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3. 문학
  • 4) 불교문학

4) 불교문학

 고려 전기에 귀족불교인 교종, 특히 화엄종이나 천태종이 불교계를 지배하던 시대에는 선종의 명맥이 실낱 같았다고 한다. 지방의 변두리 사찰로 밀려나고, 사상의 발전도 이룩하지 못했다. 중앙의 귀족에 대해 반감을 지녔지만, 반감을 당당한 비판으로 발전시킬 능력은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무신란이 일어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귀족불교의 사원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있어서도 귀족세력과 밀착되어 있었으므로 무신정권이 그대로 둘 리 없었다. 그 무렵 知訥이 나서서 曹溪山 修禪社를 창설하고 불교혁신운동을 일으켰다. 기존의 귀족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선종을 내세워 새로운 불교를 일으키려고 했다. 慧諶을 위시한 뛰어난 후계자들이 그 성과를 발전시켜 불교혁신운동이 문화 전반의 방향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교종 쪽에서도 白蓮社를 거점으로 천태종을 새 시대의 기풍에 맞게 다시 살리고자 해서, 결사운동이 일반화되었다.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된 기간 동안에는 선종의 승려들이 원나라를 드나들면서 중국 선종인 臨濟宗을 받아들여 기존의 선종과 융합시켰다. 선종의 여러 유파를 曹溪宗으로 통합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맥락의 원류를 만든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선종의 고승이 한 말이나 부른 노래를 적어서 모은 책을 흔히 語錄이라고 한다. 거기 수록된 내용에는 글로 지은 것도 있고, 禪詩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적지 않아 성격이 한결같지 않다. 어떻게 하면 기존의 격식을 벗어나서 기발하기 이를 데 없는 비유나 역설로 무지를 깨우칠까 하고 모색하다가, 말이나 글을 철저히 불신하면서도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다양하게 이룩했다. 격조높은 명문을 본받아야 한다든가, 전거나 고사를 활용해서 수식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아예 버리고, 느끼고 깨달은 바를 그대로 살려 쉬우면서도 전혀 뜻밖인 표현을 하고자 했다. 문학의 표현을 두고 그 동안 되풀이되어 온 논쟁에 그 나름대로 종지부를 찍으면서, 문학의 전환을 이룩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했다.

 어록이란, 말을 받아쓴 글이니 구어체에 가까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중국 선종에서 마련한 구어체 한문을 가져와도 우리말을 그대로 살릴 수는 없는 것이 고민이었다. 선시는 노래부르는 대로 적어도 무방하다. 한시이기는 하지만 격식에 맞지 않고 그 원형은 가사와 같은 것이 아니었겠는가 추측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후대에 와서는 사대부의 국문시가로 자리를 굳힌 가사를 고려 말에 승려들이 먼저 만들어냈으리라는 구체적인 증거도 있다. 이처럼 선종의 대두와 더불어 한문학의 문학이 일상적이며 직감적인 표현을 하는 데 불편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국어문학을 다시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0453) 고려 후기 불교문학에 관해서는 다음의 책이 참고가 된다.
印權煥,≪高麗時代 佛敎詩의 硏究≫(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3).
李鍾燦,≪韓國의 禪詩≫(高麗篇)(二友出版社, 1985).

 혜심은 처음에 관리로 진출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유학을 공부하고 문장에 힘써 과거길에 한 단계 들어섰으나, 개경을 버리고 멀리 지눌이 머문 곳을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개경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지켰다. 지눌의 사상을 문학을 통해서 구체화하고 표현한 사람은 혜심이다. 혜심은 유학을 불교에 아우르고자 했다. 유학이란 이치를 따지고 문장을 쓰는 활동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방면에서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성과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보조를 맞추면서 자기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假傳이 생겨나자 자기도<竹尊者傳>과<氷道者傳>을 지어서, 불교수행을 하는 사람을 대나무와 얼음에다 비유했다. 그런가 하면,<漁父詞>를 내놓아 후대 사대부문학이 광범위하게 계승될 연원을 이루었다.

