로 다시 쓰였지만, 악기의 구음으로 보자면 무리가 있고, 후대의 “아리랑 아라리오”로 이어진 민요 본래의 여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청산에 살았으면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청산은 혼탁한 속세와 대립되는 말인가 아니면 농사짓고 사는 마을과 대립되는 말인가 하는 것이 구체적인 쟁점이다. 청산이 속세와 대립되는 말이라면, 머루나 다래는 속세가 싫다고 자진해서 도피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정신적인 위안을 상징한다. 청산이 마을과 대립되는 말이라면, 마을에서 살아갈 길이 없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서, 다른 것은 없으니 머루나 다래라도 따먹고 연명해야 할 사정을 나타낸다. 제6장에서는 바다에 가서 “자기 구조개”를 먹고 살았으면 하는 말을 다시 했기에, 두 가지 경우를 함께 살필 일이다. “자기”는 해초의 일종이고, “구조개”는 굴과 조개이니 정신적 위안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 것 같고, 연명을 하는 데 소용된 식품이라 보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세속에서 물러나 자연을 찾자는 선비가 부른 것도 아니고, 실연을 해서 괴로워하는 심정을 나타낸 것도 아니며, 고려 후기에 거듭 일어난 전란 때문에 자기 마을에서 머물 수 없게 된 유랑민의 처지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제2장에서 새를 보고서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라고 한 심정도 그런 형편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더욱 문제가 되어온 제3장을 좀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길도 함께 열린다.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물 아래 가던 새 본다

 물 아래로 날아가던 새를 본다면 말이 되지 않고, 어미를 의문형으로 풀이해도 설명이 궁해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서의 새는 밭이랑을 뜻하는 ‘사래’의 축약형이고, “가던 새”는「갈던 사래」로 보아, 물 아래 하류지방에서 경작하던 사래를 이끼 묻은 쟁기를 가지고 바라본다고 하면 뜻이 쉽게 통한다. 논밭을 버리고 산으로 쫓겨났으니 쟁기에 이끼가 묻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난날을 잊을 수 없어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심정을 이렇게 하소연하지 않았나 싶다. 제5장에서 밤이면 외로움을 더 느낀다든가, 제6장에서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다든가 한 말은 난리를 만나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던 사정 때문에 비탄에 잠긴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지나치게 밀고 나가는 것은 무리이다. 이 노래는 원래<청산별곡>이 아니고<얄라리얄라>라고 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음은 언제나 같지만, 거기 붙을 수 있는 사설은 정해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유랑민의 한탄이 주조를 이룬다 해도 그와 관련을 가진 다른 사연도 등장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후대의<아리랑>을 보더라도 납득이 간다. 그런데 궁중 속악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노래 이름을<청산별곡>이라고 품위있게 짓고, 사설은 여덟 장으로 추려 어느 정도 말을 다듬고 순서를 정했을 것이다.

 제5장에서 “어듸라 더디던 돌코”라 하며 돌을 던진다 하고, 그 돌을 맞아서 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돌이 무엇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것은 아니고, 그 당시의 어떤 풍속, 예컨대 石戰과 관련된다고 보는 편이 나을 성싶다. 자기 심정이 석전에서 몰려 돌을 맞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뜻일 듯하다. 제6장에서 사슴이 짐대에 올라 해금을 켠다는 구절의 경우에는, 시적 표현을 위한 역설로 볼 필요가 없고, 사슴으로 분장한 사람이 등장하는 놀이의 한 장면을 노래했으리라는 추정이 이미 지지를 받고 있다.

 제8장에서 한 말은 술을 권하며 잡으니 어찌 하겠느냐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술로 근심을 잊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는 데 동의할 수 있다. 잡힌 사람은 남자이며, 어찌 하겠느냐 하며 노래하는 서술자는 여성이라는 견해도 근거가 있다. 여러 장으로 이어지는 노래에서 서술자가 바뀌는 것은 민요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이 노래 전체의 결론이라고 보아서, 사실은 모두 다 술노래라고 하는 것은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초기에 고려에서 물려받은 속악을 정리하여 아악을 새로 제정하면서,<만전춘별사>·<서경별곡>·<청산별곡>의 곡조는 이용하고, 사설은 배격했다.<만전춘>곡조를<定大業>가운데<順應>또는<赫整>이라는 기악곡에 쓰고,<서경별곡>과<청산별곡>은 각기<靖東方曲>과<納氏歌>를 얹어 부르는 곡조로 삼았다. 곡조는 살리면서 사설을 배격한 이유는 사설이 남녀상열지사라는 데 있었고, 그 구실이 어느 작품에서나 한결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만전춘별사>라면 분명히 그렇고,<서경별곡>도 그렇게 간주될 수 있으나,<청산별곡>은 거기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민중생활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냈기에 난잡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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