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3. 문학
  • 3) 경기체가·시조·어부가·가사

3) 경기체가·시조·어부가·가사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은 권문세족이라 할 수 있으며, 신흥사대부가 이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 또한 그 시기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권문세족은 무신란·몽고란을 겪고 원나라의 간섭이 지속되는 동안에 정상적이라할 수 없는 기회를 잡아 권력과 토지는 차지했지만, 상층문화를 재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으며, 중세적인 지배체제를 위기로 몰아 넣었을 따름이다. 원의 부마 노릇을 하며 흥겨운 놀이나 찾는 왕을 부추겨 이념적 긴장은 풀어버리고, 왕조의 위엄은 돌보지 않으면서 유흥적이고 향락적인 노래를 민간전승에서 찾아 궁중으로 끌어들이고, 같은 풍조의 창작을 덧보태기도 했다. 그래서 전에 볼 수 없었던 노래와 놀이가 속악가사로, 속악정재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흥사대부는 이에 불만을 가지고, 상층문화를 가다듬고 지배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이념을 마련하고자 했다.

 신흥사대부가 나서서 상층의 시가문학을 새롭게 일으키려는 데서 중세 전기문학과는 구별되는 중세 후기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이 구현되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景幾體歌·時調·歌辭이다. 향가시대가 끝난 다음에 조성된 상층 시가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경기체가·시조·가사가 공존하는 갈래체계를 마련하면서 문학사의 커다란 전환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 전환은 결과를 보면 선명하게 정리될 수 있지만, 일거에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문학적 관습과 다각도로 얽힌 상황에서 단계적으로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신흥사대부의 출현과 성장 자체가 그렇듯이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어떤 영역은 禪宗의 승려들이 앞서서 개척했는데 나중에 사대부문학으로 수렴되기도 했다.

 경기체가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翰林別曲>은 속악가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최씨무신정권에서 벼슬하는 문인들이 놀면서 즐기려고 지은 노래이며, 음란하다고 할 수 있는 놀이를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런 문인들은 신흥사대부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지만 사대부다운 이념을 마련해서 시가문학의 새로운 기풍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갈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 사람 저 사람이 한 대목씩 지어 부르는 동안에 어쩌다가 생겼을 법한 노래인데, 그 형식과 표현방법이 이어진 결과 경기체가라고 하는 새로운 갈래가 성립되었다.

 崔忠獻이 집권하고 있던 고종 초기에 향락적인 기풍의 속악가사가 어느 정도 궁중에 들어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권문세족이 속악가사의 모습을 온통 바꾸어 놓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한림별곡>은 규범이나 도리 같은 것은 돌보지 않고 오직 즐기고자 부른다는 점에서나, 장을 나누고 여음에 상당하는 것을 삽입하는 형식에서나, 속악가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상통하는 성격을 갖추고 있으며,≪고려사≫ 악지에서는 그것 또한 속악가사의 하나로 들었다. 이러한 사실은,<한림별곡>이 장차 속악가사로 부각될 민간전승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만들어졌으면서, 또한 이미 궁중의 놀이를 위해 채택된 속악의 음악적 형식을 따르지 않았던가 하는 추측을 자아낸다.

 원래 지방향리였던 신흥사대부는 농민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기능인이어서 사물이나 사실을 중요시했다. 문학적 교양과 학식을 갖추어 중앙정계로 진출했을 때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살려「能文能吏」임을 자랑하고, 고려 전기 문벌귀족의 이념을 극복하면서 당시의 권문세족과 맞서고자 했다. 李奎報나 그 주변의 인물들은 아직 뚜렷한 자각을 못한 상태였으나 이러한 쪽으로 방향을 잡는데 필요한 선구적 활동을 하면서 假傳이나 경기체가를 새로운 갈래로 성립시켰다. 그 후에 거듭 모색되고 표명된 신흥사대부 특유의 사고방식은, 鄭道傳이 사람은 하루도「處事接物」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하면서 心·身·人·物의 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을 새로운 이념의 핵심적 명제로 삼은 데 잘 요약되어 있다.0449) 趙東一,<景幾體歌의 장르적 성격>(≪學術院論文集≫15, 1976) 참조.

