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2)<동명왕편>의 역사인식
  • (1)<동명왕편> 저술의 배경

(1)<동명왕편> 저술의 배경

 <東明王篇>은 명종 23년(1193) 李奎報가 저술한 장편 서사시이다.0461) 張德順은<東明王篇>을 英雄敍事詩로 보았다(張德順,<英雄敍事詩 東明王>,≪人文科學≫ 5, 1960, 101∼123쪽). 이 시는 1,400여 자의 本詩와 2,200여 자의 註로 구성되었는데, 동명왕이 태어나기 이전의 과정과 탄생할 때의 신비한 모습 및 그가 시련 속에서 역사적 대업을 성취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이규보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이야기를 시로 짓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지적된 바가 있어0462) 李佑成,<高麗 中期의 民族敍事詩>(≪韓國의 歷史認識≫ 상, 創作과批評社, 1975), 148∼190쪽.
朴菖熙,<李奎報의「東明王篇」詩>(≪歷史敎育≫ 11·12, 1969), 179∼200쪽.
河炫綱,<高麗時代의 歷史繼承意識>(≪韓國의 歷史認識≫ 상, 1975), 191∼211쪽.
卓奉心,<「東明王篇」에 나타난 李奎報의 歷史意識>(≪韓國史硏究≫ 44, 1983), 5∼106쪽.
이를 바탕으로<동명왕편>에 나타난 역사의식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규보는 의종 22년(1168)에 黃驪縣(지금의 여주)에서 호부낭중 李允綏와 金壤郡人 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이규보 이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집안이 한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는 9세 때에 이미 신동으로 그의 천재적 자질이 알려졌고 22세 때에는 司馬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禮部試에 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는 급제 후 관직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무신란 이후 문인들을 박대한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몇 년 동안 시와 술로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0463) “인생 한 세상이 어찌 그리 괴로운가. 賦를 지어도 추천해 줄 사람없고 벼슬을 얻어도 하찮음이 恨되네”라고 노래하였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3, 留醉閔判官光孝家主人走筆贈之). 그러한 가운데 부친을 여의고 천마산에 우거하면서 스스로를「白雲居士」라 하고<白雲居士錄>과<白雲居士傳>을 짓고 2년 후인 26세 때는<東明王篇>을 지었다.

 이규보는 최충헌집정기에 겨우 관직에 나갔고 그 후 최씨정권에 중용되었다. 그는 최씨정권과 밀착하여0464) 朴菖熙,<李奎報의 본질에 대한 연구>Ⅲ(≪外大史學≫3, 1990), 17쪽. 몽고에 보내는 국서를 작성하는 등 많은 시문을 지음으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재상에까지 올랐다가 70세에 물러났다. 그리하여 그는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권력에 편승하여 아부한「崔氏門客」이라는 貶評을 받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그의 문집에서 당시의 체제와 질서를 따르고 지키려는 이규보의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생애를 통하여 청렴결백으로 일관했으며0465) 朴菖熙, 위의 글, 8쪽. 격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기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는 실천적 지성인의 모습도 지니고 있었다.

 이규보가<동명왕편>을 저술할 당시는 바로 李義旼이 최고집권자였는데, 그 아래에서 고충을 겪고 있었던 다른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개인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시기적으로도 무신정권의 성립기인 명종대는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며, 국가행정의 문란 등으로 인하여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이규보 역시 이런 민란 및 수탈행위에 시달리는 백성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0466) 30여 편이 넘는 그의<道場齋醮疏祭文>(≪東國李相國集≫권 28)에서 민란이 속히 평정되길 바라는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이규보는 이와 같은 명종 말기의 혼란한 시대상황 아래서 정치적·사회적 문란을 목도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즉 이의민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유약하고 나태한 명종의 모습을 보아온 이규보는 굳건한 기상의 고구려 시조에 대한 시를 지음으로써 왕에 대해 간접적인 비판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스스로 자기 몸을 보존할 수밖에 없었던 무인집정기를 살아가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동명왕편>을 저술하여 국가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집권층에 아부한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러나 무신정권 아래에서 대부분의 문인들이 무신란 이전을 회고하는 입장에 머물러 있었으나,0467) 金哲埈,<高麗時代의 歷史意識의 變遷>(≪韓國文化史論≫, 1976), 145쪽. 이규보는 중국의 신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고구려 시조의 신이한 이야기를 통하여 시대적 관심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즉 그가 자기시대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동명왕편>을 썼을 것이라는 이규보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부터 출발하여, 이것이 표출하고 있는 역사의식을 밝혀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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