 더욱 힘써 했던 일은 불교문학을 정리하고 다시 일으킨 것이었다. 우선≪禪門拈頌≫을 편찬했는데, 역대 선가문학의 자료를 집성한 책이다. 자료도 소중하다 하겠으나, 서문에서 편 논의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부처의 마음은 문자에 의거하지 않고 전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헛된 침묵에다 내맡겨 놓을 수는 없으므로, 역대 조사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묻기도 하고, 들어보이기도 하고, 무엇으로 대신하게 하기도 하고, 판별하기도 하고, 읊거나 노래부르기도 해서, 심오한 이치를 드러내 후인에게 전해주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선가문학의 여러 갈래를 살핀 것으로 이해된다. 묻기도 한다는 것은 禪問答이다. 아주 엉뚱한 말을 주고받아 헛된 집착을 깨치는 것이다. 혜심의 어록에도 그런 것이 아주 많다. 때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줄거리도 없고 이치에도 닿지 않는 문답을 하는 것은 특히 室中對機라고 했다. 실중대기는 연극처럼 보이지만 연극은 아니다. 들어보인다는 것은 일화를 통한 전달이다. 무엇으로 대신하게 한다는 것은 비유를 통한 해명이다. 읊거나 노래부른다는 것은 偈頌이니 선시니 하는 노래이다. 혜심은 스스로 이 모든 갈래를 다채롭게 이용했는데 그 자취가≪眞覺國師語錄≫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지눌이 수선사를 열 때 거기 동조한 인물에 了世가 있다. 요세의 후계자인 天因은 자기 스승에 비해 오히려 더 큰 업적을 이루었다. 어려서부터 영리했고 문장이 뛰어나, 처음에는 과거를 통해 진출하려고 했으나 마지막 단계에서 뜻을 이루지 못해 요세를 찾아가 삭발했다. 한때는 수선사로 가서 혜심의 문하에서 참선을 하다가 다시 백련사로 돌아가 요세의 후계자가 되고, 스승이 못다 이룬 바를 완수해서 백련사로 하여금 수선사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천인의 서술로는≪靜明國師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靜明國師後集≫이라는 것 한 권은 잔본만 남아 있다. 이런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서도 사상과 문학을 알아볼 수 있지만, 더욱 중요시해야만 할 것이≪東文選≫에 실린 시문이다.≪동문선≫에는 시 18수와 문 6편이 실려 있어 승려의 작품으로는 아주 많은 편이다. 그 점은 혜심의 작품이 한 편도 실리지 않은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혜심의 선시는 일반 문인이 인정하기 어려웠다 하겠고, 천인의 시문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동문선≫을 편찬할 때도 상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니, 성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天頙은 천인의 후계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세상을 등지고 요세를 찾아가 승려가 되었다. 천인과 함께 요세의 문하에서 활약하다가, 천인이 죽은 다음에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후대까지 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진 편이다.≪동문선≫에는 釋眞靜이라고 소개된 시 다섯 편이 실려 있다. 그런데 “眞靜”은 “眞淨”의 오기로 생각된다.

 천책을 높이 평가한 사람에 丁若鏞이 있다. 정약용은 강진 백련사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천책의 작품을 얻어 보고,<題天頙國師詩卷>이라는 글을 썼다. 거기에서 천책의 시는 아름다우면서도 굳세어서 성글거나 담박하기만 한 병통이 없으며, 이로 미루어 볼 때 공부와 재주도 아울러 칭찬할 만하다고 했다. 그리고 고려 때까지의 시인 셋을 들라면, 최치원·천책·이규보를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천책을 다른 두 사람과 같은 위치로 높였다.