 그러나 사물을 중요시하면서 자아를 세계화하는 것만으로는 문학창작이나 이념설정이 온전할 수 없었다. 가전을 짓는 데서도 사물의 내력이나 쓰임새를 사람의 경우와 함께 다루어서 교훈이나 위안을 찾으려 했고, 경기체가 또한 사물에서 감흥을 찾으면서 서정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었다.「처사접물」의 마땅한 도리를 찾거나, 사물과 혹은 타인과의 관계를 따지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심신 또는 심성에서 제기되는 내면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한 방안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또 한편으로는 사실에 속한 것과 원리를 이루는 것을 함께 추구하는 과정에서, 理氣哲學을 이룩하자는 모색이 심화되고, 밖에서 들어온 학설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사대부에게는 교술시와 함께 서정시가 필요했다. 교술시인 경기체가와 서로 맞서기도 하고 보완하기도 하는 관계를 지닌 서정시는 時調였다. 시조는 경기체가에 이어서 나타났으며, 경기체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또 다른 표현영역을 개척하는데 참으로 긴요한 구실을 하고, 신흥사대부가 역사의 전환기를 맞이해서 더욱 심각하게 지니게 된 내면의식의 문제를 절실하게 다룰 수 있도록 했다. 우리말 서정시를 다시 이룩한 것은 교술시의 경우보다 더욱 큰 의의와 사명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서정시는 이미 향가, 특히 사뇌가를 통해 고도의 수준에 이르렀으므로 그 전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고, 한시에서 그것대로 완벽한 형식과 표현을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거기 맞서서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어려운 과제였다.

 시조는 이 두 가지 과제를 아주 현명하게 해결했기에 우리말 시가의 갈래를 주도하는 위치를 차지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오늘날도 그 생명력이 지속되고 있다. 사뇌가와 견주어 볼 때, 다섯 줄이 세 줄로 줄어들었다. 처음 네 줄이 그 반수인 두 줄로 변하고, 마지막 한 줄은 그대로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하면서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이상을 추구하던 사뇌가의 기풍을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우아함을 추구하는 쪽으로 바꾸어, 신라 때부터의 귀족과 고려 후기 이래의 사대부가 미의식에 있어서 어떤 차이점을 갖는가 선명하게 알 수 있게 한다. 또 한편으로 한시의 絶句는 네 줄인데 시조는 세 줄로 끝나 한층 더 묘미를 갖는 점이 한시와의 경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런데 시조는 누가 일시에 창작해낸 형식이 아니다. 네 토막이고 세 줄인 노래가 원형이라 한다면,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광의의 시조는 일찍부터 있었다.<井邑詞>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 있고,<만전춘별사>에서도 같은 형식이 보인다. 오늘날의 민요에는 물론 현대시에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오랜 형식이 전승되어 오다가, 종장이라고 하는 세째 줄의 처음 두 토막이 사뇌가의 마지막 줄에서 보인 전례를 재현한 것 같은 특이한 짜임새를 갖게 되자 비로소 협의의 시조가 독립된 갈래로서 정립되는 데 필요한 형식을 얻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가는 잘라 말하기 어려우나, 고려 말기의 작품이라고 알려지며 남아 있는 것들은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시조가 자리잡게 되었음을 알려주고, 신흥사대부가 시조의 주인이었음을 입증해 준다.

 歌辭의 성립을 이해하는 데는 더 많은 문제점이 가로놓여 있다. 가사가 고려 말에 성립되었다는 견해는 懶翁和尙 惠勤의<僧元歌>가 발견되어 인정받게 되었으나, 향찰표기가 당대의 것이 아니어서 문제가 있다. 몇 가지 국문가사는 오래 구전되다 정착되었으므로 혜근의 작품인지 의심스럽다. 그런데 한문으로 전하는 더 이른 시기의 노래 가운데도 고려 후기에는 가사와 어느 정도 상통하는 형식의 노래가 적지 않게 성행했음을 입증해 주는 것들이 있다. 그런 작품은 선종의 승려들이 한시의 기존 격식을 파괴하면서 禪詩를 찾는 한편 우리말 노래를 지어 불렀기에 생겨나지 않았던가 싶고, 그렇다면 그 연원과 성격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한림별곡>은≪고려사≫ 악지에 속악가사의 하나로 소개되어 있으며,≪악장가사≫에 전문이 실려 있다. 이 노래는 경기체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서 언제나 논의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李滉은 “翰林別曲類”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한림별곡>을 그 갈래의 대표적인 예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부터 “…별곡”이라는 말이 노래 이름에 들어가 있으므로, 경기체가 대신에 별곡체라는 말로 갈래이름을 삼자는 주장도 있으나 널리 채택되지는 않고 있다. 이 작품에서 “…景 긔엇더니잇고”라는 대목이 되풀이되고, 다른 데서는 “景幾何如”라고도 한 관례에 근거를 두고「경기체가」라는 용어가 창안되어 널리 쓰이고 있다.

 ≪악장가사≫에서는<한림별곡>을 고종 때의 ‘諸儒’가 지었다고 했다. ‘한림’이란 말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문학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선비를 일컬었으므로, 여러 유학자라는 뜻의 ‘제유’와 사실상 그리 다른 말이 아니다. 이처럼 작자의 지위와 수, 그리고 창작시기가 명시되어 있으므로 작품을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데 아주 유리한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고종 때라는 데 만족하지 않고 더욱 따져 본 결과, 고종 3년(1216)을 창작연대로 보는 견해가0450) 金東旭,<翰林別曲의 成立年代>(≪韓國歌謠의 硏究(續)≫, 宣明文化社, 1975) 참조. 유력히 대두되었다. 그 시절에 최충헌정권에서 벼슬을 하던 문인들이 함께 놀면서, 한 대목씩 지어 부르는 돌림노래를 짓지 않았던가 한다. 한자와 국문이 병기되어 있는 대목은 편의상 한자쪽만 인용하기로 한다.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

冲基對策 光鈞經義 良鏡詩賦       위 試場 人景 긔엇더 니잇고

琴學士의 玉笋門生 琴學士의 玉笋門生  위 날조차 몃부니잇고

 이처럼 사람 이름과 장기를 열거했다. 兪元淳은 문, 李仁老는 시, 李公老는 사륙문이 각기 뛰어나고, 李奎報와 陳澕는 쌍운주필의 재주가 있고, 劉冲基의 대책이나 金良鏡의 시부가 또한 유명하니, 이런 문인들이 과거를 본다면 그 광경이 대단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말이다. 거기 이어서, 琴儀가 과거를 관장하면서 배출한 급제자들은 옥으로 된 죽순처럼 쟁쟁하고, 자기를 비롯하여 몇이나 되는가 하면서 수가 많다고 자랑했다. 이 대목을 지어서 부른 사람은 금의에게 뽑혀서 과거에 급제하고, 유원순 이하 여러 문인과 더불어 재능을 발휘하며 함께 모여 놀았음에 틀림없으나, 자기 이름과 장기는 들지 않았기에 누군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 다음 장은 다른 사람이 불렀을 것 같다. 유원순에서 김양경까지 모두 일곱 사람의 이름을 열거했는데,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한 장씩을 더 보태어 모두 8장까지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제1장은 문학창작을 다루었다면, 제2장은 서적을, 제3장은 글씨를 소재로 삼아서 같은 방식으로 노래를 전개했다. 여기까지 등장시킨 사물은 문인의 생활에서 필수적인 것들이고,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다. 그 다음의 제4장은 술을, 제5장은 꽃을, 제6장은 음악을, 제7장은 경치를 노래해서 풍류스럽고 흥겨운 생활을 장식해 주는 것들을 들었다. 그리고 끝으로 제8장에서는 남녀가 손잡고 함께 그네를 타고 노는 광경을 그렸다. 그런 놀이를 실제로 하면서 즐겼으리라고 생각된다.