 천책의 후계자는 而安이고, 그 다음이 雲黙이다. 이렇게 대가 이어지는 동안에 백련사는 전날의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고, 운묵을 이은 사람은 누군지 그 다음의 소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운묵은<釋迦如來行蹟頌>이라는 이름의 장편서사시를 남겼다. 운묵의 생몰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작품은 충숙왕 15년(1328)에 만들어졌다고 발문에 명기되어 있다. 상권에서는 석가의 일대기를, 하권에서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경위를 다루고, 아울러 신앙의 자세를 말했다. 모두 五言詩 776구이다.

 冲止는 조계산 수선사에서 지눌·혜심의 뒤를 이은 사람이다. 그 곳에서 국사가 열 여섯이나 났다 하는데, 충지는 여섯번째로 圓鑑國師이다. 호는 宓庵이라 했다. 명문에서 태어났으며 19세 때 이미 과거에 장원을 하고 벼슬길에 들어섰다가 승려가 되어 세상을 잊고 묻히고자 했다. 그런데 충지처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교단을 맡으면서 수선사의 선종은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으니 묻히기만 한 것은 아니고, 더구나 그 당시의 긴박한 시대상황이 충지를 산중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충지의 글을 모은≪圓鑑錄≫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혜심의 경우에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어록은 아니고 문집이라 할 만하다. 수록된 작품은 성격이 다양해서 선시도 있고 자기 스스로 개척한 전에 볼 수 없었던 형식의 노래도 있으며, 일반 문인의 수법을 그대로 사용해서 지은 시문 또한 적지 않다. 그 어느 쪽에서도 대단한 역량을 발휘했다.≪동문선≫에는 釋圓鑑이라는 이름으로 19수의 시와 釋宓庵이라는 이름으로 51편의 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모두 70편이 전한다. 승려의 작품으로는 가장 많은 수이며, 천인의 경우를 훨씬 능가한다.

 충렬왕 6년(1280) 원은 고려조정을 괴롭혀 일본원정을 위해 영남 해안지방에서 전함을 만들고, 군수물자를 모으며 특히 그 곳 백성들을 가혹하게 부리고 수탈했다. 다른 문인들은 내심으로만 고민하는데 충지가 나서서 그 참상을 시에 담았다.<嶺南艱苦狀>이라는 이름의 장시가 바로 그것이다. 충지는<東征頌>이라는 원의 일본원정을 찬양하는 시도 지었는데 그런 그가 다른 한편으로 어찌 이런 작품을 내놓았는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읽어 보면 이 쪽이 진실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팔이 있는 자 묶이었으며,

어느 등줄기에 채찍을 맞지 않았으랴.

찾아오는 분들 대접이야 예사 일이고,

밤낮으로 물자운송이 이어진다.

소나 말도 등이 온전하지 못하고,

인민의 어깨는 쉴 겨를이라고는 없다.

 

有臂皆遭縛

無胰不受鞭

尋常迎送慣

日夜轉輸連

牛馬無完脊

人民鮮息肩

 바닷가에서 전함을 만든다고 원나라 관원이 계속 내려오고, 부역은 평소의 100배나 되는 참상을 이렇게 나타냈다. 그런 짓을 3년이나 계속하는 동안 농부마저 사공으로 징발되고, 바닷가 사람들은 살아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남은 자를 뽑아 일본정벌에 내몰자 다음과 같은 광경이 벌어졌다고 했다.

처자는 땅에 주저앉아 울고,

부모의 통곡은 하늘에 울부짖는다.

유명이 갈라지는 줄 뻔히 알거니,

목숨 보존을 어찌 기대할 수 있나.

남은 이는 오직 노인과 어린아이,

억지로 살자니 갖은 고생이라.

읍마다 반은 도망친 집들이고,

마을마다 밭은 다 황폐했구나.

누구네 집이라 쓸쓸하지 않고,

어디라 소연하지 않을 것인가.

 

妻挐啼躄地

父母哭號天

自分幽明隔

那期性命全

孑遺唯老幼

强活尙焦煎

邑邑半逃戶

村村皆廢田

誰家非索爾

何處不騷然

<趙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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