 <한림별곡>이 나온 지 한 세기 정도 지나서 安軸(1282∼1348)이<關東別曲>과<竹溪別曲>을 지었다. 안축의 작품은 여럿이 놀이를 벌이는 기회에 돌림노래를 짓지 않고 혼자서 창작한 경기체가의 첫 예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뿐만 아니라 신흥사대부가 경기체가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표현한 명백한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원래 지방향리였던 집안에서 태어나 중앙관계에 진출한 안축이 나아가서 정치를 할 때의 생각을<관동별곡>으로 나타내고, 물러나 자기 고장을 자랑하는 말을<죽계별곡>에 담았다. 조선시대의 경기체가 또한 이 두 방향으로 나아갔다.

 <관동별곡>은 충숙왕 15년(1328)부터 그 다음해까지 江陵道 按撫使가 되어 나갔을 때 지은 것이다.<죽계별곡>과 함께≪謹齋集≫에 수록되어 있으며, 임지에 가서 민심을 살피고 시대의 병폐가 무엇인가 파헤친 내용을 담은 기행시집으로서≪근재집≫의 서두를 장식하는<關東瓦注>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어찌 보면<관동와주>에서 수십 편의 한시로 다룬 바를 요약한 것이<관동별곡>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장에서 그 지방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아 행차하는 거둥을, 그리고 유의해야 할 바를 다짐했다.

 <죽계별곡>은 언제 지었을까는 확실하지 않으나,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작자의 고향 順興이 순흥부로 승격되고, 거기에 충목왕의 胎가 안장되는 일이 작자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충목왕 4년(1348)에 있었던 것을 증거로 그 해가 창작연대라고 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 두 가지 사실이 작품 창작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왕의 태가 안장된 것은 작품에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안축이 자기 일생을 마무리하면서 지었다고 볼 수 있다.<관동별곡>의 경우처럼 창작 의도와 전체적인 내용이 제1장에 가장 잘 나타나 있으므로, 그 대목을 인용해 본다(풀이를 앞으로 싣는다).

죽령 남쪽, 안동 북쪽, 소백산 앞,

천년 흥망에도 한결같은 풍류, 순흥성 안,

년데 없는 취화봉, 천자의 태를 갈무리한 곳

아, 중흥을 한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떤가

맑은 기풍의 집, 두 나라에 벼슬함이여

아, 산수가 맑고 높은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떤가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

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

他代無隱 翠華峰 王子藏胎

爲 釀作中興景 幾何如

淸風杜閣 兩國頭御

爲 山水淸高景 幾何如

 이처럼,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하는 1,000년 동안 한결같은 풍류를 이어온 고장이며, 다른 곳에는 없는 왕자의 태를 갈무리한 곳을 자기가 들어서 중흥을 했다고 자랑했다. 자기가 청백리로서 깨끗한 정치를 하면서 원과 고려 두 나라에서 벼슬했기에 산수의 격조를 더 높였다고 했다. 고유명사를 계속 나열하다시피 하고 설명은 생략되어 있는데도 이런 복합적인 생각이 나타나 있는 것에서, 경기체가는 신흥사대부가 득의에 찬 기백을 과시하는 데 보다 잘 어울리는 갈래였음이 명확히 나타난다.

 이 노래는 5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2장 이하는 일정한 순서를 따랐다고 보기 어렵다. 제2장에서는 사찰의 누각·정자 등을 찾아서 기녀들과 어울려 노는 광경을 다루었다. 제3장에서는 향교에서 글을 배워 유학을 익히고, 철 따라 시를 읊고 음률을 즐기는 광경을 자랑하고, 향교의 스승을 보내고 맞는 광경도 거기 곁들였다. 제4장에서 기생들과 어울려 놀다가 헤어져 멀리 두고 생각하는 심정을 읊었으며, 제5장에서는 성스러운 태평성대이니 사철 즐거운 놀이를 벌이자고 했다. 그러나 자기 고장의 아름다운 풍속을 말한 대목은 얼마 되지 않고, 부귀에 겨워 절경을 찾으며 질탕한 놀이를 벌인다고 한 사연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時調」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쓰이게 되었고, 시절가 또는 새로 유행하는 노래를 뜻한다. 그 전에는「短歌」라고 했는데, 이 말도 고려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엇으로 부르며 그 특징을 어떻게 의식했건, 오늘날 시조라는 이름으로 널리 일컫고 있는 문학갈래는 고려 후기 또는 말기에 생겨났으리라고 보는 데 의견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물론 시조형식의 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리라고 보아 마땅하지만, 이른바 종장 서두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규칙까지 갖추도록 형식을 가다듬고 특정 작가가 나서서 자기 작품으로 창작한 상층문학 갈래인 시조는 그 때쯤 역사적인 형성을 보게 되었다.0451) 김수업,<시조의 발생시기에 대하여>(≪時調論≫, 一潮閣, 1978)에서는 시조가 16세기에 들어서서 생겼다고 했으며, 김병국,<시조 발생의 문학사적 의의>(≪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2)에서는 16세기에 시조가 생겼을 가능성까지 아울러 검토하였다.

 시조는 경기체가처럼 한문 어구를 열거해서 표기할 수 없고, 향찰로 정착된 바도 없기 때문에 이른 시기의 작품을 다루는 데 적지 않은 지장이 있다. 몇 백 년 동안 구전되다가 비로소 국문으로 기록된 것들을 두고서 작자를 살피고, 작품론을 전개하자면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다.≪靑丘永言≫ 이하 여러 시조집을 보면, 삼국시대나 고려 전기 사람들이 지었다는 시조도 몇 편 전하지만, 모두 후대인의 擬作이라고 보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면 시조를 남겼다는 작자가 많아질 뿐만 아니라, 후대인의 의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나타난다. 그 첫 예는 禹倬(1263∼1342)이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두 편이다.

春山에 눈 노기 람 건듯 불고 간  업다

져근듯 비러다가 리 우희 불이고저

귀 밋  무근 서리를 녹여볼까 노라

 

 손에 가시를 들고   손에 막 들고

늙 길 가시로 막고 오 白髮 막로 치랴니

白髮이 제 몬저 알고 즈림길로 오더라

 우탁은 오래 산 사람이기는 하지만, 후대의 누구나 이런 노래를 우탁에게 가탁해서 지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려사≫ 열전에서나 구전자료에서나 우탁은 淫祀를 섬긴다거나 하는 못마땅한 풍속을 타파하는 데 열을 올린 신유학파 중에서도 특히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따름이니, 늙음을 두고 이런 표현을 했다는 것은 오히려 의외일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두 편은 후대인이<嘆老歌>라고 불렀듯이 늙음을 한탄하는 사연을 묘미있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어서 뚜렷한 개성이 인정된다. 이 작품은 여러 시조집에서 한결같이 우탁이 지었다고 하거나 작자를 표기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다른 사람을 작자로 제시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작품의 주제는, 세월이 흘러 늙음이 닥친다든가 하는 것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으니 순리를 따라야 하며, 헛된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지혜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우탁은≪周易≫에 정통했다고 하는데,≪주역≫에 근거를 두고 그런 생각을 다졌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지어졌다고 추측되는 시조들 중에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 예는 오히려 흔하지 않다. 신흥사대부가 시조를 필요로 했던 더욱 절실한 이유는 나아가 세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번민하는 심정을 토로하자는 데 있었다. 우탁과 같은 시대 사람이며 후배인 李兆年(1269∼1343)이 지었다고 하는 다음과 같은 작품이 그런 것이다.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

一枝 春心을 子規야 알랴마

多情도 病인 양여  못 일워 노라

 배꽃에 달이 밝고, 은하수도 삼경이 되어 기울어졌으니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한데, 자기는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정감 때문에 두견새와 함께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사연은 작자가 정치를 비판하다가 고향으로 밀려나서 충혜왕의 잘못을 걱정한 심정을 하소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조를 수록한 자료집 몇 군데에서 이미 그런 암시를 한 바 있다. 작자가 고향으로 밀려난 시기는 충혜왕 복위 2년(1341) 이후이니 만년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못다 이룬 참여의지 때문에 안정을 찾지 못한 점이 우탁의 작품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홀로 느끼는 번민을 나타낸 것 같은 시조가 그 시대의 격동과 깊이 연결되는 의미를 지닌 예는 그 뒤에도 이따끔씩 보인다.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전하는 李存吾(1341∼1371)의 시조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구름이 無心 말이 아도 虛浪다

中天에  이셔 任意로 이면서

구타야 光明 날빗 라가며 덥니

 이 작품은 어느 시조집에서나 작자를 밝히고 있으며 거의 예외없이 이존오가 지었다고 했으니, 작자를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성싶다. 마지막 구절은 “덥허 무 리요”라고 한 것이 오히려 많으나, “라가며 덥니”라고 하는 편이 구름에 대한 원망을 보다 강하게 나타낸다. 말뜻에 따라 풀이한다면, 광명한 햇빛을 구태여 가리는 구름을 원망했을 따름이고, 그 이상 더 어렵게 생각할 여지가 없지만, 표면의 뜻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렇게 노래한 속셈을 짐작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럴 때에 작자가 겪었던 시련이나 고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오랫동안 통용되어 온 시조의 이해방식이다.

 이조년이나 이존오가 살았던 시대에는 고려왕조를 넘어뜨리려는 움직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공민왕의 뒤를 우왕·창왕이 잇자 사정이 달라졌다. 신흥사대부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급진파는 새로운 왕조를 이룩하고자 했으며, 온건파는 고려를 향한 충절을 버릴 수 없어서 고민에 사로잡혔다. 이 때 崔瑩(1316∼1388) 같은 무장은 오랜 문벌을 자랑하는 귀족세력의 마지막 수호자로서 고려를 지키려다가 처형되었으며, 신흥사대부의 사상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李穡(1328∼1396)은 온건파로서의 고민을 지니고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이 두 사람이 각기 남긴 시조 또한 정치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서로 대조적인 기풍을 보여준다.

綠駬霜蹄 지게 먹여 시물의 씨셔 고

龍泉雪鍔을 들게 라 두러메고

丈夫의 爲國忠節을 세워볼가 노라

 이렇게 노래한 최영의 시조는 그 표현을 보면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어려운 한자말이 두 번 나오지만, “綠駬霜蹄”는 좋은 말이고, “龍泉雪鍔”은 이름난 칼이다. 시조를 짓기 위해서 새삼스럽게 찾아낸 것은 아니고 흔히 쓰던 문구였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토로하니 시조를 이루었다 하겠다. 최영과 같은 구귀족에 속하는 사람은 시조를 창안하는 데 가담하지 않았지만, 신흥사대부쪽에서 지어 부르는 노래의 격식을 어렵지 않게 받아서 그 쪽 동향에 맞서서 고려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각오를 나타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시조의 작자층이 확대된 증거일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무장의 기개를 나타낸 시조의 첫 예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白雪이 진 골에 구룸이 머흐레라

반가온 梅花 어 곳 퓌엿고

夕陽의 호올노 셔셔 갈 곳 몰나 노라

 백설이 잦아지고 구름이 험한 골짜기는 작자가 당면하고 있는 고난을 적절하게 상징하고 있으며, 그와는 반대가 되는 반가운 매화는 무엇이라고 한정해서 풀이할 수 없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석양은 그리고 있는 풍경에 어울려 선택된 말에 그치지 않고 왕조의 마지막 시기를 암시하는 의미를 지닌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서는 과정이나, 그 직후의 상황에서 시조가 상당한 구실을 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뒷날 조선왕조의 태종이 된 李芳遠(1367∼1422)이 鄭夢周(1337∼1392)의 속셈을 떠보느라고<何如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시조를 짓자, 정몽주는 이에 대해서<丹心歌>라고들 하는 시조로 응답했다는 것은 후대 문헌에 거듭 오른 일화이다. 이 밖에 邊安烈(1334∼1390)의<不屈歌>도 있었는데, 원래의 모습대로 전해지지는 않는다.

 고려 말에 시조와 함께 생겨나 후대까지 맥락이 이어진 또 한 가지 새로운 노래 갈래가 漁父歌이다. 어부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원래 어부의 고기잡이에 소용되는 민요인데, 어부 노릇을 흉내내면서 흥취를 즐긴다는 假漁翁의 노래로 바뀐 것이 있어 상층 시가의 한 갈래가 되었다. 충목왕 때 정승으로 은퇴한 金永旽(?∼1348)이 어부가를 즐겨 불렀다고 하고, 조선 초까지 살았던 사대부 孔俯(?∼1416)는 어부가 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한다. 그 무렵부터 어부가에서의 어부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관원과 정반대의 길을 택한 고결한 인물로 간주되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세상에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대부가 강호를 찾아 자연의 흥취를 즐기면서 어부가를 부르고 짓던 관례가 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악장가사≫에 어부가 한 편이 실려 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표기되었으나 고려 때의 모습을 전한다고 생각된다. 여섯 줄로 갈라 적을 수 있는 노래 12장이 모여 전편을 이루었다. 한 장씩 보면 시조의 갑절쯤 되는 분량이고, 전편은 가사처럼 길어 단시와 장시의 이중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라  라”, “닫 드러라” 하는 등으로 어부가 하는 말을 넣고, “지곡총 지곡총 어와”는 변함없이 되풀이해 배를 저으면서 부르는 듯이 기분을 내고 물가 경치를 그리는 한문 문구를 열거했다. 후대에 개변된 형태를 보더라도 문학작품으로는 창작의 폭이 좁다 하겠다.

 가사가 고려 말에 생겨났으리라는 추측은 전부터 있었고,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이 지었고 후대에 국문으로 표기된 노래인<西往歌>·<尋牛歌> 같은 것들을 그 증거로 들곤 했다. 그러나 자료의 신빙성 때문에 의문을 가지는 신중론이 우세한 편이었는데, 근래에 역시 혜근의 작품인<승원가>가 향찰로 표기된 형태로 발견되어 증거가 보완되었으며, 이 자료가 논의의 초점으로 등장했다.0452) 金鍾雨,<懶翁和尙僧元歌>(≪國語國文學≫10, 釜山大, 1971)에서 이 작품을 처음 소개했다.

 <승원가>는 네 토막씩 202줄이고, 마지막으로 두 토막 한 줄이 첨가되어 있다. 한 토막을 이루는 글자수는 대체로 세 자 아니면 네 자여서 후대의 가사와 형식이 다를 바 없다. 모두 여섯 대목으로 나누어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첫 대목에서는 포교를 하면서 흔히 하는 말을 했다면, 그 다음 두 대목에서는 구체적이고도 비근한 사실을 들어서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나타냈다. 병들어 죽게 되면 누가 대신할 수 없으며,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차례대로 그렸다. 넷째 대목은 절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지옥과 극락의 모습을 절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세하게 묘사했다. 그 뒤를 이어서 다섯째 대목에서는 불법을 열심히 닦을 것을 권고했고, 여섯째 대목에서는 전체의 내용을 총괄했다. 여기서 불법을 닦으라고 한 말을 들어보면, 노래를 지은 의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유식 무식 귀천간에 소업을 폐치 말고

농부거든 농사하며 노는 입에 아미타불

직녀거든 길쌈하며 노는 입에 아미타불

 

有識無識貴賤間厓 所業乙弊治末古

農夫去加隱農事何面 遊難口厓阿彌陀佛

織女去加隱績三何面 遊難口厓阿彌陀佛

 <승원가>라는 이름을 보면,<佛元歌>·<法元歌>도 있어야 불·법·승이라고 하는 삼보를 두루 노래해야 짝이 맞을 것 같으나, 다른 둘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혜근이 지었다는 노래로서 구전되다가 후대에 국문으로 정착되었다고 하는 것이 몇 편 더 있다.<서왕가>가 둘이고,<심우가>도 둘 있으며,<樂道歌>라는 것까지 보탤 수 있다. 이런 노래는 과연 혜근이 지었는가 의심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가도 문제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나 수법이<승원가>와 상통한다. 그리고 그 계통을 이어서 후대에도 불교가사가 적지 않게 나타났으며,<回心曲> 같은 것은 민요에 편입되어 상두노래로 널리 불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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